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동식목사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 - 자발적 불편

새벽지기1 2020. 11. 24. 04:33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 - 자발적 불편

 

한국 교회가 처하여 있는 상황은 밝지가 않습니다. 우중충한 날씨와 같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가오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기윤실이 발표한 한국 교회의 신뢰도(2017)20.2%였습니다. 5명중 1명 정도가 한국교회를 신뢰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교회가 신뢰도를 높이기 위한 우선적인 일은 재정의 투명성이고(26.1%), 목회자들에게는 윤리 도덕성의 문제가 회복(49.4%)되어야 한다는 요구였습니다.

 

한국 교회는 이러한 요구 앞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일부 교회들의 일탈로 인하여 대다수의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지역에서 교회를 유지하기 힘들다는 소리들이 들려옵니다. 이 소리는 오래지 않아 큰 아우성이 될 것입니다. 그때를 생각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픕니다. 이렇게 외면 할 수밖에 없는 시대적인 환경 속에서 교회가 가지고 있어야 할 모습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마지막 서신인 디모데후서에서 말세에 고통 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모습들은 적나라하게 표현하였습니다. 그 시작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을 향하여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을 부인하는 자라고 말씀합니다. 경건에 대한 야고보사도의 글을 보면 이 부분이 더욱 의미 있게 다가옵니다.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두려움이 없는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것이라 하였습니다.[1:27]

 

이렇게 보면 경건의 능력은 이 세상의 가치를 따르지 않는 일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것을 사회적 약자들을 위하여 나눌 수 있는 이타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말세의 고통하는 때에 굴복당하지 않고 승리하는 삶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이러한 현실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세속에 굴복할 것인지, 아니면 세속을 이길 것인지 중요한 갈래 길에 서 있습니다. 한국 교회는 너무나 빨리 말세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모습이 편리를 추구하는 신앙입니다. 이것은 긍정의 힘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성도들은 교회의 주차장이 없으면 찾자오지 않습니다. 아파트에 사는 사람들은 빌라에 있는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이들의 교육을 할 수 있는 시설과 콘텐츠가 있는 교회를 찾아갑니다. 이러한 외적인 편리는 내적인 편리를 추구합니다. 그래서 회개와 같은 불편한 설교는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결국 교회 강단은 듣기 좋은 말만 하는 시장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에 목회자들의 모습도 예외가 아닙니다. 성도들의 상담 가운데 가장 많이 듣는 이야기가 목회자들의 물질적 욕심입니다. 천국에 대한 소망을 그렇게 강조하면서 부를 쌓는 일에 열심인 목사들을 볼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비일비재하게 터지는 목회자들의 은퇴시의 볼쌍 사나운 일들은 다 돈에 관계되어 있습니다. 이 모두가 불편을 참지 못하는 세상의 가치에 함몰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아름다움은 자발적 불편입니다. 세상이 추구하는 편리에 저항하는 일입니다. 자발적 불편은 성경이 말하는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실제 예수님의 삶은 자발적 불편의 표상입니다. 사람의 몸으로 오심이 자발적 불편입니다. 예수님은 여우는 머리 둘 곳 있지만 자신이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철저하게 타자를 위한 삶을 사셨습니다. 그 모습은 사도들과 교회사의 영웅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한경직목사, 장기려 박사와 같은 분입니다.

 

자발적 불편은 편리를 이웃을 위하여 잠시만 미루는 것입니다. 또한 여기에는 일용한 양식으로 감사하는 삶이 함께 합니다. 그렇다고 궁상맞게 살자는 것이 아닙니다. 타자를 위하여 자신의 편리함을 잠시 내려놓는 일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함께 행복을 누리는 일입니다. 일례로 출근길의 바쁜 상황에서 에스컬레이터를 양보하고 계단을 오른다면 누군가 불편한 사람이 혜택을 입을 것입니다. 귀찮지만 텀블러를 가지고 다닌다면 환경보호에 작은 기여를 할 것입니다. 돈을 버는 것이 탐욕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것이 될 때 세상을 이기는 경건의 능력이 됩니다. 작은 것에서 시작한 자발적 불편은 교회를 살리는 일이 됩니다. 그리고 신뢰받는 교회가 됩니다. 정직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일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발적 불편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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