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약’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어떤 문제라도 시간이 흐르면 저절로 회복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확한 진리가 아닙니다. 상처가 너무 깊어서 오랜 시간이 흘러도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는 문제도 있습니다. 야곱에게 시간이 해결해 주지 못한 문제는 형 에서와의 관계였습니다.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형의 위협을 피해 도망 나온 이후 형 에서와의 관계가 회복되지 않은 채 20여 년이 흘렀습니다. 삼촌 라반에게 도피한 이후 20여 년을 보냈습니다. 그렇게 오래 머무는 계획을 한 것이 아닙니다. 형 에서의 위협이 사라질 때까지, 그 기간을 배우자 만나는 시간으로 삼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야곱이 라반에게 속습니다. 14년 동안 라반에게 속아 종으로 일했습니다. 라반을 처음 만났을 때는 아버지 이삭에게서 받지 못한 사랑을 삼촌에게 받을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라반은 야곱을 부족한 노동력을 채우는 목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야곱은 삼촌 라반에게 속임을 당하면서 자신이 속였던 아버지와 형의 상처를 일부라도 느끼고 공감하는 기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야곱의 또 다른 면도 보게 됩니다. 야곱은 장막 안에만 머물며 조용하고, 연약하고, 섬세한 이미지로만 생각했는데, 라반의 집에서 일하는 동안 그가 매우 강인한 사람으로 나타납니다. 사랑하는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수일처럼 인내하며 일한 기간을 포함해서 20여 년 동안 야곱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라반의 양 떼를 돌봤습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2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을 순순히 내어 줄리 없었기에 가족들과 함께 몰래 도망치듯 빠져 나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야곱이 많은 가족과 부유함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반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많은 것을 소유한 자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의 마음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두렵고 괴로웠습니다. 형 에서와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20여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에 있습니다. 라반이 야곱을 순순히 내어 줄리 없었기에 가족들과 함께 몰래 도망치듯 빠져 나와야만 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야곱이 많은 가족과 부유함을 가진 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라반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려고 했지만,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많은 것을 소유한 자로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으로 돌아오는 야곱의 마음이 기쁘지 않았습니다. 두렵고 괴로웠습니다. 형 에서와의 관계가 해결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야곱의 계획과 연약한 믿음
“야곱은 너무 두렵고 마음이 괴로워서 자기와 함께한 사람들과 양 떼와 소 떼와 낙타들을 두 무리로 나누었습니다. 그는 ‘만약 에서 형이 와서 한 무리를 공격하면 남은 진영은 달아나도록 해야겠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7~8절).
야곱이 두려웠던 것은 형 에서가 군사 400명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야곱이 대비를 합니다. 첫 번째 대책으로 자신의 가족과 가축 등 소유물을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만일 에서가 공격해 오면 한 그룹이라도 도망갈 수 있도록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입니다. 두 번째 대책으로 에서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가축, 모두 합하면 580마리 정도를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엄청난 선물입니다. 그것을 또 여러 그룹으로 나눕니다.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입니다. 에서가 선물을 받고 마음이 누그러지면 또 다른 선물을 주는 형식을 취하려고 나눴습니다. 많은 양의 가축 떼를 선물로 보내면서 또 다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축 떼가 에서의 진영으로 가면 이동 속도가 느려질 것이고, 가축이 많이 움직이면 정보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 야곱의 종들이 에서의 진영에 들어가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도 있는 복합적인 아이디어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야곱은 기도도 했습니다. ‘기도도 하였다’는 표현에 담긴 뉘앙스는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꾀로 대비하되 기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가 고향을 떠날 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야곱이 두려웠던 것은 형 에서가 군사 400명을 이끌고 오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소식을 듣고 야곱이 대비를 합니다. 첫 번째 대책으로 자신의 가족과 가축 등 소유물을 두 그룹으로 나눕니다. 그래서 만일 에서가 공격해 오면 한 그룹이라도 도망갈 수 있도록 위험을 분산하는 전략입니다. 두 번째 대책으로 에서를 위해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여러 종류의 가축, 모두 합하면 580마리 정도를 선물로 준비했습니다. 엄청난 선물입니다. 그것을 또 여러 그룹으로 나눕니다.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것입니다. 에서가 선물을 받고 마음이 누그러지면 또 다른 선물을 주는 형식을 취하려고 나눴습니다. 많은 양의 가축 떼를 선물로 보내면서 또 다른 효과도 기대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축 떼가 에서의 진영으로 가면 이동 속도가 느려질 것이고, 가축이 많이 움직이면 정보도 쉽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또 야곱의 종들이 에서의 진영에 들어가서 만일의 사태에 대비할 수도 있는 복합적인 아이디어가 숨겨져 있었습니다. 야곱은 기도도 했습니다. ‘기도도 하였다’는 표현에 담긴 뉘앙스는 하나님만을 전심으로 의지한 기도가 아니라 자신의 꾀로 대비하되 기도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은 그가 고향을 떠날 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을 잊지 않고 기도했습니다.
“야곱은 기도했습니다. ‘오, 제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여호와여, 제게 ‘네 고향 네 친척에게로 돌아가라. 그러면 내가 네게 은혜를 베풀어 줄 것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풀어 주신 그 모든 자비하심과 신실하심을 감히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제가 지팡이 하나만을 갖고 이 요단강을 건넜지만 이제는 이렇게 두 무리나 이루었습니다. 저를 제 형의 손, 곧 에서 형의 손에서 구원해 주소서. 그가 와서 저와 제 처자식들을 공격할까 두렵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내가 분명히 네게 은혜를 베풀어 네 자손이 바다의 모래처럼 셀 수 없이 많아지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9~12절).
야곱은 그가 떠날 때 베델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연약한 믿음이었습니다. 앞서 선물을 준비하고, 도피 계획을 세우는 것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해서 자기 머릿속에서 나오는 대비책을 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그가 떠날 때 베델에 나타난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고, 돌아오게 하겠다는 약속을 믿는 믿음이 그에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도한 것입니다. 그 믿음은 연약한 믿음이었습니다. 앞서 선물을 준비하고, 도피 계획을 세우는 것들은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못해서 자기 머릿속에서 나오는 대비책을 더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약속대로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준비와 보호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래서 <창세기> 32장 1~2절을 보면 야곱이 길을 갈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그에게 이미 나타났고, 야곱이 그를 보고 “하나님의 군대다”라고 말하며 그것을 “마하나임”이라고 불렀습니다. 왜 하나님의 군대를 미리 보여줬습니까? ‘내가 너를 이렇게 보호하고 있다’, ‘함께 하고 있다’는 의미로 미리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야곱은 연약한 믿음으로 두 그룹으로 나눠 에서가 한 그룹을 치면 다른 그룹이라도 도망가리라. 또 선물을 준비해서 에서의 마음을 물질로 누그러뜨리려는 시도를 한 것입니다. 불신까지는 아니지만, 연약한 믿음임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믿음이 없을 때는 언제나 불필요한 아이디어를 내게 됩니다. 야곱이 세운 모든 계획의 초점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에서에게 있습니다. 에서의 마음을 풀거나 혹은 풀리지 않을 경우 어떻게 위험을 최소화할 것인가에 대한 계획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은 야곱에게 초점이 있었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마음을 어떻게 풀 것인가에 초점을 두었지만, 하나님은 야곱의 마음이 어떻게 변화될 것인가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두려워하는 야곱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신 이유
“그리고 야곱은 홀로 남아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나타나 동틀 때까지 야곱과 씨름을 했습니다”(24절).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습니다. 도전자가 야곱이 아니라 어떤 사람입니다. 얍복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에 이르는 요단강 줄기 옆에 있습니다. 야곱이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건너게 해놓고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에서가 보낸 자객이나 강도가 아닌가 생각하고 싸웠을 것입니다. 꿈이나 환상 속의 싸움이 아닙니다. 실제 육체적인 싸움입니다. 야곱이 싸움하는 가운데 자신을 공격 해온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에서 천사로도 임재하시지만, 신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으로 찾아오셨습니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수준에 맞추고 자신을 낮추며 찾아오셨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여행객으로 있을 때는 세 명의 여행객으로 오셔서 자녀가 있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는 군대 장관으로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나갈 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싸우는 장관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왜 육체적 싸움을 하는 자로 나타나셨습니까? 야곱의 전공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형과 아버지와 싸우되 속여서 이겼습니다. 삼촌 라반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늘 자신이 더 가지려고, 움켜쥐려는 야곱의 인생은 싸움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싸우는 자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이 가족들과 소유들을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왜 홀로 남았습니까? 기도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무서운 이기심이 숨어 있습니다. 모두 보내고 자기만 남았습니다. 보낸 사람들도 두 그룹 나눴습니다. 에서가 한 그룹을 치면 다른 그룹은 도망가게 하려고 나눴습니다. 자기는 가장 뒤에서 강을 건너지 않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도망가겠다는 뜻입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어떤 사람이 야곱에게 먼저 싸움을 걸었습니다. 도전자가 야곱이 아니라 어떤 사람입니다. 얍복강은 갈릴리 호수에서 사해에 이르는 요단강 줄기 옆에 있습니다. 야곱이 가족들과 모든 소유를 건너게 해놓고 홀로 남아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에서가 보낸 자객이나 강도가 아닌가 생각하고 싸웠을 것입니다. 꿈이나 환상 속의 싸움이 아닙니다. 실제 육체적인 싸움입니다. 야곱이 싸움하는 가운데 자신을 공격 해온 이 사람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역사에서 천사로도 임재하시지만, 신적인 인간의 모습으로 나타나실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왜 야곱에게 싸움을 거는 사람으로 찾아오셨습니까? 구약에 나타난 하나님은 언제나 인간의 수준에 맞추고 자신을 낮추며 찾아오셨습니다. <창세기> 18장에서 아브라함이 여행객으로 있을 때는 세 명의 여행객으로 오셔서 자녀가 있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여호수아> 1장에서는 군대 장관으로서 여호수아가 가나안 땅을 정복하러 나갈 때 여호와의 군대 장관이 그 앞에 나타났습니다. 싸우는 장관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야곱에게는 왜 육체적 싸움을 하는 자로 나타나셨습니까? 야곱의 전공이 싸움이기 때문입니다. 야곱은 형 에서와 뱃속에서부터 싸웠습니다. 형과 아버지와 싸우되 속여서 이겼습니다. 삼촌 라반과 싸움에서 이겼습니다. 늘 자신이 더 가지려고, 움켜쥐려는 야곱의 인생은 싸움의 인생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싸우는 자로 찾아오신 것입니다.
야곱이 가족들과 소유들을 얍복강을 건너게 하고, 왜 홀로 남았습니까? 기도하기 위해서입니까? 아닙니다. 무서운 이기심이 숨어 있습니다. 모두 보내고 자기만 남았습니다. 보낸 사람들도 두 그룹 나눴습니다. 에서가 한 그룹을 치면 다른 그룹은 도망가게 하려고 나눴습니다. 자기는 가장 뒤에서 강을 건너지 않고 있었습니다. 강 건너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면 도망가겠다는 뜻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때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무장 간첩을 이끌고 온 김신조의 간증을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도 잊히지 않는 이야기가 자신은 청와대 인근에 국군이 숨어 있는 것을 알았다고 했습니다. 눈치를 챘다는 것입니다. 진퇴양란의 상황에서 그가 어떻게 살았냐면 부하들은 진격하게 하고, 자기는 뒤로 빠졌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비겁함을 회개하면서 고백하는 간증을 들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전략입니다. 그는 과연 가족들을 사랑하는 사람일까요? 두 그룹으로 나눴으면 앞 그룹에 누가 있었을까요? 아마 덜 사랑하는 레아 가족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뒤가 라헬입니다. 라헬보다 자신을 더 사랑한 것입니다. 제가 어느 장례식에 갔는데 아내를 먼저 보낸 분이 있었습니다. 막 슬피 울고 통곡했습니다. ‘아, 아내를 저렇게 사랑하셨구나.’ 마음이 숙연해 지고 뭐라고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울면서 말하는 내용을 들어보니까 이상했습니다. “이제 나는 어떻게 살라고…”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 살 걱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는 것인지 자기 미래를 걱정하는지 헷갈렸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불안이 느껴졌습니다. 저분이 아내의 죽음을 진짜 슬퍼하는 것인지 아니면 앞으로 어떻게 살지를 걱정하는지 구분이 잘 안됐기 때문입니다. 얼마 안 있어서 그분이 재혼하셨습니다. 너무 섭섭했습니다. 자기를 걱정하던 울음이었다고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이기심이 깊이 숨어 있습니다. 야곱이 모두 보내고 혼자 남아있는 것은 이기주의입니다. 가족들까지 모두 건너보내고 자기는 뒤로 도망갈 전략을 세운 것입니다. 아마 가족들에게는 그 말을 안했을 것입니다. “그래도 나는 살아야 되지 않겠니? 무슨 문제 있으면 연락해라”가 아니라 “나는 처리할 일이 있으니까 먼저 가”라고 말해놓고 자기는 뒤에 남아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을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깨어짐의 축복
하나님이 야곱을 해치시려고 싸움을 거신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걸어오신 싸움은 건강한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입니다. 야곱에게 숨어 있던 이기심이 무엇입니까? 야곱이라는 이름 그 자체입니다. “움켜쥐는 자”라는 이름 자체가 야곱이 가지고 있었던 이기심의 정체입니다.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싸웠다는 문장을 히브리어로 보면 매우 흥미롭습니다. 야곱을 히브리어로 발음하면 ‘야코브’입니다. 얍복은 ‘야보크’입니다. 싸우다는 ‘야베크’입니다. ‘야코브가 야보크에서 야베크한 것입니다’. 모음만 바뀌는 것입니다. 얍복강이라는 지명도 의미가 연결이 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습니다.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하는 사이에 야곱의 엉덩이뼈가 어긋나게 됐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동이 텄으니 나를 보내다오.’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갑니다’”(25~26절).
야곱은 자기와 싸우는 특별한 존재를 놓지 않으려고 결코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신적인 인간이 야곱의 엉덩이뼈를 위골시켰습니다. ‘환도뼈’라고 합니다. 상체와 하체를 연결하는 뼈를 위골시킨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장난치듯 씨름할 때 어릴 때는 부모가 무조건 져야 합니다. 자녀가 툭 밀었는데 부모가 뒤로 나가떨어지면 매우 좋아합니다. 부모가 져야 합니다. 아이에게 끝까지 이기려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자녀가 자라면서 교만해 질 때는 한 번씩 꺾어 줘야 합니다. 무작정 져주면 안 됩니다. 가끔은 부모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엉덩이뼈를 어긋나게 하셨습니다. 이 뼈가 어긋나면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기어가듯 가야 합니다. 왜 많은 뼈 중에 엉덩이 뼈일까요? 야곱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만일의 경우 ‘자신은 도망가리라’입니다. 자신이 의지한 것은 엉덩이뼈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마지막 계획입니다. 만일의 경우 도망갈 수 있는 다리를 붙잡아줄 수 있는 엉덩이뼈를 하나님이 치시는 순간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야곱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같이 깨어진 것입니다. 무엇이 깨졌을까요? 자신의 계획이 깨어진 것이고, 이기심이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기심을 깨뜨리기 위해서 싸움을 걸어오신 것이고, 그의 엉덩이뼈를 위골시킨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야곱이 간절히 매달립니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갑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의 뼈를 어긋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꾀를 깨뜨리기 못하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꾀를 깨뜨리시며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인생으로 바꿔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깨어짐의 축복입니다. 야곱은 상함을 얻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바라는 자가 되었습니다. 육체적 싸움이 영적인 기도가 됩니다. 이때부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엉덩이뼈가 위골되지 않았으면 영적 기도로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짐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기도자가 되게 하려고 우리와 싸우시고,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시점에서 이름을 다시 묻는 것은 이 싸움이 이름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늘 움켜쥐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십니다.
“그 사람이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하는 것을 알고는 야곱의 엉덩이뼈를 쳤습니다. 야곱이 그 사람과 씨름하는 사이에 야곱의 엉덩이뼈가 어긋나게 됐습니다.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동이 텄으니 나를 보내다오.’ 야곱이 대답했습니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갑니다’”(25~26절).
야곱은 자기와 싸우는 특별한 존재를 놓지 않으려고 결코 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때 그 신적인 인간이 야곱의 엉덩이뼈를 위골시켰습니다. ‘환도뼈’라고 합니다. 상체와 하체를 연결하는 뼈를 위골시킨 것입니다. 부모가 자녀와 함께 장난치듯 씨름할 때 어릴 때는 부모가 무조건 져야 합니다. 자녀가 툭 밀었는데 부모가 뒤로 나가떨어지면 매우 좋아합니다. 부모가 져야 합니다. 아이에게 끝까지 이기려는 부모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자녀가 자라면서 교만해 질 때는 한 번씩 꺾어 줘야 합니다. 무작정 져주면 안 됩니다. 가끔은 부모에게 힘이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야곱의 엉덩이뼈를 어긋나게 하셨습니다. 이 뼈가 어긋나면 제대로 걷지 못합니다. 기어가듯 가야 합니다. 왜 많은 뼈 중에 엉덩이 뼈일까요? 야곱의 계획이 무엇입니까? 만일의 경우 ‘자신은 도망가리라’입니다. 자신이 의지한 것은 엉덩이뼈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야곱의 마지막 계획입니다. 만일의 경우 도망갈 수 있는 다리를 붙잡아줄 수 있는 엉덩이뼈를 하나님이 치시는 순간 야곱이 얍복 나루터에서 꼼짝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야곱 안에 있는 무엇인가가 같이 깨어진 것입니다. 무엇이 깨졌을까요? 자신의 계획이 깨어진 것이고, 이기심이 깨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이기심을 깨뜨리기 위해서 싸움을 걸어오신 것이고, 그의 엉덩이뼈를 위골시킨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야곱이 간절히 매달립니다. “저를 축복하지 않으시면 못 갑니다.” 하나님이 때로 우리의 뼈를 어긋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하게 만드시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기 꾀를 깨뜨리기 못하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꾀를 깨뜨리시며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인생으로 바꿔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깨어짐의 축복입니다. 야곱은 상함을 얻었지만, 하나님의 축복을 간절히 바라는 자가 되었습니다. 육체적 싸움이 영적인 기도가 됩니다. 이때부터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의 엉덩이뼈가 위골되지 않았으면 영적 기도로 변화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깨어짐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의 축복을 바라는 기도자가 되게 하려고 우리와 싸우시고, 우리를 깨뜨리십니다.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름을 묻습니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 시점에서 이름을 다시 묻는 것은 이 싸움이 이름과 관련이 있다는 것입니다. “야곱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처럼 늘 움켜쥐는 인생을 살아왔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그때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꿔주십니다.
깨어짐이 온전함으로!
“그 사람이 말했습니다. ‘이제 네 이름은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다. 네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기 때문이다’”(28절).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엉덩이뼈가 상해서 비틀거리며 매달리는 사람에게 “이겼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진 상태에서 축복을 간청하는 일을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승리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도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승리 하십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패배할 때입니다. 깨어질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져 항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전심으로 바랄 때 승리자가 됩니다. 하나님도 승리자시고, 우리도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프레드릭 뷰크너는 야곱의 패배를 ‘장엄한 패배’라고 했습니다. 이 패배를 통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그의 몸에 평생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장 칼벵이 이 장면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싸우실 때는 왼손으로는 싸움을 걸어오시는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보호하시고 방어하신다.”
하나님은 싸움을 걸어서 우리를 깨트리시고, 또 한편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이 깨어짐으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패배자가 됨으로써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깨어짐으로써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역설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또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가 깨어져 완전히 죽음에 넘겨진다는 신호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넘겨지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깨어져 죽음에 넘겨지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하나님과 겨뤄 이긴자, 부활의 승리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얍복 나루터가 우리가 나아가는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자리를 ‘브니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내가 보존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과 대면하면 죽는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를 깨뜨리실 때는 언제나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얍복 나루터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게 했듯이, 우리를 깨뜨리시고, 영적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어짐이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이 깨어지면 완전히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야곱을 ‘이스라엘’로 바꿔 주셨습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엉덩이뼈가 상해서 비틀거리며 매달리는 사람에게 “이겼다”고 말하는 것은 모순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깨어진 상태에서 축복을 간청하는 일을 “네가 이겼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승리했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지셨습니까? 아닙니다. 하나님도 승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늘 승리 하십니다. 하나님이 승리하시는 때가 언제입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온전히 패배할 때입니다. 깨어질 때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깨어져 항복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전심으로 바랄 때 승리자가 됩니다. 하나님도 승리자시고, 우리도 승리자가 되는 것입니다. 신학자 프레드릭 뷰크너는 야곱의 패배를 ‘장엄한 패배’라고 했습니다. 이 패배를 통해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고, 그의 몸에 평생 하나님의 흔적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개혁자 장 칼벵이 이 장면을 재미있게 표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싸우실 때는 왼손으로는 싸움을 걸어오시는 동시에 오른손으로는 보호하시고 방어하신다.”
하나님은 싸움을 걸어서 우리를 깨트리시고, 또 한편 우리를 일으켜주시고, 축복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야곱이 깨어짐으로 이스라엘이 되었습니다. 패배자가 됨으로써 승리자가 되었습니다, 깨어짐으로써 온전하게 되었습니다. 역설을 경험한 것입니다. 이러한 역설이 또 어디서 일어납니까?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함께 우리가 깨어져 완전히 죽음에 넘겨진다는 신호입니다. 우리가 죽음에 넘겨지면 그것으로 끝납니까?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다시 살아납니다. 우리의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완전히 깨어져 죽음에 넘겨지고, 야곱이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는 것처럼, 하나님과 겨뤄 이긴자, 부활의 승리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얍복 나루터가 우리가 나아가는 십자가의 모형입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만난 자리를 ‘브니엘’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대면하여 내가 보존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하나님과 대면하면 죽는다는 통념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을 깨뜨렸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죽이시는 분이 아니라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우리를 깨뜨리실 때는 언제나 다시 살리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하나님이 얍복 나루터에서 야곱을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게 했듯이, 우리를 깨뜨리시고, 영적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깨어짐이 축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 옛사람이 깨어지면 완전히 다시 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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