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상상할 수 없는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들이 있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절망시킬 수 없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오는 것처럼 절망이 깊을수록 우리 마음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들이 살아납니다.
성령이 임하면 기름부으심이 있습니다. 기름부으심이 있으면 먼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성탄절을 맞아 네 가지 시리즈 설교를 하고 있는데, 첫 번째 주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였습니다. 두 번째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이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나눌 주제는 구약에서 기다리던 ‘예수는 메시아이시다’는 것입니다.
약속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약속된 메시아로 오셨습니다. 사람들은 그저 몇 개의 성경구절을 인용하고 있을 뿐이지, 얼마나 성경에 메시아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돼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모세오경부터 말라기까지 일관적으로 흐르고 있는 구약의 사상은 메시아입니다. 실제로 앞으로 메시아가 와서 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며 그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부활하고 승천하고 다시 재림주로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일관된 메시지를 깊이 있게 이해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신약의 메시아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이 너무 짧습니다. 마구간에서 아기 예수가 태어나는 정도의 이야기 밖에는 지식이 없습니다.
메시아라는 단어는 히브리어로 ‘마시야’라고 하는데 70인역성서(Septuaginta)에는 ‘크리스토스(Christos)’라고 번역돼 있습니다. 히브리어로 ‘마시야’라고 하고, 헬라어로는 ‘크리스토스’라고 합니다. 마시야는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구약에서 마시야라는 단어의 뜻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입니다. 여기에는 중요한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구약의 마시야는 살아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것은 ‘구분된다’, ‘성별된다’는 의미입니다. 구약에서 제사를 드릴 때 성물은 세상의 물건과 다르게 구별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성전을 거룩한 곳으로 생각했습니다. ‘거룩’이라는 단어가 ‘구별되었다’라는 의미입니다. 구별되지 않은 사람은 거룩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살면서 세상 사람과 다른 삶을 사는 것은 메시아적 의미가 있습니다. 구약에서 기름부음은 아무에게나 붓지 않고 왕이나 제사장이나 선지자에게 부어서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해방자·구원자
두 번째, 구약의 마시야는 현재 살아있는 자가 아니라 앞으로 오실 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메시아는 이제 곧 오실 분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타락한 인간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하고 전쟁에서, 포로에서, 억압에서, 병에서, 저주에서 완전히 해방시킬 ‘해방자, 구원자’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고난을 겪을 때마다 마시야를 기다렸습니다. 구약에서 최초로 기름부으심을 받은 왕은 사울입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 사울은 실패한 왕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울 대신 이새의 아들 다윗을 다시 기름 붓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순간부터 여호와의 신이 감동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연결해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기름부음 받은 자는 ‘하나님의 일을 섬기는 종’이라는 뜻입니다. 크리스천은 섬기는 종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이 만나지 않는 창녀들, 외로운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늘 가까이 하셨던 것은 하나님의 종으로 이 땅에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다윗에게 “너는 내가 택한 자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아비가 되었고 그를 장자로 삼아 세계 열방의 으뜸이 되게 하셨습니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 하나님께서 인류를 다시 구원할 것이라는 메시아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창세기에 있습니다. 성경학자들은 이것을 원시 복음이라 했습니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네 자손과 여자의 자손 사이에 증오심을 두리니 여자의 자손이 네 머리를 상하게 하고 너는 그의 발뒤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다”(창 3:15). 여자의 자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머리를 치십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을 의미하며, 이는 곧 사탄의 죽음을 의미합니다. 구약을 자세히 보면 곳곳에 메시아 사상이 숨어있습니다. ‘예수가 동정녀에서 태어날 것이다. 그 이름이 임마누엘이다’라고 이미 예언하고 있습니다(사 7:14). 이사야서와 말라기서를 통해 ‘메시아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이다. 메시아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 요한이다. 낮은 골짜기는 높게 만들고 높은 산은 낮게 만든다’는 것도 이미 예언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스가랴 9장에 ‘메시아는 예루살렘으로 승리의 입성을 할 것’이라고 기록돼 있고, 시편에 ‘메시아는 사람들에게 거절을 당할 것’이라고 기록돼 있습니다. ‘메시아는 은 30에 팔릴 것이다’는 것은 스가랴 30장에 기록돼 있습니다. 특별히 ‘메시아가 세상에 와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고난을 받을 것이다’라는 예언이 시편 곳곳에 숨어있습니다. 그렇다면 시편이나 이샤야를 기록한 예언자들이 신약에서 이뤄질 것을 다 알고 기록했느냐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예언이 신약에서 이뤄질 것을 미리 알고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감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영광스런 하나님 나라에 대한 믿음
이사야 53장에 보면 메시아의 수난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기록돼있습니다. 지금도 그 부분을 읽으면 가슴이 떨리고 눈물이 나올 정도로 메시아의 고난을 우리 눈으로 직접 보는 것처럼 자세하게 기록했습니다. 시편 16편에는 ‘메시아는 부활할 것이다’라고 기록돼있습니다. 메시아에는 세 가지 징후가 있습니다. 그가 선지자며, 충실한 제사장이며, 왕일 것이라는 징후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왕에 대한 기대는 메시아에 대한 기대였습니다. 유대인들은 단번에 제사를 드려 온 인류를 그의 피로 구속할 분이 누군지 알 수 없지만 그런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아왔습니다. 메시아는 그들에게 희망이 되는 것입니다. 희망이 끊어지고 절망할 때, 죽을 병에 걸렸을 때, 포로가 되고 자녀가 흩어지는 기막힌 현실 속에서도 메시아가 오시면 우리를 구원해 줄 것이라는 유대인들의 희망과 기대를 구약 전체에서 볼 수 있습니다. 구약 전체에 보면 메시아의 기능에 관한 이야기만 쓴 것이 아니라 메시아의 의미와 역할에 대해 많이 기록돼있습니다.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창세기 1장부터 11장까지에 보면 ‘메시아가 씨가 될 것이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말해주는 메시아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노아에게는 무지개로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다시는 물로 심판하지 않겠다는 약속입니다. 그래서 메시아를 보면 약속이 있고 예언이 있고 희망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약속에 대한 성취, 예언에 대한 완성, 희망에 불타는 것입니다. 또한 크리스천이 가장 환영하는 것은 바로 죽음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죽음의 문을 열고 나가면 하나님의 나라, 천국이 기다리고 있다는 환희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믿음이 희망을 갖게 합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마음속에 상상할 수 없는 희망과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생각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어려워도 크리스천들은 얼굴을 찡그릴 수 없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계명 때문만이 아니라, 크리스천이 누리는 자유와 특권이기 때문입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도 우리를 슬프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우리를 절망시킬 수 없습니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이 오는 것처럼 절망이 깊을수록 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우리 마음에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생각들이 살아납니다.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한 땅으로 가라.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말씀은 아브라함에게만 주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먼 훗날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실 때 바로 이 복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판결자·증인·구속자·중보자
그래서 예수님이 세상에 와서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고 가장 먼저 하신 일이 아담과 이브를 타락하게 했던 마귀를 발로 밟고 시험에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의 사역이 시작됩니다. 욥기에 보면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가 네 가지 나옵니다. ‘판결자, 증인, 구속자, 중보자’라는 단어로 표현했습니다. 다윗시대에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 충실한 제사장, 다윗의 집에서 나올 자’로 표현돼 있습니다. 그래서 구약에 있는 사람들은 메시아를 사랑하고 기다리고 있지만 그가 누구인지 정확하게 알지 못했습니다. 주전 8세기에는 집중적으로 메시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열네 번 메시아의 다른 이름을 이야기합니다. 이사야서에는 ‘메시아는 동정녀에게서 태어날 것이다.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계시는 분이다. 그는 기묘자다. 통치자다. 우주적 승리자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7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다윗 왕실에 표적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처녀가 잉태해 아들을 낳고 그를 임마누엘이라고 부를 것입니다.”자유주의자들은 처녀가 잉태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면서 처녀를 아줌마로 의미를 바꿔놨습니다. 여러분, 예수가 물 위로 걸었다든지, 부활했다든지, 병을 고쳤다든지, 귀신을 내보낸 사실에 대해 의심하지 마십시오. 성경을 그대로 믿으십시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면 못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을 믿지 않기 때문에 ‘예수와 마리아가 연애했다’는 인간적인 발상을 하고, <예수가 인도로 갔다>라는 책을 그럴듯하게 발간하는 것입니다. ‘예수도 나처럼 죄를 졌을 것이다. 예수도 유혹을 받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교활한 사탄의 속임수가 있는 것입니다.
비전으로 가득찬 사람들
구약의 사람들은 메시아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몰랐지만 메시아의 속성과 기능, 그분이 우리에게 해주실 비전들을 알았습니다. 그들이 기도할 때, 왕을 통해서, 제사장을 통해서, 예언자를 통해서 메시지를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비전으로 가득 찼습니다(사 11: 1~10). 9세기에 예언자 예례미야는 ‘여호와는 우리의 의요, 제사장이며 왕이며 변함없는 약속’이라고 했습니다. 6세기에는 에스겔과 다니엘이 ‘의로운 왕, 선한 목자, 나라의 통일을 이루시는 분, 다시 오실 인자’라고 표현했습니다. 5세기에는 학개, 스가랴, 말라기를 통해 ‘만국의 보좌, 여호와의 인, 대제사장, 열방의 제사장’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왕 메시아에 대해서는 ‘모퉁이돌, 천막의 말뚝, 활 같은 사람, 다스리는 사람, 거절당한 선한 목자, 찔림 받은 자, 고난 받은 자, 연약한 사자, 의로운 태양’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구약 전체에 일관적으로 나타나는 메시아 사상에는 ‘메시아가 와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다. 우리를 치료할 것이다. 우리를 저주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우리를 포로와 압제에서 감옥에서 건져내실 분이다’라고 기록돼있습니다.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성령의 감동으로 읽을 때 메시아 사상이 점점 자신의 믿음으로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우리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회당에서 가르치셨는데 가르치실 때 이 부분을 한마디로 요약하셨습니다. 누가복음 4장 16절입니다. “예수께서 자신이 자라나신 나사렛에 오셨습니다. 안식일이 되자 예수께서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읽으려고 일어나셨습니다.”예수님이 성경을 읽었는데 이사야 61장 1절, 2절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제가 이스라엘을 방문했을 때 크리스천 유대인들의 성전에 가보았습니다. 랍비가 찬양을 부르고 나서 쉐마를 신명기 6장 4절부터 9절까지 읽고 기도문을 읽고 성경 낭독을 합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성경은 두루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1미터 정도 되는 양피지를 헌금할 때 두 사람이 들고 들어와서 양쪽으로 펴서 말씀을 읽고 해석을 합니다. 그리고 축도하고 끝나는데 저에게는 매우 신선한 경험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두루마리를 펴서 이사야 61장 1절, 2절의 말씀을 읽은 것입니다. 그 내용이 오늘 본문 18절 말씀입니다. 17절은 예수가 두루마리를 펴서 읽었다는 내용입니다.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던 메시아
18절, 19절을 보겠습니다. “주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포로 된 사람들에게 자유를, 못 보는 사람들에게 다시 볼 수 있음을, 억눌린 사람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기 위해 나를 보내셨다. 주의 은혜의 해를 선포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메시지를 정리하면 성령이 임하면 기름부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기름부음이 있으면 먼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크리스천들에게는 항상 가난한 자를 돌보는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부요한 사람은 잘 믿지 않습니다. 지식인들도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돈도 없고 마음도 가난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빨리 믿습니다. 어린아이처럼 복음을 잘 받아들입니다.
여러분, 평생 감옥에 있는 사람, 사형수들을 생각해 보셨습니까? 제가 전도했던 살인자가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나이트클럽에서 칼로 여러 사람을 죽여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는 계속해서 제게 편지를 씁니다. 못 보는 자에게 보게함은 치유입니다. 자유 선언입니다. 억눌린 사람에게 해방은 해방 선언입니다. 이것이 희년입니다. 이것이 메시아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한 사람도 조는 사람 없이 모든 사람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예수님을 주시했습니다(20절). 그리고 예수께서 “오늘 이 말씀이 너희가 듣는 자리에서 이루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21절). ‘구약에서 기다리던 메시아가 여기 서있다. 구약의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오셨다는 사실이 바로 성탄입니다. 할렐루야! 설교자는 확신을 가지고 설교하고, 듣는 사람은 ‘오늘 말씀이 내 귀에 들렸다. 말씀이 내 눈에 보였다. 말씀이 내 가슴에 사무쳤다’고 고백하는 것이 예수님의 해석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으로서 세상에 오셨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고, 죄 없는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당시 사람들도 ‘요셉의 아들인데 어떻게 저런 신적인 메시지를 전하고, 그가 하나님이라고 말하는가? 나와 하나님은 하나라고 말하는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하는가?’라고 생각합니다(2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메시아이십니다.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구약의 사람들이 그리워하고 기다리고 사모하던 분입니다. 피눈물을 쏟으며 고난을 겪으며 포로 생활을 하며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고 기다리던 메시아가 태어난 것입니다. 오늘 성탄이 여러분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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