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사귐의 소리

운명을 바꾸고 싶은 열망 (창 25:27-34) / 김영봉목사

새벽지기1 2024. 5. 29. 06:26

해설:

성경의 이야기들은 샘플링으로 선택된 것들입니다. 어떤 인물 혹은 어떤 사건의 특징을 가장 잘 반영하는 이야기를 골라 기록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창세기의 저자는 에서와 야곱이 어떻게 성장했는지를 독자에게 알려 주기 위해 한 가지의 이야기를 기록합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에서와 야곱은 대조적인 인간형으로 형성됩니다. 에서는 진취적인 성향의 사람으로서 사냥꾼이 되어 바깥으로 쏘다닌 반면, 야곱은 내향인으로서 가정 일을 돌보았습니다. “차분한 사람이 되어”(27절)에 사용된 히브리어 ‘탐’은 “순전한” 혹은 “선량한”이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겉으로 볼 때 야곱은 누구에게도 해를 끼칠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은 큰 아들이 사냥해 온 고기를 좋아하여 에서를 아꼈고, 리브가는 야곱을 아꼈습니다(28절). 편애의 감정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하지만 그 감정을 그대로 방치하면 비극의 원인이 됩니다.   

 

저자는 두 사람의 인간됨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한 가지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에서가 사냥을 나갔다가 완전히 탈진되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그 때 야곱은 음식을 만들고 있었습니다(29절). 어떤 음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밝히지 않습니다. 30절에서 에서가 한 말을 제대로 번역하면 “그 붉은, 그 붉은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 우리 성경은 “팥죽”이라고 번역을 했었습니다. 지금은 그냥 “죽”이라고 번역을 해 놓았는데, “죽”일 수도 있고 “국”일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그 음식이 무엇이었느냐가 아니라 그 음식에 대해 에서가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있습니다.

 

에서가, 배고파 죽게 되었으니 음식을 좀 달라고 청하자 야곱은 맏아들의 권리를 양도하면 주겠다고 말합니다(31절). 고대 사회에서 맏아들은 다른 자녀들에 비해 큰 특권을 누렸습니다.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특별한 지위를 누렸고, 유산 상속에서도 다른 자녀들보다 더 많은 권리를 가졌습니다. 야곱이 에서에게 한 말에서 우리는, 그가 간발의 차이로 상실한 맏아들의 권리에 대해 매우 아쉬워 했고 어떻게든 그 권리를 탈취하고 싶어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야곱은 오래도록 이 순간을 기다려 왔을 것입니다. 에서가 사냥을 나갔다고 돌아오면 늘 허기진 상태였다는 것을 아는 야곱이 일부러 이런 상황을 기획했는지도 모릅니다.

 

에서는 야곱의 제안을 받아 들입니다(32절).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맏아들의 권리가 얼마나 큰 것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음에 분명합니다. 태어나면서부터 당연히 주어진 것이니 그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았을 것입니다. 야곱은 그 계약을 확실히 해 두기 위해 맹세를 하라고 요청합니다(33절). 에서가 그렇게 하니, 야곱은 그에게 음식을 주었고, 에서는 음식을 급히 먹어 치우고 사라집니다. 여기서 저자는 네 개의 동사를 연이어 늘어 놓음으로써(“먹었다”, “마셨다”, “일어났다”, “나갔다”) 에서의 경솔한 처신을 강조합니다. 그런 다음 저자는 “에서는 이와 같이 맏아들의 권리를 가볍게 여겼다”(34절)고 해설을 달아 놓습니다. 

 

묵상:

맏아들의 권리를 두고 야곱과 에서 사이에서 이루어진 흥정은 두 사람의 사고 방식과 행동 방식의 패턴을 보여 주는 하나의 사례입니다. 그 한 가지 이야기로 두 사람이 어떤 인물로 자랐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큰아들에게 주어지는 유형, 무형의 특권이 얼마나 컸는지를 고려하면 쌍둥이의 둘째로 태어난 야곱이 겪었을 억울한 심정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간발의 차이로 둘째가 되었는데, 그로 인해 자신에게 주어진 손실은 너무도 컸습니다. 그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덧씌워진 한계를 벗고 싶었습니다. 그런 간절함이 형의 허기를 볼모로 잡아 맏아들의 권리를 빼앗는 비열한 행동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이루어진 계약은 아무런 효력도 가지지 못합니다. 야곱도 그것을 몰랐을 리 없습니다. 그럼에도 이런 비열한 작전을 짜고 실행한 이유는 자신에게 부과된 둘째로서의 한계와 결핍을 그대로 받아 안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의 굴레에 대해 꿈틀거림으로 라도 저항해 보려 한 것입니다.   

 

반면, 에서는 맏아들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가 그래 대단해 보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는 맏아들로서의 권리보다는 책임과 의무를 더 무겁게 생각했을지 모릅니다. 야곱의 입장이 되어서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를 한 번이라도 생각해 보았다면 그것을 그리 가볍게 여기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에서에게서 보이는 또 다른 문제는 ‘즉물적 성향’입니다. 그에게는 육신적인 욕구의 만족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지금 당하고 있는 일이 가장 중요했습니다. 맏아들의 권리는 그에게 너무나 추상적이었고 미래적이었습니다. 그는 다분히 충동적이고 감각적인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참으로 신비한 것은 이런 과정을 통해 리브가에게 주어진 예언이 서서히 이루어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도 하나님이 주신 예언을 이루기 위해 의식적으로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각자가 자신의 성향과 욕망에 따라 판단하고 선택하고 행동합니다. 그로 인해 갈등과 분열과 상처와 아픔이 생겨납니다. 하나님은 없고 모든 것이 인간들의 오판과 실수와 악행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보면 하나님이 예고하신 대로 역사가 형성되어 갑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자주 눈을 감고 그분의 큰 그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눈 뜨고 보면 미시적인 세계만 보입니다. 눈을 감고 하나님 앞에 설 때 거시적인 세계, 그 영워한 세상이 보입니다. 그리고 그분의 인도하시는 손길에 맡기고 살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