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깨어지는 가정, 깨지지 않는 언약 (창세기 27:18~29)

새벽지기1 2023. 12. 4. 07:06
살면서 알게 되는 슬픈 사실은 가장 아픈 상처를 가정에서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쁜 소식은 아무리 아픈 상처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치유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깨어진 가정일지라도 하나님이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가지고 계신 계획이 포기되지 않고,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을 위해 주신 언약은 결코 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주변 사람들과 다투지 않고 믿음의 양보를 통해 승리를 경험했지만, 그의 가정에서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계속 나타나 깨어진 가정이 되고 맙니다. <창세기> 25장에서 형제간에 장자권을 죽 한 그릇에 사고 파는 불행한 거래가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27장에서는 거짓으로 가족을 속이는 일이 일어나 가족관계가 깨어집니다. 그러나 깨어진 가정에도 하나님의 언약은 깨어지지 않습니다.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은 인간의 연약함과 죄로 인해서 가정이 깨어질지라도 깨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집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보다 비교할 수 없이 크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우리의 배신보다 측량할 수 없이 크며,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의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역사하시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함께 대화하고, 소통하는 
공동체 모습 잃어버린 가정
<창세기> 27장에 야곱의 가족 간에 있었던 여섯 번의 대화가 등장합니다. 이 여섯 번의 대화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든 대화에 두 사람씩만 등장한다는 것입니다. 온 가족이 함께 대화하는 모습이 한 번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1절에서 4절 이삭과 에서의 대화, 5절에서 10절 리브가와 야곱의 대화, 28~29절 이삭과 야곱, 30~34절 이삭과 에서, 41-45절 리브라와 야곱, 46절 리브가와 이삭의 대화입니다. 이 대화 구조가 보여주는 의미는 온가족이 함께 대화하고, 소통하는 공동체의 모습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에서와 야곱이 대화하는 장면이나 리브가가 에서와 대화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습니다. <창세기> 27장 이야기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이삭이 나이가 많아 눈이 어두워질 정도로 약해졌을 때 에서를 축복하고자 결정합니다. 그래서 에서에게 자신이 즐기는 고기를 만들어 오라고 지시합니다. 아내 리브가가 이삭의 말을 엿 듣습니다. 남편에게 직접 듣는 게 아니라 에서에게 하는 말을 엿 듣습니다. 리브가가 서둘러 야곱에게 염소를 잡아 오라고 하고, 그 염소로 아버지를 위한 요리를 만들어서 에서처럼 속이고 축복을 가로채라고 지시합니다. 야곱이 당황 합니다. ‘형은 몸에 털이 많고 저는 피부가 매끈해서 아버지가 만일 만져 보면 금방 탄로 날 것인데 그러면 복은커녕 저주를 받을 것 아닙니까?’라며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밀어붙입니다. 야곱이 양털로 피부를 위장하고 엄마가 시키는 대로 아버지를 속입니다. 이삭이 위장한 야곱의 속임수에 넘어갑니다. 그리고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받습니다. 뒤늦게 고기를 만들어 온 에서와 이삭은 야곱에게 속은 줄 알고 분노하고 흥분하지만 때는 늦었습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려 했고, 이 계획을 엿들은 리브가가 야곱을 삼촌 라반에게 도피시킵니다.”
이삭에게 나타난 네 가지 문제
<창세기> 27장에 이삭의 문제가 드러납니다. 이삭에게 나타난 네 가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 은밀하게 에서만 축복하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축복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자신의 삶을 마무리하는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에서만 축복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모세오경에 나타난 당시의 축복은 공개적으로 모든 가족이 모인 자리에서 모든 자녀에게 주어지는 게 상식이었습니다. <창세기> 49장에서 야곱이 자녀들을 축복할 때 모두 불러 모읍니다. <창세기> 50장의 요셉도 축복할 때 모든 자녀를 불러 모읍니다. <신명기> 33장을 보면 모세가 백성들을 축복할 때 모두 모읍니다. 공적인 축복이어야 합니다. 모두에게 공포하는 축복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이삭은 리브가와 야곱을 부르지 않고 에서만 은밀하게 불러서 축복하려고 합니다. 여기에 이삭의 영적 무지함이 있고, 에서에 대한 지나친 편애를 보여줍니다.
둘째, “큰 자 어린 자를 섬기리라”는 하나님의 뜻에 불순종했습니다. 편애하는 에서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고려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삭은 에서가 야곱에게 장자권을 팔아넘겼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리브가를 통해 하나님의 뜻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삭은 여전히 에서에게 집착했습니다. 1절에서 “이삭이 늙어 눈이 침침해져서 잘 보이지 않게 되었다”는 표현은 “영적으로도 눈이 어두웠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셋째, 그는 죽을 때까지도 아들을 조건적으로 사랑했습니다.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자녀를 축복하는 것은 가장 순수하고 엄숙한 행위입니다. 그 상황에도 자기 입맛에 맞는 고기를 에서에게 요구했습니다. <창세기> 27장에 ‘사냥’이라는 단어가 8번 반복되고, ‘맛있는 음식’이라는 단어가 6번 반복됩니다. 이삭이 “내가 좋아하는 별미, 내가 좋아하는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오라. 나를 위하여 사냥하여…”라고 표현합니다. 얼마나 자기중심적인 태도입니까? 진정 에서를 사랑하기보다 마지막까지 자기중심적인 조건적 사랑을 보여줬습니다. 
넷째, 인내심 없는 조급한 모습이 나타납니다. 2절 “이제 내가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른다”, 4절 “내가 먹고 죽기 전에 너를 축복하고 싶구나”는 말을 보면 곧 죽을 사람 같은데, 이삭은 이 사건 이후 바로 죽지 않고 180세까지 살았습니다. <창세기> 27장 이후 40년을 더 살았습니다. 날마다 “나는 이제 곧 죽을 거 같아”라면서 40년을 더 살았습니다. 얼마나 조급한 태도입니까? 영적으로 무지하면 두려움이 많습니다. 그 두려움과 조급함은 영적 눈이 흐려졌을 때 일어나는 증상입니다. 
속이고, 관계가 깨어지고…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모습
결국 리브가의 계획을 야곱이 실행해서 아버지가 좋아하는 고기 요리를 만들어서 이삭을 속입니다. 그런데 이삭이 무엇인가 의심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자 이삭이 야곱에게 말했습니다. ‘내 아들아, 이리 가까이 오너라. 내가 너를 좀 만져 보아야겠다.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서인지 알아보아야겠다.’ 야곱이 자기 아버지 이삭에게 가까이 가자 이삭이 야곱을 만져 보고 나서 말했습니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서의 손이로구나.’ 야곱의 손이 그의 형 에서의 손처럼 털이 많았기 때문에 이삭은 알아보지 못하고 야곱을 축복했습니다”(21~23절).
가까이 오라고 한 것은 무엇인가 의심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야곱의 속임수를 분별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런데 이삭은 두 가지 실수를 했습니다. 사람털과 동물의 털을 구별하지 못했습니다. 또 음성보다 자신의 감각을 믿었습니다. 음성보다 감각을 믿은 것은 굉장히 무지한 것입니다. 사람이 죽기 전까지 살아있는 게 귀라고 하지 않습니까? 의식은 없어도 찬송을 불러 드리고 말씀을 읽어 드리면 들을 수 있는 마지막 채널이 청력입니다. 듣는 것을 믿어야 하는데 자신의 감각을 더 의지했습니다. 어쨌든 영적 분별력이 없는 이삭을 속인 것입니다. 
리브가의 문제는 무엇입니까? 남편을 거짓으로 속이고, 야곱과 아버지 그리고 형과의 관계가 깨어지게 만든 것입니다. 리브가가 이삭이 에서에게 하는 말을 엿 들었습니다. 중요한 결정을 남편에게 직접 듣지 못하고 엿 들어야 하는 게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리브가가 이삭의 이야기를 듣게 하셨을 때 문제는 어떻게 반응을 했느냐 입니다. 들어가서 남편에게 “에서만 축복하는 것은 옳지 않은 것입니다”라고 말하면 됩니다. 설득하면 됩니다. 그러나 리브가는 남편을 설득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막아야겠다는 조급함, 자신이 사랑하는 야곱을 보호하기 위해 남편에게 정중하게 직언하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자기 방법대로 속이기로 했습니다. 
이삭의 가정은 대화를 통해 마음을 터놓고, 서로의 문제를 내어놓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눈이 어두운 남편을 속이는 비열한 방법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리브가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은 모습입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으면 불신에서 나오는 불필요한 아이디어, 때로는 악한 아이디어가 나옵니다. 결국 아픔과 상처를 만들게 됩니다. 리브가가 사용한 방법은 하나님의 방법이 아니었습니다. 남편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지 않다고 해서 그것을 막으려고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리브가가 거짓말을 하면서까지 이삭의 복을 받아 냈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것입니까? 축복의 방향이 에서에서 야곱으로 바꾼 것은 맞지만, 하나님은 속임수를 사용하시지 않습니다. 리브가의 속임수는 죄이며, 있어서는 안 되는 부도덕한 일입니다. 리브가는 “저주가 있다면 내가 받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이 저주를 감당하겠다고 해서 마음대로 해도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곱이 지은 죄의 값은 야곱이 감당해야 했습니다. 
깨어진 가정일지라도,
하나님의 언약은 깨지지 않고 이어진다! 
이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거짓말까지 하면서 아버지에게 축복을 받아야 하는 것일까?” 당시 사회는 아버지가 곧 제사장 역할을 했고, 아버지의 축복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요, 아버지의 저주는 곧 하나님의 저주로 여겼습니다. 이 배경을 보면 당시 사람들이 말의 힘을 얼마나 굳게 믿는지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없는 것입니다. 당시 세계관에서는 아버지가 말하고 선포한 것은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또 한 번 선포한 것은 되돌릴 수 없다는 믿음도 있었습니다. 이 시대에는 상상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 말한 것을 얼마나 쉽게 취소합니까? 이 시대 말은 효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도장을 찍고 문서를 만듭니다. 오늘날은 말보다 문서가 힘이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문서가 아니라 말을 믿었습니다. 거슬러 올라가 보면 오늘날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삭은 “내가 다 축복했으니 이제 남아있는 복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축복해 주십시오”라고 하니까 하긴 했는데 축복이라고 보기 힘든 말을 합니다. 이삭은 야곱에게 속아서 한 축복이었지만 “만민이 너를 섬기고 열국이 네게 굴복하며 하나님의 복을 누리게 된다”는 축복을 선포했습니다. 놀랍게도 그 축복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언약의 축복이었습니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고 축복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
거짓과 속임수로 깨어진 가정일지라도 택한 백성들을 향한 하나님의 언약은 깨어지지 않고 이어집니다. 이삭의 무지함, 리브가의 간교함, 에서의 망령됨, 야곱의 간교한 속임수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난 것이었습니다, 이 가족구성원 모두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깨어지고, 상처와 아픔, 미움과 분노, 살인까지 이르게 되는 가정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가정을 버리지 않으시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이 그 후손들에게 계속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야곱이 이삭에게 가서 입을 맞추었습니다. 이삭은 야곱의 옷 냄새를 맡고 나서 야곱을 축복하며 말했습니다. ‘보아라. 내 아들의 향내는 여호와께서 축복하신 들의 향기로구나. 하나님께서 하늘의 이슬과 땅의 풍요로움, 곧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함을 네게 주실 것이다. 민족들이 너를 섬기고 나라들이 네게 절할 것이다. 너는 네 형제들의 주인이 될 것이며 네 어머니의 아들들이 네게 절할 것이다. 너를 저주하는 사람들은 저주를 받고 너를 축복하는 사람들은 복을 받을 것이다’”(27~29절).
그 가문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 이어집니다. 그런데 리브가와 야곱의 속임수로 깨어진 이삭의 가정이 죄를 그 당대에 끊지 않을 때 더 심각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습니다. 그것은 반은 사실이었습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비슷한 상황에서 누이라고 한 것은 100% 거짓말이었습니다. 리브가는 아들과 더불어 아버지를 완전히 속였습니다. 그 이후 야곱의 자녀들도 아버지를 속입니다. 요셉을 팔아넘기고 죽었다고 속입니다. 이것은 보면 아브라함의 작은 거짓말이 세대를 흘러갈수록 더 깊어집니다. 내가 한 거짓말이 자녀 때에 두 배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세대에 거짓과 속임수를 끊지 않으면 자녀들에게 그 거짓과 속임수가 눈덩이처럼 불어날 수 있습니다. 
야곱은 <창세기> 27장에서 다섯 번이나 거짓말 했습니다. 깨어진 가정은 그 죄와 악이 자녀로 내려갈수록 더 심한 무게와 부피로 증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 가정과 맺으신 언약을 깨뜨리지 아니하시고 계속 사랑하십니다. 이삭과 리브가, 에서와 야곱이 깨어짐으로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했고, 야곱이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복을 받은 야곱이 도망자가 된다는 게 아이러니 아닙니까? 그는 장자권을 가로챘지만 가정에서 누려야 할 장자의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사랑하는 아들을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방법에 순종하지 않으면 깨어진 아픈 결과를 겪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언약은 아프고 상한 과정에서도 여전히 지켜지고 있습니다. 역기능 가정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장차 오실 아브라함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가정의 아픔을 치유하고, 구원으로 이끄시는 하나님의 언약이 모든 깨어진 가정을 붙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준비하면서 한 주석에 나오는 이야기가 제 마음을 움직여 인용하려고 합니다. 
“어느 교회 주일 저녁예배를 인도하던 목사님이 연로하신 목사님이 참석하신 것을 보고 예배 중에 앞으로 나오셔서 무슨 말씀이든지 해주실 것을 요청했습니다. 그 연로하신 목사님이 이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배 선원으로 일하는 아버지가 그의 아들과 아들의 친구와 함께 태평양 연안을 벗어나 항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불어 닥친 폭풍우로 인해서 해안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배가 균형을 유지하지 못한 채 세 사람이 휩쓸리게 되었습니다. 구명줄을 누군가에게 던져줄 수 있었는데, 두 소년이 파도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몇 초 안에 결정해야 했습니다. 둘 중 한 사람에게만 구명줄을 던질 수 있는데 아들에게 던질 것인가, 아들의 친구에게 던질 것인가? 그 몇 초의 순간 아버지가 결정했습니다. 자신의 아들은 그리스도인이었고, 아들의 친구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아 사랑한다”고 말하고 아들의 친구에게 구명줄을 던졌습니다. 뒤집힌 배 위로 친구를 끌어 올렸을 때 아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고, 시신은 끝내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아버지가 왜 이런 결정을 했을까요? 자기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천국으로 가지만, 아들의 친구는 예수님 없는 영원한 죽음의 세계로 들어갈 걸 생각해서입니다. 그래서 그 짧은 순간 아들의 친구에게 구명줄을 던진 것입니다. 예배를 마치고 한 청년이 다가왔습니다. ‘목사님 멋진 내용이었지만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예수님을 믿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자기 아들을 포기합니까? 너무 비현실적인 내용이 아닙니까?’ 연로하신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당신 말도 일리가 있습니다. 현실적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포기하시는 것을 조금이라도 알게 해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내가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내가 바로 그 아버지였고, 당신의 담임목사가 그 아들의 친구였습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각자 편애하는 아들을 선택함으로 그 가정이 깨어짐을 경험합니다. 자신이 편애하는 자식만 사랑함으로 결국 자신을 사랑했고, 가정이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깨어진 가정을 회복시키려고 아들을 내어 주셨습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모든 깨어진 가정을 구원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깨어진 가정일지라도 하나님 축복의 통로가 되는 은혜를 이어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