해설:
7절에서 8절 사이에 삼 년 정도의 시차가 있습니다. 유대 전통에 의하면 세 살 정도 되었을 때 젖을 뗐기 때문입니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시대에 젖을 떼는 것은 크게 축하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큰 잔치를 벌입니다(8절).
그 때 문제가 생깁니다. 문제의 발단에 대해 저자는 “이집트 여인 하갈과 아브라함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이삭을 놀리고 있었다”(9절)고 적습니다. 이 표현으로 저자는 사라의 태도에 변화가 생겼다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이삭이 생기기 전에 사라는 이스마엘을 자신의 아들로 여겼을 것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아이가 생기고 나니, 그를 하갈의 아들로 본 것입니다. 그러자 사라의 눈에 이스마엘의 모든 행동이 거슬려 보이기 시작합니다.
사라는 아브라함에게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요구합니다(10절). 그를 그냥 두면 맏아들의 권리를 따라 아브라함의 재산을 나누어 주어야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의 부당한 요구 앞에서 괴로워합니다(11절). 그는 기도로써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여쭈었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은 사라의 말대로 하갈과 이스마엘을 내보내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를 통해 한 민족이 나오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12-13절). 이 때 이스마엘은 십육 세 쯤 되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에 일찍”(14절) 아브라함은 가죽 부대에 물을 담고 빵을 준비하여 하갈의 어깨에 실어 줍니다. “내보냈다”는 표현은 이혼을 암시합니다(신 22:19). 열여섯 살 된 이스마엘에게 짐을 지우지 않은 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그를 애지중지 키웠던 것 같습니다. 하갈이 이스마엘을 데리고 “브엘세바 빈 들에서 정처없이 헤매고 다녔다”는 말은 갈 바를 모르고 방황했다는 뜻입니다.
정처 없이 방황하는 동안 가지고 나온 물이 떨어져 버립니다(15절). 유약하게 자란 이스마엘이 허기와 갈증에 지쳐 기진맥진 하는 것을 보고 하갈은 절망에 빠집니다. “덤불 아래에 뉘어 놓다”는 말은 “죽기를 기다리다”라는 뜻입니다. 하갈은 차마 아들이 죽는 꼴을 볼 수가 없어서 화살을 쏘아 닿을 정도의 거리에 떨어져 앉아 아들 쪽을 바라 보며 통곡합니다(16절). 어미의 통곡을 듣고서 이스마엘도 슬피 웁니다(17절).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다시 나타나십니다. 천사는 하갈에게, 아이의 울음 소리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으며 장차 그를 통해 큰 민족을 일으키실 것이니, 힘을 차리고 일어나 아들을 달래고 일으키라고 말합니다(17-18절). 천사의 위로를 듣고 고개를 들어 보니 곁에 샘이 보입니다(19절). 그는 가죽 부대에 물을 담아 아들에게 마시게 하고는 바란 광야로 가서 그곳에 정착합니다.
이 대목에서 저자는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에, 하나님이 그 아이와 늘 함께 계시면서 돌보셨다”(20절)고 적습니다. 하나님은 이삭만을 사랑하여 이스마엘을 내친 것이 아닙니다. 이삭에게는 그 나름의 계획이 있었고, 이스마엘에게는 또 그 나름의 다른 계획이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바란 광야에서 강인한 남성으로 성장했고, 혼기가 찼을 때 하갈은 이집트에서 며느리를 구하여 결혼 시킵니다(21절).
묵상:
사라와 하갈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들은 분별을 잃은 노인의 편애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의한 사회 구조와 불의한 인간들 사이에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사라는 매정하고 욕심 많은 여주인입니다. 또한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에 대해서만큼은 줏대 없이 휘둘리는 남편입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그들의 처사는 책망 받아 마땅합니다. 요즘 말로 하면 사라가 하갈에게 갑질을 해대고 있는 셈입니다. 이 일로 인해 고민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라의 말을 들어 주라고 하십니다.
정의와 공평의 하나님이 이러실 수는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하갈과 이스마엘에 대한 대책을 세워 두고 계셨습니다. 이스마엘을 통해 큰 민족을 세우려는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지려면 지금 당하는 고난을 감수해야 합니다. 사라의 소행은 분명 잘못 된 것이지만, 그 잘못을 사용하여 하나님은 당신의 빅 픽처를 만들어 가십니다. 임신 중에 하갈이 쫓겨났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사라의 집으로 다시 돌아가 인내하며 살라고 하셨습니다. 그 때는 그 처사를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제 보니, 그것은 이스마엘이 청년으로 성장할 때까지 아브라함의 보호를 받게 하려는 계획이었습니다. 사라의 하나님은 하갈의 하나님이기도 하셨고, 이삭의 하나님은 이스마엘의 하나님이기도 하셨습니다.
인간 현실을 보면 “하나님의 정의는 과연 살아 있는가?”라는 의문에 사로잡힐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온 우주의 운행과 인류의 역사를 다스리고 있다고 전제하고 보면, 하나님의 처사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하마스와 이스라엘의 전쟁을 보아도 그렇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저토록 악한 권력자들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 하나님의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개인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때로 너무도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겪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가?”라고 질문하게 됩니다. 하갈과 이스마엘이 당한 일이 딱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는 인간의 실수와 악행을 통해 하나님이 빅 픽쳐를 그려가고 계셨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다면 우리는 때로 당하는 부당한 일들을 견뎌낼 수 있습니다. 악의 현실에 대해 침묵하고 견디기만 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악의 현실을 고칠 수 있으면 고치도록 힘써야 합니다. 하지만 모든 악을 제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개인적인 일이든 사회적인 일이든 국가적인 일이든, 당하고 견디는 수밖에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시며 자신이 당하는 고난을 통해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심을 믿는다면, 하갈처럼 절망의 자리에서 일어날 힘을 얻을 수 있고, 하나님이 빚어가시는 미래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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