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이재훈목사

당신을 붙잡고 있는 꿈이 있는가(창세기 37장 1~11절) / 이재훈목사

새벽지기1 2024. 1. 10. 06:21
세계를 움직였던 가장 유명한 연설 중 하나는 1963년 8월 28일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이 미국 워싱턴 D.C. 링컨기념관 앞에서 한 것입니다. 그 연설 마지막 부분에 “나에게는 꿈이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반복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의 꿈은 자신의 꿈이 아니었습니다. 구약 성경 선지자들의 예언 말씀을 인용하며 자신의 꿈을 영상으로 보여주듯이 펼쳐 보인 이 연설에 나타난 그의 꿈이 많은 사람에게 전염되었고, 미국을 변화시켰습니다. 현재 미국의 위기는 루터 킹 목사님의 꿈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이 꿈을 계속 이어가고, 하나님의 꿈을 받은 이들이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을 받은 사람들이 세상을 변화시킵니다. 그 어떤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고 결국 그 꿈이 이루어집니다. 문제는 ‘우리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꿈이 있는가’입니다. 이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는 루터 킹 목사님이 품었던 하나님의 꿈이 우리를 붙잡고 있는지, 교회를 붙잡고 있는지, 나의 삶을 붙잡고 있는지 질문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꿈에 붙잡힌 요셉
요셉은 하나님의 꿈에 붙잡힌 사람입니다. 요셉의 생애에서 특이한 점은 하나님이 한 번도 직접 나타나신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집에서 양을 치는 소년의 때도, 낯선 타지에서 노예로 살 때도,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죄수로 있을 때도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계시가 없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하나님의 계시가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기록에서 하나님의 계시가 있을 때마다 기록으로 남겨진 것과 비교해 보면 아주 특이합니다. 요셉의 삶에는 성경에 근거한 직접적인 하나님의 계시가 없었지만,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를 받았던 그 어떤 조상보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함께하심을 믿으며 살았습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가장 성실하고, 정직하고, 성결하고, 은혜로운 성품으로 가장 예수님을 닮은 사람을 꼽으라면 요셉입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의 이기적인 성품을 닮지 아니하고, 잘못을 행하던 형들 같지도 않았습니다. 요셉을 보면 환경이나 가정 배경이 한 사람의 성품 형성에 절대적인 요소는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만나는 통로는 꿈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신비로운 꿈이 그의 인생을 붙잡았고, 하나님의 섭리에 쓰임 받게 하셨습니다. 요셉을 무너뜨리는 많은 요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꿈에 사로잡힌 그를 무너뜨린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꿈에 붙잡힌 사람은 모든 것을 뛰어넘기 때문입니다. 때로 그 꿈이 산산이 깨어진 것 같은 상황을 만나지만, 그 깨어진 꿈이 또 다른 섭리로 나타나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집니다. 
요셉이 17세에 꾼 꿈으로 그의 이야기가 시작합니다. 꿈은 자신이 만드는 게 아닙니다. 어떤 이들은 꿈을 ‘무의식의 표출’ 혹은 ‘과거 기억의 잔재’ 등으로 해석합니다. 그러나 때로 하나님이 뜻을 보여주시고,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 주실 때 꿈을 사용하실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어느 날 요셉에게 찾아온 하나님의 꿈이 그의 인생을 붙잡았고, 그 꿈이 너무 강렬하고 생생해서 깨어있는 중에도 그의 삶을 이끌어 갔습니다. 
하나님의 꿈은
그 어떤 시련과 유혹에도 이뤄진다!
요셉의 인생이 우리에게 중요한 모델이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처럼 오늘날 하나님의 직접 음성을 받고, 계시를 받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하나님의 기록된 말씀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는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내적 음성, 교회 공동체, 말씀, 성도들의 간증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주어지는 시대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처럼 하나님이 직접 나타나시는 계시의 시대보다 요셉처럼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나타나십니다. 성령 안에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임재는 요셉처럼 간접적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하나님이 직접 계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나타나심을 경험했던 이들보다 더욱 신실한 믿음을 요셉이 보여줬다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나타나지 않으셨기 때문에 믿기 어렵습니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어떻게 하나님의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가 아니라 하나님이 다양한 믿음의 영역에서, 다양한 채널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꿈이 이루어지도록 나의 삶을 내어 드리느냐 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요셉처럼 자신의 삶을 붙잡는 하나님의 꿈에 이끌려 살지만, 어떤 사람들은 헛된 꿈에 이끌려 무너지고 맙니다. 상황에 의해서 좌절되는 것은 하나님의 꿈이 아닙니다. 시련이나 유혹에 무너지는 것도 하나님의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꿈은 그 어떤 시련이 와도 그 시련을 먹으면서 자라고, 그 어떤 유혹이 와도 뛰어넘어 이루어집니다.  
‘편애’의 부정적 영향력을 극복 
요셉이 17살에 꾼 꿈은 두 개였습니다. 두 개의 꿈이 같은 내용을 다르게 반복합니다. 첫 번째 꿈은 요셉이 묶은 단이 일어나 똑바로 서 있는데 형들이 묶은 단이 요셉의 단을 둘러싸서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두 번째 꿈은 해와 달과 11개별이 요셉에게 절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을 의미하는 볏단과 해와 달, 별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것은 너무 명확해서 해석이 필요 없는 꿈이었습니다. 이 꿈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아무런 말씀도 하지 않으시는 최초의 꿈입니다. 이 꿈은 하나님이 요셉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미리 보여줍니다. 그러나 요셉이 받은 하나님의 꿈을 무너뜨리는 요소들이 있었습니다. 
첫째, 야곱의 편애입니다. 편애는 잘못된 사랑이 가져올 수 있는 위험입니다. 요셉은 아버지가 늘그막에 얻은 아들이기 때문에 다른 아들들보다 사랑했습니다. 레아와 라헬 중에서 라헬을 더 사랑했고, 라헬이 낳은 첫째 아들이기에 전체 가문에서는 11번째 아들이지만, 야곱에게는 첫째 아들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요셉을 가장 사랑했습니다. 그 증거로 요셉에게만 귀한 옷을 지어 입혔습니다. 어쩌면 다른 아들들은 평범하거나 누더기 같은 양치기 옷을 입고 자랐겠지만, 요셉에게만 채색옷을 입혔습니다. 야곱의 편애는 형제들 간에 심각한 불화와 갈등을 만들게 됩니다. 야곱은 자기 집안 내력인 ‘편애’라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이 이미 편애로 자랐습니다. 이삭과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을 편애했고, 야곱이 어머니의 편애를 경험했던 아픔이 있었다면 자신의 자녀에게는 그 아픔을 주지 말아야 했습니다. 그런데 대개 부모의 죄악이 자녀에게 반복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을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죄’라고 말합니다. 세대를 넘어 이어지는 죄가 무엇인지 밝히고 끊어야 합니다. 모진 시집살이를 한 며느리가 ‘나중에 나는 절대로 시집살이 시키지 않을거야’라고 분명히 결심하는데, 어느 날 보면 더 지독한 시어머니가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버지에게 맞고 자란 아들이 ‘나는 절대로 안 때릴꺼야’라고 말하지만, 결국 똑같이 행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심리학에 ‘적대자와 동일시되는 원리’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집중하는 것을 따라서 자신의 모습이 형성되는 것입니다. 자신을 해롭게 한 사람에게 집착하면 결국 닮아 가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해서 그 사람만 집중적으로 생각하면 어느새 원하지 않았지만, 그 사람처럼 변해가는 것입니다. 
제가 군에서 진급 신고를 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저는 소위에서 중위로 진급하고, 제 옆에는 중위에서 대위로 진급하는 장교 진급 신고가 있었습니다. 사단장님 앞에서 신고를 하니까 바짝 얼었습니다. 그 사단 인사참모가 연습을 시켰습니다. 제 옆에서 중위에서 대위가 되는 분이 자꾸 계급장을 달 때 “대위 000”라고 해야 하는데, 계속 “중위 000”라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옆에서 ‘저거 하나를 못하나. 중위까지 되어서’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분 때문에 계속 연습을 하니까 화가 났습니다. 그런데 제가 사단장 앞에서 “대위 이재훈”이라고 했습니다. 너무 충격을 받아서 모두 웃고 말았습니다. 2계급 특진을 스스로 해버렸습니다. 사단장도 웃고 모두 웃고 말았습니다. 제가 왜 그랬을까요? 계속 ‘대위라고 해야 하는데 왜 못 할까? 저거 하나가 안 돼가지고 어쩌자는 거지? 나는 단기로 있고 저분은 장기로 군인이 될 분인데, 우리나라 국방을 챙겨야 하는 사람이 저거 하나를 못 하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제 머릿속에 ‘대위’라는 말이 가득해서 제가 소위에서 대위로 진급을 신고해 버렸습니다.
무엇인가에 몰두하면 자신도 똑같이 됩니다. 야곱은 아버지가 형 에서를 편애하고, 자신은 어머니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갈등이 많았겠지만, 결국 자신도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야곱의 가문에 ‘편애’라는 죄가 계속 흘러 내려왔습니다. 결국 그것은 요셉의 성품에도 똑같이 영향을 미칠 수 있었습니다. 리브가의 편애로 인해 야곱이 이기적인 성품이 되었다면, 혼자만 채색옷을 입혀주는 사랑을 받았다면 틀림없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인간이 될 위험성이 많았습니다. 이것이 요셉에게 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요셉은 야곱의 편애가 가져오는 위험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 증거가 <창세기>  37장 12절 이하 본문에 나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심부름을 시킵니다. 형들이 지금 ‘세겜’이라는 지역에서 양을 치고 있는데 잘 치고 있는지 살펴보고 오라고 합니다. 그래서 요셉이 세겜으로 갑니다. 그런데 형들이 안 보입니다. 요셉이 자기만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냥 오면 됩니다. 그런데 요셉은 계속 형들을 찾아다닙니다. 계속 헤매다가 사람들에게 물어봤더니 “그 사람들은 도단으로 갔습니다”라고 합니다. 도단은 거기서 더 올라가야 합니다. 요셉이 그 말을 듣고 아버지께 돌아오면 끝입니다. 그런데 요셉은 도단까지 형들을 찾아갑니다. 이 사건은 요셉이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지만 이기적으로 변질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어떤 사람은 “그러면 채색옷도 입지 말았어야지”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벌 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요셉이 “아버지, 안됩니다. 저도 형들과 똑같이 양치기 옷을 입겠습니다”라고 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것까지 거부할 순 없었습니다. 어쨌든 요셉이 도단까지 따라가는 모습을 보면 야곱과 같은 이기적인 성품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도단에서 형들에 의해서 종으로 팔려 갑니다. 
사실 요셉이 도단에 안가도 되는 것이었습니다. 세겜에 갔는데 형들이 없으니까 아버지께 돌아가서 “가 봤는데 형들이 없습니다. 형들이 어디서 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면 이기적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의 편애가 자신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을 극복했다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올곧은 성품, 미움 받은 또 다른 이유
둘째, 형들의 미움과 질투입니다. 아버지의 편애가 가져온 부정적인 영향력입니다. 형들이 요셉을 미워해서 인사조차 나누지 않았습니다. 요셉만 채색옷을 입는 것도 미움의 이유였지만, 더 중요한 미움의 이유가 있었습니다. 2절에서 “요셉은 형들의 잘못을 보면 그대로 가서 자기 아버지에게 전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어떤 분들은 이 부분을 가지고 ‘요셉이 미성숙한 고자질쟁이’라고 해석합니다. 이것이 항상 역사적으로 논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요셉의 ‘올곧은 성품’으로 해석합니다. 분명한 잘못을 분별했다는 점은 분별력이고, 또 용기 있게 아버지에게 말한 것은 잘하고 있는 형들을 깎아내려서 자기만 사랑받기 위한 의도라기보다 형들이 잘못에서 돌이키도록 해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매튜 헨리 목사님도 “요셉이 악의로 고자질한 게 아니라 신실한 동생으로서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동생으로써 형들을 훈계할 수 없으므로 훈계할 권위와 책임이 있는 아버지에게 알려서 형들을 바로 잡도록 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용조 목사님도 “정직한 성품 때문에 손해를 보더라도, 자신이 미움을 받더라도, 형들이 잘못을 고치도록 하려는 정직함 때문에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습니다. 하용조 목사님도 매튜 헨리 목사님의 해석을 이어받은 것입니다. 요셉이 형제들의 잘못을 아버지에게 말한 것은 있지도 않은 일을 고자질에서 자기만 사랑받으려는 모습이 아닙니다. 옳은 것을 지키고, 옳지 않은 것을 거절하려는 신실하고 정직한 성품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미움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꿈들을 세상이 미워합니다. 사단과 악의 세력들은 정직하고 의롭게 옳은 길을 가려는 하나님의 꿈을 구덩이 속에 던져버리고 싶어 합니다. 하나님의 꿈을 가지고 세상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 세상에 “옳고 그름이 있다”고 부르짖는 사람들, “세상은 구원이 필요하다”고 외치는 사람들에게 항상 구덩이와 함정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요셉이 도단에서 형들에 의해 구덩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약대들을 준비하십니다. 사단과 악의 세력은 우리를 끊임없이 구덩이에 던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그 구덩이마다 약대들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요셉의 미숙함에도…

셋째, 요셉의 미숙함입니다. 요셉의 미숙함은 형들의 잘못을 아버지께 고한 게 아닙니다. 그것은 용기 있는 정직함입니다. 요셉의 미숙함이 어디서 발견됩니까? 그의 꿈은 정말 분명한 의미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족들에게 너무 성급하게 있는 그대로 말한 것입니다. 평소 요셉을 미워하던 형들이 더욱 그를 미워하게 된 계기가 됩니다. 
“형들이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정말 우리의 왕이 되며 네가 정말 우리를 다스리겠다는 것이냐?’ 형들은 요셉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요셉을 더욱더 미워했습니다”(8절). 
형들은 요셉의 꿈이 하나님의 꿈이라고 받아들일 믿음도 없었습니다. 요셉이 꿈을 꾸며냈다고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심지어 야곱조차 요셉의 꿈을 듣고 책망했습니다. 
“요셉은 형들뿐만 아니라 아버지에게도 그 꿈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그의 아버지가 그를 꾸짖으며 말했습니다. ‘무슨 그런 꿈을 꾸었느냐? 그러면 나와 네 어머니와 네 형들이 정말 네게 와서 땅에 엎드려 네게 절하게 된다는 말이냐?’”(10절). 
야곱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형들의 시기와 질투는 분명 문제입니다. 그런데 형들과 아버지의 수준을 알면서 꿈에서 본 그대로를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을 주변 사람들에게 있는 그대로, 곧장 말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때로는 침묵 속에, 때로는 오랜 시간 속에 단련되어야 합니다. 그 꿈을 공개적으로 말하기 전에 기다렸어야 합니다. 때를 기다렸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 꿈임을 확신했을지라도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시간표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서두르지 말아야 했던 이유는 그 꿈이 그의 성취만이 아니라 가족과 주변 사람들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꿈은 시간 속에서 제련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꿈을 손보시는 게 아니라 꿈꾸는 자를 손보시는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꿈꾸는 요셉을 손보시는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다윗에게 왕으로 기름 부으셨지만, 사울로부터 고난을 받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꿈을 받은 사람들이 그 꿈이 통로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 속에서 연단되고, 제련되어야 합니다. 요셉은 섣불리 형들과 아버지에게 꿈을 말함으로써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물론 형들의 잘못이지만 요셉이 조금 더 지혜로웠다면 고통을 줄일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구나 자라는 과정에서 완전한 성숙을 기대하기는 무리입니다. 우리는 계속 요셉이 받은 꿈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초점을 두고 바라봐야 합니다. 요셉이 형들의 미움으로 종으로 팔려가 이집트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의 미숙함에도, 형들의 미움과 질투에도 불구하고 요셉에게 주신 꿈을 이루어 가십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를 붙잡고 있는 하나님의 꿈이 무엇입니까? 이 시대의 타락은 하나님의 꿈을 받은 사람들이 꿈을 잃어버릴 때 일어납니다. 일반적으로도 꿈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동물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꿈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은 인간이 주인 된 세상을 꿈꾸다가 더 퇴락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가 잃어버린 꿈이 무엇입니까? 선교사들이 이 땅에 복음을 전하고, 믿음의 선배들이 가졌던 꿈이 무엇입니까? 우리만 잘 사는 꿈이 아닙니다. 전 세계에 비참한 일들이 많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전쟁과 기근, 재난으로 지구촌 곳곳의 이웃들이 굶주리고, 재난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무슨 꿈을 꿔야 할까요? 우리나라만 잘 사는 게 아니라 지구촌 곳곳에 있는 이웃들을 돕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복음이 필요한 나라에 복음을 전하고, 빵이 필요한 나라에게 빵을 나눠주는 나라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가 나를 위한 꿈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위한 꿈을 꾸고, 마지막 때 가장 많은 복음을 증거하는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가 그 일에 쓰임 받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꿈이 우리 삶을 붙잡을 때 하나님이 그 꿈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모든 성도들을 붙잡는 하나님의 꿈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의 꿈에 붙잡힌 인생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