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지금 여기 계신 하나님 (창세기 28:12~22) / 이재훈목사

새벽지기1 2023. 12. 26. 07:04
여러분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어느 때 체험하셨습니까? 대부분 성도들이 하나님을 만나는 체험이 있는 때는 평안 할 때가 아니라 불안할 때입니다. 성공했을 때가 아니라 실패했을 때입니다. 기쁜 일 보다는 슬픈 일을 통해서입니다. 삶의 위기가 종종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가 됩니다.

오늘 본문은 야곱이 삶의 위기 속에서 처음으로 하나님을 대면하는 사건입니다. 그동안 야곱은 부모의 장막 아래 , 특히 어머니의 보호 아래 안락함을 누리며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깊은 밤 광야에서 홀로 외롭게 누워있는 애처로운 상황에서 하나님을 만납니다. 이전에는 조상을 통해 하나님에 관해 들어서 아는 신앙이었지만, 이제는 직접 하나님을 대면하는 신앙이 되었습니다. 
야곱이 브엘세바를 떠나 하란을 향해 여행하고 있을 때 하나님을 만납니다. 견문을 넓히려고 하는 여행이 아니라 형 에서의 위협을 피해 어쩔 수 없어서 떠나는 도피 여행입니다. 자신의 죄로 인해 홀로 외롭게 여행해야만 했습니다. 자신이 원하는 장자권과 아버지의 축복까지 가로챘지만, 그는 가족과 이별한 도망자 신분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이때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야곱이 인생에서 처음 겪는 외로움과 두려움에 떨고 있을 때입니다. 우리가 힘들고 지쳐 낙망할 때, 인생의 가장 힘든 기간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인생의 위기는 하나님을 깊이 만나는 기회입니다. 브엘세바에서 하란까지는 약 800km입니다. 혼자 여행하기 매우 먼 거리입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란에서부터 가나안까지 들어온 바로 그 길입니다. 그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게 된 것입니다. 야곱이 약 2~3일 거리, 100km 정도 지나왔을 때 어느 날 밤 지친 몸으로 차가운 돌을 베개 삼아 잠 들었습니다. 그때 꿈을 꾸게 되었고, 그 꿈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이 깨어있을 때가 아니라 자고 있을 때 찾아오셨을까요? 깨어있을 때 야곱은 자기 자신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욕심과 속임수로 형과 아버지를 속여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고야마는 인생이었습니다. 자신의 세계에 갇혀 있는 야곱이 깨어있을 때 하나님이 나타나셨다고 할지라도 그분의 음성을 분별하지 못 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듣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자아가 강한 사람이라도 자고 있을 때는 철저하게 수동적이 됩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도 전혀 새로운 외부의 세계가 들어갈 수 있는 통로가 꿈입니다. 심리학자들은 꿈을 자신의 과거의 일이나 이루지 못한 욕구들, 무의식이 표출되는 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그런 영역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꿈의 또 다른 차원을 말합니다. 무의식 세계로 들어가는 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세계로 들어가고, 미래의 일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이 놀랍고 충격적인 일들을 예언하실 때 꿈을 통해 가르쳐 주시곤 하셨습니다. 애굽의 바로에게도 꿈을 통해 미래에 일어날 일을 보여 주셨고, 요셉과 마리아에게도 꿈을 통해 메시아의 출생을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지금까지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개인적으로 나타나서 말씀하셨지만, 야곱에게는 직접 임재하신 경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보다 어머니의 보호가 더 크게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어머니의 보호막이 거둬지고 홀로 걸어가는 인생 속에서 오직 하나님만이 그의 보호자가 되실 수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하늘과 땅 연결하는 
유일한 길, 진리, 생명 
야곱의 꿈속에서의 체험은 두 가지 요소로 나타납니다. 시각적인 것과 청각적인 것입니다.  
“그가 꿈에 보니 사닥다리 하나가 땅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아 있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천사가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12절). 
야곱이 꿈에서 본 모습에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가 있었고, 그 사닥다리로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 사닥다리 위에 계셨습니다. 이 사닥다리는 하늘과 땅 사이에 거대한 간격이 있다는 것과 이 간격을 이어주는 사닥다리가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며 하늘과 땅을 서로 연결하고 있었습니다. 이 장면만으로는 이것이 어떤 의미인지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이 신약에서 야곱이 꿈에 본 이 장면의 의미를 해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께서 덧붙여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요 1:51).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천사들이 ‘인자 위에서’, 사닥다리 위에서가 아니라 인자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야곱이 본 이 장면 속에 자신을 대입하셨고, 예수님이 곧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사닥다리라고 해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이 본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의 후손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늘과 땅을 연결하기 위해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신 사닥다리가 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미리 본 것입니다. 야곱이 본 사닥다리 위에는 하나님이 계셨지만, 예수님은 사닥다리 맨 위에서 우리를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땅으로 내려오셔서 사닥다리 가장 아래에서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입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늘 위에서 우리를 부르셨다면, “올라오라. 하늘까지 올라오라”고 부르셨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역사상 수많은 문학 작품이나 수도사들이 천국에 이르는 계단을 하나씩 하나씩 오르는 거라고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틀린 것입니다. 구원은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바벨탑의 원리입니다. 바벨탑은 땅에서 시작해서 하늘에까지 닿으려는 노력입니다. 그러나 야곱이 본 사닥다리는 땅에서 하늘까지 닿으려는 시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 주신 사닥다리이며, 그 사닥다리를 타고 이 땅에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초대하신 것입니다. 믿음이란 땅에서부터 하늘까지 사다리를 타고 오르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으로 내려오신 예수님을 사닥다리 가장 밑에서 만나서 그분과 함께 오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초청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한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다시 와서 너희로 나 있는 곳에 있게 하리라”고 초청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이 사닥다리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는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구원의 통로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로 올라갈 수 있게 됩니다. 그분은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야곱의 첫 번째 예배 경험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여호와, 곧 네 조상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다. 네가 누운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들에게 주겠다. 네 자손이 땅의 티끌과 같이 돼서 동서남북으로 퍼지게 될 것이다. 너와 네 자손을 통해 이 땅의 모든 족속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내가 너와 함께 있을 것이며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켜 주겠다. 그리고 너를 이 땅으로 다시 데리고 오겠다. 내가 네게 약속한 것을 다 이룰 때까지 너를 떠나지 않겠다’”(13~15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주신 약속을 조건 없이 동일하게 약속하셨습니다. 때로 하나님이 “가나안땅을 떠나지 말라”고 말씀하셨지만, 죄를 짓고 도망하는 상황, 하나님을 잘 알지도 못하고, 경외하는 마음이 가득 차 있지 않은 야곱에게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언약을 신실하게 지키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땅과 자손의 약속, 복의 통로가 되게 하겠다는 모든 약속을 확인해 주셨습니다. 게다가 안전하게 지켜주셔서 이 땅으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추가해 주셨습니다. 훗날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을 상기하며 돌아오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벧엘에서 하나님을 예배하게 됩니다. 이 약속의 말씀과 함께 야곱이 꿈에서 깨어납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꿈에서 주어졌지만, 야곱은 꿈에서 깨어나 하나님께 응답하는 장면이 일어납니다. 꿈에서 주어진 계시지만, 꿈에서 깨어났을 때 하나님께 응답하게 된 것이 예배입니다. 야곱이 처음으로, 개인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 자리는 평안한 집이 아니었습니다. 어두운 광야요, 차가운 바위 위요, 두려움이 엄습한 곳이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하나님을 만난 것입니다. 형 에서를 피해 달아나던 야곱이 이제는 하나님께 달려가는 자가 된 것입니다. 첫 번째 예배의 경험이 하나님을 대면한 이후 우리에게 나타나는 체험입니다.   
어디에나 계시는 하나님
“야곱이 잠에서 깨어나 말했습니다. ‘참으로 이곳은 여호와께서 계신 곳인데 내가 몰랐구나.’ 그리고 그는 두려워하며 말했습니다. ‘이 얼마나 두려운 곳인가! 이곳이 바로 하나님의 집이며 이곳이 하늘의 문이구나’”(16~17절). 
야곱은 그곳을 ‘벧엘’, 하나님의 집이라고 불렀습니다. 또 ‘하늘의 문’이라고 불렀습니다. 하늘의 문이 열린 하나님의 집은 멋진 성전이 아니었습니다. 홀로 있는 외로운 광야요, 바위 위였습니다. 돌베개를 베고 잠든 곳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사람은 환경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상황도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체험한 야곱에게 세 가지 깨달음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하나님이 어느 곳에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야곱은 자신이 누워 자고 있던 그곳에도 하나님이 임재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야곱은 하나님이 어쩌면 자신이 살고 있는 집, 어떤 일정한 장소, 아브라함과 이삭이 예배한 자리에만 계신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여기에도 계시는구나. 내가 몰랐구나.” 야곱의 깨달음을 보고 “당연한 것을 왜 몰랐을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의 신앙에도 하나님을 어떤 장소에 제한하려는 경향이 분명히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러 예배당에 오는 것입니까? 이 말은 맞기도 하지만 틀리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예배당 안에만 계신다는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면 틀리고, 어느 곳에나 계시지만 특별히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 예배당에 모였다고 하면 맞습니다. 하나님은 예배당 안에만 계시고, 예배당에서만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고, 내가 일하는 일터, 가정 등 내가 있는 모든 곳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임재의식이 없다면 우리는 야곱처럼 ‘내가 있는 그곳에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잘못된 생각 속에서 살고 있을지 모릅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주 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내가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에 계시며 지옥에 잠자리를 마련해도 거기에 계십니다. 내가 새벽 날개를 타고 바다 저 끝에 내려앉더라도 어디에서든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으로 나를 꼭 붙드실 것입니다”(시 139:7~10). 
내가 어디로 가든 거기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지금 여기 우리가 있는 곳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낯을 피할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겠습니까? 내가 주 앞을 떠나 어디로 피하겠습니까?” 갈 곳이 없습니다. 저 하늘 끝, 바다 끝에 가더라도 하나님은 거기 계십니다. 
아주 가까이 함께 계시는 하나님
둘째, 하나님이 아주 가까이 함께 계시는 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야곱이 돌베개를 베고 있었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함께 베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광야를 걸을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광야를 함께 걸으셨습니다. 우리가 아파서 병원에 입원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병원에 함께 입원해 계십니다. 휴가갈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야곱의 첫 번째 깨달음이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 없다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 깨달음은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와 가까이 계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거리를 두는 분은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입니다. 우리에게 죄가 있으면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싶어합니다. 하나님과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마음의 특징이 왠지 교회도 멀리하고 싶어집니다. 물론 교회에 문제가 있어서 상처를 입고 떠나는 경우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성도들과의 교제를 멀리한다던지, 때로는 목회자를 괜히 멀리합니다. 봐도 못 본 척 합니다. 목회자만 하나님과 가깝다는 게 아니라 목회자를 보면 반갑고 정겹다면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 있는데, 왠지 피하고 싶다면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공동체 성도들을 피하고 싶다면 생각해 봐야 합니다. 어쩌면 공동체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하나님의 낯을 피하고 싶은 마음 일지 모릅니다.   
1930년대 나와서 오랫동안 우리의 생각을 주장하는 메리 스티븐슨(Mary Stevenson)이라는 분의 ‘모래 위의 발자국(Footprints in the Sand)’이라는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어느 날 밤, 나는 주님과 함께 해변을 걷고 있는 꿈을 꾸었습니다. 하늘 저편에 자신의 인생의 장면들이 번쩍이며 비춰졌습니다. 한 장면씩 지나갈 때마다 나는 모래 위의 발자국을 주목해 보았습니다. 어떤 때는 두 쌍의 발자국이 있었고, 또 다른 어떤 때는 한 쌍의 발자국만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가 바로 나의 인생에서 가장 비통하고, 슬프고, 실패한 시기들이었습니다. 그것이 나를 괴롭히고 마음에 걸려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따르기만 하면 항상 저와 동행하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시기에 왜 한 쌍의 발자국밖에 없습니까?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에 주님께서 저를 위해 그곳에 계시지 않았던 것 아닙니까?’ 주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한 쌍의 발자국만 보이는 기간은 바로 내가 너를 업고 걸어갔던 때이다.’” 
우리가 가장 힘들 때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라고 하면 하나님이 “내가 지금 너를 업고 있다. 그래서 네가 지금 이렇게 버틸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 
셋째, 하나님은 약속을 반드시 이루시는 전능하신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증거가 야곱이 서원기도를 하며 자발적으로 작정한 것에 나옵니다.  
“야곱이 서원하며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저와 함께 계셔서 제가 가는 이 여정에 저를 지키시고 제게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시며 제가 제 아버지 집으로 무사히 돌아가게 해 주신다면 여호와께서 제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제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모든 것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겠습니다’”(20~22절). 
야곱의 기도의 내용이 단순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보호하시고 약속하신대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기둥으로 세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되고, 자신의 소유의 10분의 1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보면 이 기도가 하나님과 흥정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만약’이라는 단어가 없었다면 얼마나 성숙한 기도였을까 싶습니다. 전체 문맥에서 보면 하나님과 흥정하기보다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신뢰하는 믿음의 표현을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만일’이라는 단어를 ‘하실 것이므로’라고 번역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실 것이므로 저는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되게 할 것이며, 하나님께 모든 것의 10분의 1을 드리겠습니다”라고 해석하는 것입니다. 십일조는 고대사회에서 자신이 드리는 그 대상의 절대적 주권을 인정하는 행위였습니다. 야곱이 소유의 10분의 1을 드리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하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어떤 해석이든 하나님이 야곱의 서원를 받으셨다는 게 중요합니다. 그 내용이 자신의 조건을 만들어 붙인 게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을 기초로 고백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야곱이 하나님의 약속에 따라 자신의 삶의 방향을 재조정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의 체험입니다. 하나님을 만나 삶의 방향을 하나님 중심으로 다시 조정한 것입니다. 
야곱에게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자신이 있는 바로 그곳을 예배의 장소로 만들었습니다. 자고 일어나 돌베개를 성전 기둥으로 변화시킵니다. 불편한 장소가 예배의 장소, 바위가 성소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지 않고,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드림의 삶, 나눔의 삶이 되었습니다. 야곱에게서 처음으로 드리겠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이제 모든 것이 내 것이라는 인생이 아닙니다. 움켜쥐는 야곱, 발꿈치를 잡는 인생이 아닙니다. 손을 펴는 자로써의 첫 번째 체험입니다. 위기 속에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바로 이 변화를 만들었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해서 앞으로 어려움이 전혀 없을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앞으로도 야곱은 여전히 힘겨운 여행을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여행의 의미가 바뀐 것입니다. 사람의 위협을 피해 도망가던 사람이 하나님께 나아가고, 달음질하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형제만을 두려워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도망자의 여행에서 순례자의 여행이 되었습니다. 
인생에서 뜻하지 않은 위기에 처해 있을 때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더 가까이 다가오시는 기회임을 믿어야 합니다. 지금 여기 계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나와 더 가까이 하시는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