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기석목사

오도된 확신 (요 16:1-4)

새벽지기1 2023. 3. 14. 06:50


(2023/03/12, 사순절 제3주)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를 넘어지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회당에서 내쫓을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마다, 자기네가 하는 그러한 일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그들은 아버지도 나도 알지 못하므로, 그런 일들을 할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하여 두는 것은, 그들이 그러한 일들을 행하는 때가 올 때에, 너희로 하여금 내가 너희에게 말한 사실을 다시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또 내가 이 말을 처음에 하지 않은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기 때문이다.]

∎ 암담한 현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사순절이 깊어가고 있지만 이 땅에 드리운 어둠은 좀처럼 물러갈 생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지난 주중에 사람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사건은 3월 1일 세종시의 어느 아파트에 내걸린 일장기였습니다. 그 주인공은 항의하는 주민들에게 자기는 일본 사람이라며 한국이 너무 싫다고 말했고 유관순이 실존인물이냐고 물었습니다. 며칠 후 그가 어느 교파의 목사라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는 부끄러운 기색도 없이 그 사건으로 자기가 대스타가 되었다고 떠벌렸습니다.

또 정부는 강제징용 문제가 원만한 한일관계의 장애가 된다는 구실 하에 전범기업의 배상 책임에 면죄부를 주었습니다. 일본은 강제징용에 대해 인정하지도 않았고 사죄하지도 않았습니다. 일본 외무상은 며칠 후 ‘강제 동원은 없었다’고 발뺌했습니다. 피해자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은 셈입니다. 진정한 용서와 화해는 진상이 규명되고 가해자의 진실한 참회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아무리 요구해도 일본이 사죄할 것 같지 않으니 사건을 덮고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는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이래저래 참담한 마음인데 요즘 넷플릭스에서 방영된 기독교 이단들의 행태를 파헤친 고발 프로그램 <나는 신이다>가 사람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교주 노릇을 하는 정명석이라는 이의 엽기적인 행각, 많은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오대양 사건들이 적나라하게 파헤쳐졌다고 합니다. 신학교 시절 은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종교는 사기꾼들이 숨기 매우 좋은 장소’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단 종파들은 힘겹고 암담하고 불안한 삶에 지친 이들에게 아주 친절한 이미지로 다가섭니다. 그들의 시린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한번 그런 환대를 경험한 이들은 그들을 멀리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그런 접촉점이 마련되면 그들은 기존 종교나 질서에 대한 비평을 쏟아냅니다. 이단 종파에 빠진 이들은 세상 사람들이 모르는 비의를 홀로 아는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힙니다. 교주들은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기도 하고, 스스로 메시야를 참칭하기도 합니다. 그 속에 사로잡힌 이들은 성찰적 거리를 확보할 수가 없기 때문에 반사회적 태도를 보이기 시작합니다. 교주는 신적 존재로 숭앙되고 그는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제 마음대로 착취합니다. 악마적인 행위입니다.

∎ 확신이라는 함정


미국의 신학자인 하비 콕스는 <뱀이 하는 대로 내버려두지 말라>는 책에서 자기 스스로 내려야 할 결정을 타자들에게 맡겨버리는 태만의 죄를 지적하고 있습니다. ‘생각하지 않음’이야말로 사탄이 우리 속에 들어오는 통로입니다. ‘난 복잡한 것은 딱 질색이야. 결론만 말해’라며 사람들을 윽박지르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은 삶을 아주 단순화시켜서 바라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문제를 흑과 백으로 가를 수는 없는 법입니다. 단순화는 삶의 복잡함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에 폭력적입니다. 다른 이들의 아픔이나 상실감을 고려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결단이고 모험이지만, 회의를 허용하지 않는 믿음은 위험합니다. 지나칠 정도로 확신에 찬 이들은 자기들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싫어합니다. 그들은 다른 이들과 만나 새로운 것을 배우려 하지 않습니다.

확신에 찬 사람들은 ‘다름’을 용납하지 못합니다. 다른 이들을 배제하거나 폭력적으로 동화시키려 합니다. 영국의 소설가 조지 오웰이 1948년에 완성한 소설 <1984>는 전체주의적 사회의 참상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빅 브라더가 감시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자유를 누리지 못합니다. 그 사회는 사람들의 행동은 물론이고 사고까지 지배하려 합니다. 빅 브라더가 정해놓은 기준을 따르지 않는 이들은 다 비정상으로 여겨져 처벌을 받습니다.

“얼굴에 나타나는 경련, 무의식적으로 짓는 불안한 표정, 혼자 중얼거리는 습관 등 조금이라도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것은 없어야 한다. 무언가를 감추려는 행위로 간주되어 위험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든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 그것만으로도 처벌 대상이 된다. 심지어 이에 대한 신어까지 있는데, ‘표정죄(facecrime)’가 바로 그것이다.”(조지 오웰, <1984>, 정희성 옮김, 민음사, p.88)

이단 종파들이 하는 일이 이와 매우 유사합니다. 다른 생각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의 답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람들이 여기에 넘어가는 것은 그들이 모호한 삶에 대한 분명한 답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도된 확신’처럼 위험한 게 또 있을까요? 에스겔은 제사장들에게 요구되는 매우 중요한 능력이 분별력이라고 말합니다. “제사장들은 내 백성이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구별하도록 백성을 가르치고,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도록 백성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겔 44:23). 오늘 스스로 종교 지도자를 자처하는 이들은 오히려 사람들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오도하는 이들을 보고 주님은 분노하셨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개종자 한 사람을 만들려고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하나가 생기면, 그를 너희보다 배나 더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다.”(마 23:15)

하나님은 우리를 자유인으로 부르셨습니다. 그러나 그릇된 종교인들은 우리를 추종자로 만들려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욕망을 이루기 위해 사람들을 수단으로 이용합니다. 예수님은 이런 그릇된 열정에 사로잡힌 이들의 처지를 설명하기 위해 하나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어떤 사람에게서 나와서 쉴 곳을 찾다가 찾지 못하고 떠나온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가서 보니 그 집이 깨끗하게 치워진 것을 보고는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살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 끝에 덧붙여진 이야기가 기가 막힙니다. “그 사람의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비참하게 된다”(눅 11:26). 참으로 두려운 이야기입니다.

∎ 제자의 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더 나아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은 세상의 입장에서 보면 불편한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그 당시 지중해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 제국과 대비되는 나라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힘 있는 사람이 힘없는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정상인 사회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높은 사람이 가장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세상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도 갈릴리 호숫가에서 잉태된 그 영롱한 꿈에 동참하는 사람들입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 목소리를 갖지 못한 이들의 목소리가 되어줍니다. 평화를 지향하지만 불의에는 저항합니다. 세상에서 그림자 취급을 받는 사람들의 설 자리를 마련해주기 위해 노력합니다. 누릴 것을 다 누리며 홀로 만족하는 이들은 아랫것으로 여기던 이들이 ‘나도 인간’이라고 고개를 들면 질색을 합니다. 참의 길이 십자가로 이어진 것은 그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떠난 후 세상에 홀로 남겨질 제자들에게 마음을 단단히 먹으라며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세상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여 있다면, 세상이 너희를 자기 것으로 여겨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세상에 속하지 않았고 오히려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가려 뽑아냈으므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요 15:18-19)

주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까닭은 세상에서 시련을 겪을 제자들이 낙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제자들이 머지않아 회당에서 쫓겨날 것이고, 심지어는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주님은 하나님 나라를 거절하는 이들이 제자들을 박해하면서 오히려 그것이 곧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오도된 신념처럼 위험한 게 없습니다. 작고하신 이어령 선생은 폭탄 테러리스트들이나 히틀러도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말하면서 인간사는 ‘예스’와 ‘노우’만으로 판단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메이비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김지수,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열림원, p.172)

메이비, ‘어쩌면’, ‘아마도’라는 말은 판단을 유보하는 말입니다. 다른 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백입니다. 여지 혹은 여백이 없는 말이 우리 사회를 어지럽힙니다.

∎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겠네


존 웨슬리는 ‘광신의 본성’이라는 설교에서 광신자들의 첫 번째 특성이 교만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자기 분수를 알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교만한 이들이 있는 곳에서는 사랑과 평화의 샘물이 솟구쳐 나올 수 없습니다. 교만은 일종의 독입니다.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칩니다. 교만과 함께 생기는 것이 고집입니다.

“교만이 커질수록 그를 권면할 수 없는 상태와 고집도 역시 커집니다. 그는 납득이 되도록 이야기가 통할 가능성과 설득당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판단과 자기 자신의 의지에만 더욱더 집착을 하기 때문에 드디어 그는 완전히 고착되어 요지부동이 됩니다.”(<웨슬리 설교전집 3>, 한국웨슬리학회 편, 대한기독교서회, p.30-31)

설득당할 가능성이 줄어든다는 것이야말로 오도된 확신에 사로잡힌 이들의 특색입니다. 이들은 불친절합니다. 자기와 다른 이들을 경멸합니다. 그들은 사람을 가르는 장벽을 세웁니다. 사람들이 서로 통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평화가 아니라 불화를 조장합니다. 그들은 하나님도 모르고 예수님도 알지 못합니다.

주님은 우리를 평화의 여정 가운데로 부르십니다.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세상이 점점 어두워가는 것 같아 맥이 빠질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평화를 향해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결국은 길을 이룰 것입니다. 마음에 깃드는 어둠을 내몰기 위해 자꾸만 주님을 찬미해야 합니다. 그래야 지배하고 장악하려는 의지에 사로잡히지 않게 됩니다. 믿음의 여정 가운데 있는 이들의 연대 또한 꼭 필요합니다.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젊은 시절에 목이 터져라 불렀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혼자 힘으로는 할 수 없겠네/둘의 힘으로도 할 수 없겠네/둘과 둘이 모여 커단 힘이 될 때/저 굳센 장벽을 깨뜨릴 수 있네”. 조급해 하지 말고, 느긋하게, 그러나 즐겁게 진리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빕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