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깊은 감동을 주는 드라마와 영화도 있지만, 매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문화 콘텐츠가 등장하고 있어서 심각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미국 할리우드에서 성경이야기로 만든 영화들이 있는데, 삼손과 들릴라, 다윗과 밧세바 같은 남녀 관계 혹은 잘못된 관계의 내용들입니다. 헐리우드 영화중에서 요셉과 보디발의 아내 이야기는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았습니다. 삼손과 다윗은 유혹에 넘어갔지만, 요셉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지 않은 이유는 사람들이 유혹에 넘어가는 장면은 기대하지만, 유혹을 이기는 장면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말세로 갈수록 사람들이 성적인 자유를 추구하고, 문란함이 극심해지기 때문에 그 문화의 흐름과 사람들의 기호에 맞춰서 영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느 시대 건 그 문명의 몰락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있겠지만, 공통점은 성적인 타락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작가 필립 얀시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책에 성과 문화의 발전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 86개 사회집단을 조사한 결과가 있습니다. 한 결 같이 문화가 발전하는 것은 성적인 순결과 일부일처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회의 발전과 우월성은 성적인 순결을 추구할 때 발전했고, 그렇지 않았을 때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그 시대의 도덕성 기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성적 윤리를 낮춰서 도덕불감증에 걸리게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백록>을 쓴 성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사도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신학자입니다. 그가 젊은 시절 도덕적 기준에 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백록>에서 그가 고백한 내용을 보면 한 여인과 오랫동안 동거를 했습니다. 당시 사회의 도덕적 수준에 비춰서는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서> 말씀을 통해 절대 윤리의 기준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시 사회의 도덕 수준을 기준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윤리학자들은 도리어 어거스틴을 공격합니다. “그 여인과 관계를 청산한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고 공격합니다. 이 시대 기준으로 보면 어거스틴이 지나치게 잘못했다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요셉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중요한 메시지인 이유는 성적인 유혹을 이기고, 거룩하고 순결한 남자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타락했을지라도 유혹이 강한 게 문제가 아니라 거룩하고 순결한 영성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했고, 유혹에는 강했으며, 감옥에서도 신실했습니다. 당시 요셉 주변에는 교회도 없었습니다. 가족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말씀도 없었습니다. 정기적인 예배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꿈을 통한 계시, 어린 시절 할아버지 이삭과 아버지 야곱과 나누었던 친밀한 대화가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곧고, 정직하고, 순결한 성품으로 하나님 앞에 나간 귀한 믿음의 모범입니다.
여러분, 어느 시대 건 그 문명의 몰락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가 있겠지만, 공통점은 성적인 타락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작가 필립 얀시의 <뜻밖의 장소에서 만난 하나님>이라는 책에 성과 문화의 발전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 86개 사회집단을 조사한 결과가 있습니다. 한 결 같이 문화가 발전하는 것은 성적인 순결과 일부일처제와 연관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한 사회의 발전과 우월성은 성적인 순결을 추구할 때 발전했고, 그렇지 않았을 때 퇴보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그 시대의 도덕성 기준을 낮추는 것입니다. 성적 윤리를 낮춰서 도덕불감증에 걸리게 하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고백록>을 쓴 성 어거스틴입니다. 그는 사도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미쳤던 신학자입니다. 그가 젊은 시절 도덕적 기준에 의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고백록>에서 그가 고백한 내용을 보면 한 여인과 오랫동안 동거를 했습니다. 당시 사회의 도덕적 수준에 비춰서는 누가 뭐라고 할 수 없는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로마서> 말씀을 통해 절대 윤리의 기준이신 하나님을 만나고 나서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는 당시 사회의 도덕 수준을 기준으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기준, 성령의 법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회개하고 돌이키는 삶을 살았습니다. 오늘날 윤리학자들은 도리어 어거스틴을 공격합니다. “그 여인과 관계를 청산한 것이 오히려 잘못된 것”이라고 공격합니다. 이 시대 기준으로 보면 어거스틴이 지나치게 잘못했다고 공격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시대에 요셉의 삶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중요한 메시지인 이유는 성적인 유혹을 이기고, 거룩하고 순결한 남자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시대가 타락했을지라도 유혹이 강한 게 문제가 아니라 거룩하고 순결한 영성이 부족한 것이 문제입니다. 요셉은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충실했고, 유혹에는 강했으며, 감옥에서도 신실했습니다. 당시 요셉 주변에는 교회도 없었습니다. 가족도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성경 말씀도 없었습니다. 정기적인 예배도 없었습니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하나님의 꿈을 통한 계시, 어린 시절 할아버지 이삭과 아버지 야곱과 나누었던 친밀한 대화가 전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올곧고, 정직하고, 순결한 성품으로 하나님 앞에 나간 귀한 믿음의 모범입니다.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
형들을 따라 요셉이 도단까지 따라갔습니다. 세겜으로 형들을 찾아갔는데 찾지 못하고, 도단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도단까지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형들에 의해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바로의 경호대장 보디발의 집에 종으로 팔려 갔습니다. 형들에게 살해당할 뻔하고, 종으로 팔려 간 요셉의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가 있었겠습니까? 큰 상처와 아픔을 가지고 시작한 종의 생활이 얼마나 큰 고통이었겠습니까? 그러나 요셉은 그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바로의 친위대장 보디발의 신임을 받는 사람으로 성장했습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하게 됐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사람인 주인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요셉의 주인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가 하는 일마다 여호와께서 잘되게 해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2~3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안일과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맡긴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 때문에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집 안에 있는 것에나 들에 있는 것에나 보디발이 가진 모든 것에 내렸습니다”(5절).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만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 더 나아가 그 집 전체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셨습니다. 요셉이 하는 일은 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하기 싫어하고, 때로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는 일일지라도 그 일을 정직하고 의롭게 행하는 자에게 함께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요셉은 형통하게 됐습니다. 요셉은 이집트 사람인 주인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요셉의 주인은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시고 그가 하는 일마다 여호와께서 잘되게 해 주시는 것을 보았습니다”(2~3절).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안일과 자기가 가진 것을 다 맡긴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 때문에 그 이집트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셨습니다. 여호와의 복이 집 안에 있는 것에나 들에 있는 것에나 보디발이 가진 모든 것에 내렸습니다”(5절).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말씀이 반복이 되고 있습니다. 요셉에게만이 아니라 그가 하는 일, 더 나아가 그 집 전체에 하나님이 복을 내리셨습니다. 요셉이 하는 일은 종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일상생활 속에서 가장 하기 싫어하고, 때로 수치스럽게 여길 수 있는 일일지라도 그 일을 정직하고 의롭게 행하는 자에게 함께하심을 보여주십니다.
요셉이 거룩과 순결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에
그런데 하나님이 왜 요셉과 함께 하셨을까요? 물론 그가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의 언약을 받은 상속자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유독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하신다는 말씀이 반복됩니다. 요셉이 종으로 일할 때나 죄수로 일할 때 하나님이 왜 그와 함께 하셨는지를 설명해 주는 사건이 오늘 본문입니다. 요셉이 거룩과 순결로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을 보면 하나님이 왜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를 형통케 하셨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보디발 아내의 유혹을 단호하게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끊임없이 끈질기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함께 있지도 아니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가 음모를 꾸밉니다. 어느 날 요셉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려고 집에 들어갔을 때 아무도 없고 보디발의 아내만 그곳에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보디발의 아내가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모든 종을 내보내고 요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강압적으로 요셉을 자신에게 이끌려고 했지만, 요셉은 그것을 뿌리치고 도망합니다.
여러분, 보디발 아내의 유혹이 어떻게 강해졌는지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눈짓으로 시작합니다. 여성들의 눈화장이 이집트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여인들이 세계 최초로 눈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눈을 주목하기 위해 화려한 치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날마다 요구하고, 나중에는 함정까지 팠습니다. 자신과 둘만 있을 수 있는 함정을 준비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요셉의 반응을 보십시오. 요셉이 어떻게 단호해졌는지를 주목하십시오. 처음에는 거절하며 듣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빨리 도망했습니다.
사실 요셉은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요셉이 20대 청년 아니겠습니까? 또한 외로운 상황 아닙니까? 홀로 팔려와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외로움은 성적 유혹을 받기 쉬운 상태입니다. 외로움이 인간의 영혼을 잠식할 때 성적인 타락의 썰물이 영혼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가정이 있든 없든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신호입니다.
지금 요셉은 종입니다. 그에게 당시 왕의 친위대장 권세를 가진 보디발의 아내가 말하는 것은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거역하기 어려운 신분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오늘날로 말하면 강압적 위력에 의한 성추행이라고 규정됩니다. 권위자를 거부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쉽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 요셉의 위대한 믿음입니다. 요셉이 가능했다면 이 시대 우리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번의 선택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선택과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가 요셉에게 끊임없이 끈질기게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함께 있지도 아니하는 것으로 대응했습니다. 그러자 보디발의 아내가 음모를 꾸밉니다. 어느 날 요셉이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하려고 집에 들어갔을 때 아무도 없고 보디발의 아내만 그곳에 있었습니다. 틀림없이 보디발의 아내가 음모를 꾸민 것입니다. 모든 종을 내보내고 요셉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강압적으로 요셉을 자신에게 이끌려고 했지만, 요셉은 그것을 뿌리치고 도망합니다.
여러분, 보디발 아내의 유혹이 어떻게 강해졌는지를 보십시오. 처음에는 눈짓으로 시작합니다. 여성들의 눈화장이 이집트에서 시작됐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고대 이집트 여인들이 세계 최초로 눈화장을 했다고 합니다. 눈을 주목하기 위해 화려한 치장을 했다는 것입니다.
보디발의 아내는 요셉에게 날마다 요구하고, 나중에는 함정까지 팠습니다. 자신과 둘만 있을 수 있는 함정을 준비했습니다. 여기에 대한 요셉의 반응을 보십시오. 요셉이 어떻게 단호해졌는지를 주목하십시오. 처음에는 거절하며 듣지 않았습니다. 함께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빨리 도망했습니다.
사실 요셉은 유혹에 넘어가기 쉬운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요셉이 20대 청년 아니겠습니까? 또한 외로운 상황 아닙니까? 홀로 팔려와 외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외로움은 성적 유혹을 받기 쉬운 상태입니다. 외로움이 인간의 영혼을 잠식할 때 성적인 타락의 썰물이 영혼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가정이 있든 없든 외로움을 느낀다는 것은 굉장히 위험한 신호입니다.
지금 요셉은 종입니다. 그에게 당시 왕의 친위대장 권세를 가진 보디발의 아내가 말하는 것은 명령과 같은 것입니다. 거역하기 어려운 신분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오늘날로 말하면 강압적 위력에 의한 성추행이라고 규정됩니다. 권위자를 거부하는 것은 오늘날에도 쉽지 않다고 여겨지는데, 그것을 거부하고, 무너지지 않았다는 것이 요셉의 위대한 믿음입니다. 요셉이 가능했다면 이 시대 우리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한 번의 선택이 아닙니다. 지속적인 선택과 결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요셉이 유혹을 거절한 세 가지 이유
요셉이 외로운 상황에서도 단호하게 유혹을 거절한 세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요셉은 거절하면서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께서는 집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 제게 전혀 간섭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이 집에서 저보다 큰사람이 없습니다. 내 주인께서 제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라고는 마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마님은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렇게 악한 짓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8~9절).
첫째, 주인 보디발에 대한 신의와 충성심 때문입니다. 보디발 아내의 요구는 자신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예의도,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관계에서 신의를 지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삶에 대한 성실함과 책임감을 지키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큰 악이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요셉이 “제가 어떻게 악한 짓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코람데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단지 홀로 있는 것과 외로움은 다릅니다. 홀로 있어도 그 고독이 창조적인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창의적인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홀로 있는 것이 외로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이 부정적 외로움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때 하나님을 미워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게 합니다. 대부분 죄는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성적 타락이 고통스러울 때보다 안락할 때, 배고플 때보다 배부를 때 생기는 이유가 바로 그때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셋째, 요셉을 붙잡고 있던 하나님의 꿈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받은 꿈이 무엇입니까? 가족에게조차 절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 들어 쓰시는 통로가 된다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면 자신의 삶을 낮추고, 더러움에 자신을 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높은 꿈을 가진 사람은 낮은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거룩한 꿈에 사로잡힌 사람은 타락한 문화에 자신을 물들게 하지 않습니다. 그가 높임을 받게 되어 있다면 결코 자신을 낮아지게 하는 수준으로 내어 주지 않습니다. 유혹에 꺾이지 않는 꿈, 하나님의 꿈이 그의 삶을 붙잡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타락에 자신을 내어 준다면 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요셉은 거절하면서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말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께서는 집 안에 있는 것들에 대해 제게 전혀 간섭하지 않으시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제게 맡기셨습니다. 이 집에서 저보다 큰사람이 없습니다. 내 주인께서 제게 허락하지 않으신 것이라고는 마님밖에 없는데 그것은 마님은 주인의 아내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제가 어떻게 그렇게 악한 짓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8~9절).
첫째, 주인 보디발에 대한 신의와 충성심 때문입니다. 보디발 아내의 요구는 자신을 믿고 맡긴 주인에 대한 예의도,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거룩한 삶은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관계에서 신의를 지키는 것을 포함합니다. 하나님이 맡기신 삶에 대한 성실함과 책임감을 지키는 것이 바로 거룩한 삶입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 큰 악이라는 의식 때문입니다. 요셉이 “제가 어떻게 악한 짓을 저질러 하나님께 죄를 짓겠습니까?”라고 말합니다. 그는 누구보다 하나님만을 의식하는 ‘코람데오’의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외로움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 단지 홀로 있는 것과 외로움은 다릅니다. 홀로 있어도 그 고독이 창조적인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하면 창의적인 시간이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홀로 있는 것이 외로움이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이 부정적 외로움에 빠지지 않았던 것은 하나님의 임재 아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유혹할 때 하나님을 미워하라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살게 합니다. 대부분 죄는 하나님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을 때 일어납니다. 성적 타락이 고통스러울 때보다 안락할 때, 배고플 때보다 배부를 때 생기는 이유가 바로 그때 하나님을 쉽게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셋째, 요셉을 붙잡고 있던 하나님의 꿈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받은 꿈이 무엇입니까? 가족에게조차 절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높이 들어 쓰시는 통로가 된다는 꿈이었습니다. 그 꿈이 언젠가 이루어질 것이라면 자신의 삶을 낮추고, 더러움에 자신을 던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높은 꿈을 가진 사람은 낮은 차원에 머물지 않습니다. 거룩한 꿈에 사로잡힌 사람은 타락한 문화에 자신을 물들게 하지 않습니다. 그가 높임을 받게 되어 있다면 결코 자신을 낮아지게 하는 수준으로 내어 주지 않습니다. 유혹에 꺾이지 않는 꿈, 하나님의 꿈이 그의 삶을 붙잡은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세상의 타락에 자신을 내어 준다면 꿈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 우리의 거룩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여러분이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음행을 멀리하고 각기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 아내를 취할 줄 알고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 사람들처럼 욕정에 빠지지 말고”(살전 4:3~5).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거룩을 요구하실까요? 거룩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잃어버리고 성적 타락에 빠질 때 그 파괴력이 매우 큽니다. 관계를 파괴하고, 본인만이 아니라 주변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다른 죄를 양산하며, 사회를 파괴합니다. 부정한 관계로 인하여 생긴 아이들이 수없이 낙태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예입니다. 가장 회복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죄가 성적인 죄입니다. <잠언>에서는 ‘불’에 비유했습니다.
“불을 품었는데 그 옷이 타지 않겠느냐? 뜨거운 숯불 위를 걷는데 발이 데지 않겠느냐?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건드리는 사람은 죄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잠 6:27~29).
불을 품으면 그 화상이 치명적이듯이,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는 것은 불속에 뛰어드는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을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길 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일 1:9).
자백하고, 용서받고, 깨끗함을 받고, 계속 그 길로 걸어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돕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셉은 거룩과 순결을 지켰지만, 그로 인해 더 큰 고난을 겪게 됩니다. 거룩과 순결을 지킨 대가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감옥에 갇힌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만일 요셉이 유혹에 무너졌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요? 데이비드 시멘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요셉이 그 유혹에 굴복했다면 그는 더 나쁘고 고통스러운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순결을 더럽힌 행위의 대가는 자유를 상실하고 더 나쁜 얽매임, 곧 욕망의 사슬과 남의 눈을 피해 다니는 은밀함의 굴레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꿈을 계속해서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잃었을 것이다.”
요셉이 거룩과 순결의 대가로 육신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자유를 누리게 되고, 더 큰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유혹에 굴복했다면 그는 영적인 감옥에 갇혀서 자유를 잃어버린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에 사로잡힌 성도들은 유혹에 꿈을 내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시대, 어떠한 유혹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룩과 순결을 지키며,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마음에 손을 얹고 함께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남자들은 “하나님, 제가 요셉처럼 순결하게 하옵소서”, 여자들은 “내가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결단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거룩과 순결을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뜻은 분명합니다. 우리의 거룩입니다. 하나님은 왜 우리의 거룩을 요구하실까요? 거룩이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거룩을 잃어버리고 성적 타락에 빠질 때 그 파괴력이 매우 큽니다. 관계를 파괴하고, 본인만이 아니라 주변에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고, 또 다른 죄를 양산하며, 사회를 파괴합니다. 부정한 관계로 인하여 생긴 아이들이 수없이 낙태되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예입니다. 가장 회복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죄가 성적인 죄입니다. <잠언>에서는 ‘불’에 비유했습니다.
“불을 품었는데 그 옷이 타지 않겠느냐? 뜨거운 숯불 위를 걷는데 발이 데지 않겠느냐? 남의 아내와 간음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녀를 건드리는 사람은 죄 없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잠 6:27~29).
불을 품으면 그 화상이 치명적이듯이, 하나님이 정하신 한계를 넘는 것은 불속에 뛰어드는 거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타락을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는 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는 길 밖에 없습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신실하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실 것입니다”(요일 1:9).
자백하고, 용서받고, 깨끗함을 받고, 계속 그 길로 걸어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성령님이 우리를 돕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요셉은 거룩과 순결을 지켰지만, 그로 인해 더 큰 고난을 겪게 됩니다. 거룩과 순결을 지킨 대가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감옥에 갇힌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은 고난이 없는 삶이 아닙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입니다. 만일 요셉이 유혹에 무너졌다면 어떤 결과가 빚어졌을까요? 데이비드 시멘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요셉이 그 유혹에 굴복했다면 그는 더 나쁘고 고통스러운 감옥에 갇히게 되었을 것이다. 그의 순결을 더럽힌 행위의 대가는 자유를 상실하고 더 나쁜 얽매임, 곧 욕망의 사슬과 남의 눈을 피해 다니는 은밀함의 굴레에 얽매이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대한 꿈을 계속해서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잃었을 것이다.”
요셉이 거룩과 순결의 대가로 육신의 감옥에 갇히게 되었지만, 영적으로는 자유를 누리게 되고, 더 큰 하나님과 함께 하시는 체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이 유혹에 굴복했다면 그는 영적인 감옥에 갇혀서 자유를 잃어버린 고통스러운 삶을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꿈에 사로잡힌 성도들은 유혹에 꿈을 내어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떠한 시대, 어떠한 유혹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거룩과 순결을 지키며, 어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모든 성도들이 이러한 삶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 시간 마음에 손을 얹고 함께 결단하기를 원합니다. 남자들은 “하나님, 제가 요셉처럼 순결하게 하옵소서”, 여자들은 “내가 보디발의 아내와 같은 사람이 되지 않게 하옵소서”라고 결단하십시오.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거룩과 순결을 결단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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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짐의 축복 (창 32:22~32) / 이재훈목사 (1) | 2023.12.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