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멍에는 꺾고 사슬은 끊으시는 하나님 (나훔 1:9-15)

새벽지기1 2023. 3. 2. 06:33

(2023/02/19, 산상변모주일)

[그들이 아무리 주님을 거역하여 음모를 꾸며도 주님께서는 그들을 단번에 없애 버리실 것이니, 두 번까지 수고하지도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가시덤불처럼 엉클어지고, 술고래처럼 곯아떨어져서, 마른 검불처럼 다 타 버릴 것이다. 주님을 거역하며 음모를 꾸미는 자, 흉악한 일을 부추기는 자가, 바로 너 니느웨에게서 나오지 않았느냐? "나 주가 말한다. 그들의 힘이 막강하고 수가 많을지라도, 잘려서 없어지고 말 것이다. 비록 내가 너를 괴롭혔으나, 다시는 너를 더 괴롭히지 않겠다. 나 이제 너에게서 그들의 멍에를 꺾어 버리고, 너를 묶은 사슬을 끊겠다." 주님께서 너를 두고 명하신 것이 있다. "너에게서는 이제, 네 이름을 이을 자손이 나지 않을 것이다. 네 산당에서 새겨 만든 신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부수어 버리며, 네가 쓸모 없게 되었으니, 내가 이제 네 무덤을 파 놓겠다." 보아라,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 평화를 알리는 사람이 산을 넘어서 달려온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아라. 악한 자들이 완전히 사라졌으니, 다시는 너를 치러 오지 못한다.]

• 흔들리지 않는 토대


산상변화/변모 주일인 오늘 우리 마음 깊은 곳에 주님의 은총의 빛이 스며들기를 빕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전에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그곳에서 해와 같이 빛나는 주님의 얼굴을 보았습니다. 그 신비한 빛은 하나님의 현존을 암시하는 동시에 주님의 정체를 드러내는 단서였습니다. 주님의 빛나는 얼굴은 모세를 떠올리게 만듭니다. 성경은 시내산에서 한동안 하나님과 대면한 후 증거판을 손에 들고 내려오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출 34:29)고 말합니다. 성경은 그 빛이 ‘주님과 함께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변모는 제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그 놀라운 순간은 마치 섬광처럼 다가와 그들의 가슴에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새겨놓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 이후에 주님과 제자들이 직면해야 했던 현실은 암담했습니다. 기득권의 토대를 뒤흔드는 예수에 대한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의 증오심, 정치적 메시야를 기대하던 군중들의 기대, 그 기대가 무너졌을 때 사람들이 예수에게 보인 적개심…. 세 사람의 제자들은 마치 예기치 않은 폭풍을 만나듯 혼돈 상황에 직면하여 비틀거리다가도 눈부시게 변모되셨던 주님에 대한 기억 때문에 절망에 빠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기억은 저 멀리서 깜박이는 등대의 불빛처럼 그들을 지켜주는 힘이었습니다.

이 사건을 기억할 때마다 저는 요한계시록의 비전을 떠올립니다. 이 땅에 닥쳐올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기 전에 계시록은 하늘의 장엄한 광경을 보여줍니다.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흰옷을 입은 스물네 명의 장로들, 앞 뒤에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 그리고 그들 가운데 앉은 어린 양의 비전이 그것입니다. 스물 네 장로의 찬양에 화답하듯 이어진 수많은 천사들의 찬양, 그 찬양을 이어받아 세상의 모든 피조물과 만물들의 찬양이 물결치듯 번져가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오릅니다(계 4,5장). 이 비전은 환난의 시간을 맞이할 모든 성도들에게 흔들리지 않는 토대가 되어주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산상변모 사건을 저는 그렇게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일쑤 주님의 고난이 인류의 구속을 위해 예정된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이 당하신 고난은 불가피한 것도, 당연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은 비장한 결단이었습니다. 수난 그 자체를 미화하거나 신비화하면 안 됩니다. 주님의 고난은 불의한 세상의 권력이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악마적일 수 있는지를 폭로합니다. 주님은 세상의 모든 모순과 어둠, 슬픔과 아픔을 다 짊어진 채 고난의 언덕을 오르셨습니다. 주님이 겪으신 고난은 힘과 폭력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영혼의 숭고함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주님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가없는 사랑으로 죽음을 극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드러납니다.

• 엄위하신 하나님


선지자 나훔이 전하는 메시지도 같은 지점을 가리킵니다. 나훔은 주전 7세기의 예언자입니다. 그는 요나 이야기를 통해 우리에게 친숙한 앗시리아 제국의 수도인 니느웨의 몰락과 유다의 구원을 예고합니다. 앗시리아는 아주 긴 역사를 자랑하는 나라였습니다. 그 가운데 주전 911-612년까지의 시기를 사람들은 신아시리아라고 분류합니다. 그 시기의 앗시리아는 강을 통한 원거리 무역으로 국가의 부가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잘 훈련된 군대와 완비된 역마 제도로 주변 세계를 압도했습니다. 지금도 그 시기에 만들어진 부조물이 남아 있는데 앗시리아의 통치가 매우 잔인했음을 보여줍니다. 포로들의 코에 구멍을 뚫고 쇠사슬로 묶어 끌고 가는 일이 다반사였고, 사람들을 강제 이주시킴으로 반란의 싹을 자르려 했습니다. 이주에 방해가 되는 아기들을 돌에 메어쳐 죽이기까지 했습니다.

나훔서에서 니느웨와 연관되어 등장하는 단어만 보더라도 앗시리아의 통치가 얼마나 폭력적이었던지를 알 수 있습니다. 멍에, 사슬, 거짓말, 강도, 노략질, 음행, 마술 등이 그것입니다. 앗시리아 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사자’라고 자부했습니다(나 2:11, 12). 그들은 군사력으로 바벨탑을 쌓으려던 이들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모두가 그 힘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할 때 하나님은 나훔을 통해 니느웨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십니다. 최고 전성기에 전해진 파멸의 메시지는 통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예언의 첫 대목은 매우 강력합니다. “주님은 질투하시며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이시다. 주님은 원수를 갚으시고 진노하시되, 당신을 거스르는 자에게 원수를 갚으시며, 당신을 대적하는 자에게 진노하신다”(나 1:2). 인자하고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에게만 익숙한 이들에게 ‘질투하시는 하나님’, ‘원수를 갚으시는 하나님’의 이미지는 낯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분노를 모르면 하나님을 제대로 안다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창조 질서를 파괴하는 세력들을 미워하십니다. 당신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을 함부로 대하고 파괴하는 힘들을 그냥 두시지 않는 분이십니다. 나훔은 “주님은 절대로, 죄를 벌하지 않은 채 내버려 두지는 않으신다”(나 1:3)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에 대한 침해이기 때문입니다.

나훔은 창조주 하나님의 위엄을 노래합니다. 하나님은 회오리바람과 폭풍을 길로 삼으시고, 바다와 강을 꾸짖어 말리시고, 바산과 갈멜의 숲을 시들게 하시고, 레바논의 꽃을 이울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 앞에서 산들은 진동하고, 언덕들은 녹아 내린다. 그의 앞에서 땅은 뒤집히고,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곤두박질한다”(나 1:5). 장대한 비전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미소한 존재입니까? 여기서 말하는 ‘산들’과 ‘언덕들’은 세상에서 제 힘만 믿고 설치는 이들을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요? 그들이 자랑하는 힘은 일시에 스러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시기에 환난을 당하는 이들의 피난처가 되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거대한 역사의 수레바퀴 밑에 깔려 으깨지는 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으십니다. 세상에서 들려오는 신음소리를 ‘당신의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로 들으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 한계를 모르는 권력의 오만을 징계하심


하나님은 오만에 빠진 권력을 심판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한 번 손을 드시면 인간들이 꾸민 음모는 다 분쇄되고 맙니다. 허망한 말처럼 들릴지 모르겠지만 역사상에 등장한 모든 제국들의 운명을 보면 이 말이 실감날 것입니다. 알베르 카뮈는 무너진 제국의 폐허를 거닐다가 문득 “그들 문명의 폐허가 그들 이상[理想]의 부정 바로 그것”(알베르 카뮈, <결혼·여름>, 김화영 옮김, 책세상, p.32)이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여 일어난 세력은 “가시덤불처럼 엉클어지고, 술고래처럼 곯아떨어져서, 마른 검불처럼 다 타 버릴 것”(1:10)입니다. 문학적 표현이지만 이 속에 역사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 담겨 있습니다. 이해관계가 엇갈리면서 자중지란에 빠질 것이고, 권력에 도취되어 술에 취한 듯 현실 인식이 흐려질 것이고, 마침내 순식간에 소멸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나훔은 앗시리아의 왕을 가리켜 ‘주님을 거역하며 음모를 꾸미는 자’, ‘흉악한 일을 부추기는 자’라고 말합니다. 열왕기서를 보면 이 말의 배경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침공한 산헤립은 랍사게를 보내 끝까지 저항하려는 히스기야를 말로 위협합니다.

“네가 무엇을 믿고 이렇게 자신만만하냐? 전쟁을 할 전술도 없고, 군사력도 없으면서 입으로만 전쟁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네가 지금 누구를 믿고 나에게 반역하느냐?”(왕하 18: 19b-20)
“뭇 민족의 신들 가운데서 어느 신이 앗시리아 왕의 손에서 자기 땅을 구원한 일이 있느냐?”(왕하 18:33)

참람하기 이를 데 없는 말입니다. 하지만 자기 한계를 모르는 오만한 권력은 반드시 무너진다는 것이 성경의 증언입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했던 말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처럼 되리라’(창 3:5).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 속에 깃들어 있습니다. 스스로 신이 된 사람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자기 욕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적으로 존중되어야 할 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것은 그를 지으신 하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마침내 오만한 앗시리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 선고 됩니다.

“나 주가 말한다. 그들의 힘이 막강하고 수가 많을지라도, 잘려서 없어지고 말 것이다.”(나 1:12a)

제 힘만 믿고 설치는 이들이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강자들에 대한 심판은 약자들의 회복에 대한 약속과 맞물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앗시리아의 멍에를 꺾으시고, 하나님의 백성을 묶은 사슬을 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은 해방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삶도 그러합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님은 나사렛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의 두루마리를 건네 받아서 한 대목을 읽으셨습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게 하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셔서, 포로 된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사람들에게 눈 뜸을 선포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풀어 주고, 주님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눅 4:18-19)

주님의 사명 선언이라 할 이 말씀은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는 일체의 억압으로부터 사람들을 해방하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선포만으로 이룩될 수 있는 비전이 아닙니다. 사랑과 수고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이러한 비전을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 새로운 질서의 시작


하나님은 앗시리아의 패망이 철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의 이름을 이을 자식도 태어나지 않을 것이고, 그들이 애지중지하던 신상과 우상들은 다 파괴되고, 무덤만이 즐비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앗시리아가 세력의 정점에 있을 때 하나님은 예언자로 하여금 그들의 철저한 무너짐을 보게 하십니다. 이것은 한 나라의 운명에 관한 이야기이지만, 우리들 개인의 경우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과학자들이 지구에서 적용되는 법칙이 우주에서도 적용된다는 사실을 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밝혀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하나님은 오만에 빠진 이들을 치시는 분이십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지나침이란 일종의 화재’라고 말했습니다. 불은 오만한 자 스스로를 태우기도 하는 법입니다. 인간의 우매함은 많은 고통을 겪은 후에야 자기가 얼마나 미소한 존재인지를 깨닫는다는 데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악인들이 사라진 세상을 미리 보는 사람들입니다. 평화를 알리는 사람이 산을 넘어서 달려오고 있음을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절망의 땅에서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사람입니다. 시편 시인은 “축제의 함성을 외칠 줄 아는 백성은 복이 있습니다. 주님, 그들은 주님의 빛나는 얼굴에서 나오는 은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시 89:15)라고 노래합니다. 삶이 아무리 힘겨워도 그 무게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는 힘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로부터 나옵니다. 하나님 나라의 비전이 역사의 무게를 견디게 합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서 보았던 그 놀라운 광경은 고난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야 했던 그들을 밑에서부터 떠받쳐주는 든든한 토대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려운 시절을 사는 동안 우리 내면에 켜켜이 쌓인 어둠이 있습니다. 빛이신 주님을 우리 속에 맞아들여야 합니다. 시편 시인의 고백을 우리의 고백으로 삼았으면 좋겠습니다.

“생명의 샘이 주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빛을 받아 환히 열린 미래를 봅니다”(시3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