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대한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우주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영광스런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비록 죄인의 모습일지라도 다시 의로워져서 이 미션과 우리의 존재 가치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대로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참 의미입니다. 예수가 하나님의 본체 성탄절을 앞두고 네 주에 걸쳐 성탄절 메시지를 전할 것입니다. 지난주에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다’를 주제로 설교했습니다. 오늘 설교의 주제는 ‘예수님은 하나님이셨지만 인간이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50%는 하나님, 50%는 인간이 아니라 100% 하나님, 100% 인간이셨습니다. 이 사실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모든 이단은 ‘삼위일체’를 부인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쉽게 믿지만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어떻게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 있느냐’는 의문을 품기 때문에 쉽게 믿지 못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처음에는 잘 믿다가 나중에 갈등에 빠지기도 합니다. 특별히 사람들은 ‘고통의 문제’에 대해 의문을 갖습니다. ‘왜 하나님은 인간에게 고통을 허락하신 것인가? 왜 지상에는 설명할 수 없는 전쟁이라든지 어린아이의 죽음이라든지 질병 등의 고통이 있는가? 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이런 문제들을 우리들에게 던져 놓았을까’라는 질문들은 끊임없이 예수님에 대해서 혼돈에 빠지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비록 예수가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역사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증언하는 것은 ‘그가 본래는 하나님이셨는데 인간의 몸을 입고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9절을 보겠습니다. “빌립아, 내가 그렇게도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있었는데도 네가 나를 모르느냐? 누구든지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이다. 그런데도 네가 어떻게 ‘우리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십시오’라고 말하느냐?”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러한 딜레마에 빠져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좋아서 따르고 그분의 말씀을 듣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는 ‘예수님과 하나님이 어떻게 하나일까’라는 질문을 계속했습니다. 이 질문을 가장 강렬하게 한 그룹이 바로 유대인과 바리새인 등 정통종교를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유대인과 바리새인들은 예수께서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시자 신성 모독죄로 예수를 고발합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결정적인 이유가 자신를 하나님이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가 하나님의 본체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 예수 그리스도가 비록 33세 동안의 공생애만 사셨고, 이천년 전에 태어난 사람이지만 우리는 그가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자가 되시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자라면 어떻게 우리가 그분을 구원자로 믿겠습니까? 종교 창시자라면 어떻게 그분을 구원자로 믿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인간의 몸을 입었지만 진짜 하나님이셨기 때문에 창세기부터 계시록에 나오는 성경의 모든 기적과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기 때문에 그가 한 기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예수께서 행한 일들을 인간이 했다고 말하기에는 우리의 양심이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믿지 못한 사람은 자꾸 이 문제에 걸립니다. ‘예수가 어떻게 인간이면서 하나님이셨을까? 왜 인간에게는 죽음이라는 문제가 있는 것일까? 그가 하나님이라면 왜 십자가의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와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은 영이시고 인간은 육체적인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태어난 날이 있고 죽는 날이 있고,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고, 육체적인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분입니다. 영원한 분이시며, 처음과 나중 되시는 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이 끊임없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예수님은 인간의 몸을 입고 똑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여자의 배를 아프게 하고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박혁거세처럼 하늘에서 뚝 떨어지듯이 신비스럽게 태어났다면 우리가 그분이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이해하기 쉬울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와 다름없는 인간으로 오셨기 때문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 인간이라고 말할 때 ‘그러면 우리와 똑같은 죄성으로 오셨는가? 아니면 아담이 죄 짓기 이전에 하나님이 최초로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의 원형으로 오셨는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담과 이브가 죄를 짓고 난 이후에 태어난 인간이기 때문에 원죄의 굴레를 씌고 태어납니다. 원죄가 없는 인간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상을 할뿐이지 한 번도 본적이 없습니다. 인간이 짐승 같고 사탄과 같은 모습을 한 것은 잘 이해합니다. 신문이나 TV나 소설이나 세상에 일어나는 일들을 통해 추악한 인간의 모습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우리는 선을 행하고 싶지만 선을 행할 능력 없는 사람입니다(롬 7:24). 인간이 인간을 볼 때도 너무나 추악합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저는 요즘 천국과 지옥에 대해 생각하면서 최초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봤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그 인간은 우리와 어떻게 다를까’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께서 본래 창조하신 그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다면 그분은 우리를 구원하고도 남습니다. 죄를 지은 우리 인간이 죄를 짓지 않은 인간을 보면 굉장히 충격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 번도 죄 짓지 않은 사람을 본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경험하고 우리가 본 인간은 추악한 인간입니다. 죄가 감추어진 냄새나는 인간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런 추악한 자신의 본질이 드러날까봐 전전긍긍하며 위장하기 바쁩니다. 요즘 어린이들을 성추행하는 사람들을 보면 인간의 추악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살인하는 사람이나 연쇄살인을 저지르는 사람의 모습은 인간의 단면에 불과합니다. 전쟁을 일으키고 복수하고 분노하는 인간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예수님이 인간으로 오셨다면 어떤 모습으로 오셨을까’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우리 인류를 대표해서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정확하게 우리의 갈등과 양심을 표현해 주고 있습니다. 니고데모의 질문입니다. “랍비여, 우리는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님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지 않는다면 선생님이 행하신 그런 표적들을 아무도 행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요 3:2). 이것이 니고데모의 양심이었습니다. 그는 경건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라는 젊은이가 돌아다니면서 사람들의 병을 고친다는 소문을 계속 들으면서 그의 마음속에 질문이 생깁니다. ‘당신이 우리와 같은 인간이었다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보면 예수를 만난 사람들은 충격을 받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갑자기 자신의 더러워진 모습을 발견합니다. 죄인인 것을 알게 됩니다. 그중 한 사람이 니고데모였습니다. 그는 고민하다 밤에 예수님께 찾아갑니다. 그리고 자기의 고민을 이야기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분은 바로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실 인간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묵상하면 할수록 충격에 빠집니다. 하나님을 경험하면 충격에 빠집니다. 지극히 영적인 작은 사건을 봐도 스스로 놀랍니다. 방언만 해도, 환상만 봐도, 예언을 들어도 스스로 놀랍니다. 그러나 그런 예언이나 방언 등의 은사를 체험하는 것보다 완전한 인간으로 오신 예수를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류가 예수님을 믿건 믿지 않건, 신자든 신자가 아니든 동의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완전한 인격의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가 사기꾼이라는 것을 증명해 보이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알면 알수록 무릎을 꿇고 ‘나의 하나님, 나의 주님’을 고백하며 믿게 됩니다.
크고 광대한 하나님의 세계
창세기 1장 27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하시니,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께서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여러분, 천국의 원형이 있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가 존재합니다. 어떤 과학자들이 추측하기를 이 은하계에는 천억 개의 별이 있고, 그런 은하계가 이천억 개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야말로 무한대입니다. 파스칼은 “우리가 하나님이나 우주의 크기에 대해서 상상할 때 우리의 상상력이 피곤할 뿐이지 그것을 다 추측하지 못한다”고 말했습니다. 밤마다 뜨는 하늘의 별들을 보십시오. 이 별들을 담고 있는 우주의 공간을 상상해보십시오. 얼마나 광활하고 얼마나 큰지 우리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무한대인 우주 안에, 은하계 안에, 지구라는 별 속에, 서울이라는 곳에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세계가 얼마나 크고 얼마나 위대하고 얼마나 광대합니까.하나님이 인간을 만들 때 그분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습니다. 그러니까 죄를 짓지 않은 인간은 하나님과 같은 형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인간을 본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최초로 만든 인간은 흠도 없고, 티도 없고, 부족함이 없는 100% 완벽한 인간이었습니다. 저는 그 최초의 인간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 최초의 사람은 하나님과 매일 동행했습니다. 하나님과 늘 동행할 만큼, 예배를 받으실 만큼, 하나님과 대화할 만큼 인간은 완벽한 존재였습니다. 우리처럼 이렇게 지저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인류가 죄를 짓고 나서 지금의 추악한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사탄과 죄로 인해 오염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프고 병들고 싸우고 마귀처럼 살고 짐승처럼 사는 모습으로 변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돌아가야 이제 우리는 돌아가야 합니다. 에덴동산을 창조하시고 인간을 지으신 하나님의 형상대로, 그런 모양대로 돌아가야 합니다. 창세기 1장 28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해 땅에 가득하고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에 기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셨습니다.” 28절에는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고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라’는 세 가지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은 인간에게 사명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상상할 수 없는 우주의 주인으로, 영광스런 사람으로 우리를 태어나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가끔 인간의 비천함을 말할 때 ‘티끌과 같고 쓰레기와 같고 벌레만도 못한 인간’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다스리는 권세를 주신 본래 인간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기억하지 못하고 벌레처럼 살 때가 많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위대한 인간으로 만드셨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작은 육체를 가지고 살지만,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우주를 지배하고 다스리고 통치하는 영광스런 인간으로 만드셨습니다. 비록 죄인의 모습일지라도 다시 의로워져서 이 미션과 우리의 존재 가치를 다시 회복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교회 나오면서도 계속 비굴하게 살고 자기 존재 가치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죄의 습성을 버리지 못하고 죄의 껍질을 뒤집어 쓴 채 살아갑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하나님은 인간에게 복을 주시고 우주 만물을 다스리시는 주체자로서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여러분, 서로를 향해 ‘당신은 참 위대하십니다’라고 말해보십시오. 그리고 가끔 거울을 보면서 ‘너 참 위대하다. 이렇게 위대하고 보배롭고 존귀하게 세상에 태어났구나’라고 스스로에게 말해보십시오.
성탄절은 ‘인간성의 회복’
창세기 1장 29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땅 위의 씨 맺는 온갖 식물과 씨가 든 열매를 맺는 온갖 나무를 너희에게 주었으니 이것들이 너희의 먹을 양식이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양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에 보니 그 양식은 모두 채소입니다. 동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새, 짐승, 땅 위에 기는 모든 것들에게도 식물을 음식으로 주셨습니다(30절). 31절을 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보시니 참 좋았습니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여섯째 날이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 보시기에 참 좋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모든 능력을 다 동원해서 만든 것이 여러분입니다.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이것이 모두 파괴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원래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대로 모두 회복시켜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탄절의 참 의미입니다. 이번 성탄절에 회복하는 축복이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이렇게 회복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주셨습니다. 이것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천국 가면 그런 삶을 살 것입니다.
성탄절은 인간성의 회복입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을 보겠습니다. “그 말씀이 육신이 돼 우리 가운데 계셨기에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한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었습니다.” 인간으로 오신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본 것입니다. 그 빛에 접근하는 사람은 모두 변합니다. 예수님의 영광의 빛 속에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이 있습니다. 그 빛을 본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 속에 있는 은혜와 진리와 영광의 빛을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강렬한 빛을 보면 눈을 뜰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빛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광의 빛이 너무나 강해서 볼 수 없습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이 우리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여러분에게 사명을 일깨워주시고 본래 하나님이 최초로 창조하신 인간의 비전을 회복하게 해주신 것입니다.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다시 천국을 보게 해 주신 것입니다. 성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축복이 여러분에게 함께 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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