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제자들을 위한 기도 (요한복음 17:12~19)

새벽지기1 2020. 4. 22. 07:27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화해와 일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열이 아니라 연합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기다리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래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는 영적인 것입니다. 그 말씀을 이성적으로 대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희열과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 


저는 요즘 투석을 하면서 지나온 과거를 돌이켜보고 많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중 한 가지 깊이 깨달아지는 것이 바로 ‘기도’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에 대한 새로운 통찰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성도들과 함께 오늘 본문을 통해 기도에 대한 은혜를 나눠보고자 합니다. 신앙생활의 핵심은 ‘말씀’과 ‘기도’입니다. 요한복음 14~16장에서는 예수님의 최후의 만찬에서의 설교가 기록돼있습니다. 17장에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기록돼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사역을 하는데 있어서 이 두 가지를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셨습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잘 하려면 큐티 만큼 기도도 많이 해야 합니다. 최소한 TV나 신문을 보는 시간보다 기도하는 시간이 더 많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이기기 어렵습니다. 말씀과 기도는 두 개의 바퀴와 같습니다. 바퀴가 하나만 있으면 엉뚱한 방향으로 가게 됩니다. 말씀에만 치우치다보면 이성적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기도에만 치우치면 신비주의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균형입니다.

교회도 균형을 이루지 못하면 건강하지 못합니다. 기도를 통해 영적으로 부흥하고 응답을 받고 영적인 힘을 얻을 때도 있지만 그렇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이렇게 금식하고 이렇게 하나님께 매달렸는데 왜 응답이 안되고 응답이 더딘 것일까’라는 생각도 가끔 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그런 우리를 향해 “중언부언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6:7)  


믿음으로 기도하라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하는 기도와 습관적으로 하는 기도는 다릅니다.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환경에서 비롯된 기도를 합니다. 자식을 위해, 병 낫기를 위해, 사업 문제 등 시급한 문제를 가지고 기도합니다. 기도는 많이 하지만 열매는 손에 잘 잡히지 않습니다.제자들이 귀신들린 아이가 오자 예수님을 흉내를 내면서 쫓아냈지만 귀신은 제자들을 조롱하면서 그 아이의 몸에서 나가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그 아이를 예수님께 데려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간단하게 귀신을 쫓아냅니다. 제자들이 ‘우리는 왜 안됩니까?’라고 질문을 했을 때 예수님께서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마 17:16~20) 예수님은 언제, 어디서나 기도하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모든 기적과 말씀과 사역에 기도가 끼여 있습니다. 사탄과 싸울 때 예수님의 무기는 금식기도였습니다. 40일 동안 금식하며 기도한 후에 사탄과 대결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권세와 능력이 있었지만 자신의 권세로 귀신을 물리친 것이 아니라 기도로 귀신을 물리치셨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일 때도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드리고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예수님은 새벽까지 기도하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바다를 건널 때 제자들이 폭풍을 만나 힘들어할 때도 산꼭대기에서 중보기도를 하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성령님을 통해 주님께서 기도하고 계심을 느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새벽 미명에 기도하셨고, 철야기도도 하셨고, 금식기도도 하셨고,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는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도록 기도하셨습니다. 이런 여러 가지 말씀을 살펴보면 예수님께서 구원사역을 하는 데 있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물며 우리가 기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살겠습니까? 기도하지 않고 어떻게 설교하고 어떻게 봉사하겠습니까? 예수님은 기도 때문에 제자들과 논쟁했고,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과도 논쟁했습니다. 서로 기도에 대한 개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관점이 달랐기 때문에 기도의 결과도 달랐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예수님의 기도와의 차이를 깨닫는다면 우리의 기도가 한 단계 업그레이드될 것입니다. 더 깊이 있는 기도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영의 기도와 육의 기도 


예수님의 기도는 어떤 기도였을까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이루는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육신의 기도는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는 기도는 영의 기도입니다. 제자들이나 율법학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모두 이성으로, 육적으로, 인간적인 생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상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예수님께서 하는 기도는 백 퍼센트 능력이 나타나지만 사람이 인본주의적으로 하는 기도는 능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것이 진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해야할 기도의 모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기도문의 뜻도 생각하지 않고 마치 주문을 외우듯이 외웁니다. 이런 기도는 기도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철야기도를 하고 새벽기도를 한다해도 기도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영으로 기도한다면 기도가 짧건 길건, 앉아서 하건 서서 하건, 눈 뜨고 하건 감고 하건 아무 상관 없이 능력이 나타납니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육의 기도를 합니다. 생각해보고 기도하고, 이런 상황에 따라 기도하고, 이성적으로 기도합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에서는 대표기도를 할 때 꼭 글로 써서 준비해서 하라고 훈련을 시킵니다. 대표기도를 준비하면서 영적으로도 더 깊이 기도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임재 속에서 하는 기도 


그렇다면 영의 기도는 무엇입니까? 내 생각에 따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임재 속에서 성령님께 이끌려 성령님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하는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기도를 하도록 훈련받지 않았기 때문에 성령의 임재 가운데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겉돌게 됩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성령의 기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들어도 이성으로 듣는 것과 성령으로 듣는 것은 다릅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이성으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영으로 이 말씀을 보면 해석하기 쉽습니다. 이 말씀은 구약의 모든 말씀과 신약의 복음서의 핵심입니다. 우리 인간은 세 가지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첫째는 ‘육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가장 기도를 잘하는 부분이 육체적인 것입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두 번째, 인간은 ‘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이 있기 때문에 외롭기도 하고 그립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것은 바로 ‘영’입니다. 영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연결할 수 있는 통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말씀을 하실 때도 영으로 하십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충만하지 않고 영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하면 계속 육적으로 해석하고 이성으로 해석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꼭 기억하십시오. 말씀과 기도는 영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영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운동력이 있기 때문에 그 말씀을 이성적으로 대한다면 우리는 영적인 희열과 기쁨을 느낄 수 없습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의 기도는 잡념만 계속 나게 합니다. 여러분 중에서는 자신이 30분 정도 기도했다고 생각하고 눈을 떴을 때 5분 정도만 지난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5분 정도 기도했다고 생각하고 눈을 떠보니 30분 넘게 시간이 지난 것을 경험한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 시간 기도해도 짧게 느껴지는 것은 성령에 이끌림 받아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영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예수님께서 영으로 기도하셨다는 사실을 모르면 오늘 본문 말씀인 요한복음 17장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여러분, 영의 기도를 사모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영이 우리에게 임해 우리의 생각을 이끌어 가십니다. 하나님은 영으로 말씀하시고 영으로 들으시기 때문에 그 채널을 먼저 만들어야 합니다. “영의 생각을 하게 해주십시오. 영의 말을 하게 해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주십시오. 성령님을 환영합니다”라고 고백하면서 조용히 기다리십시오. 그러면 영적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영이 시키는 대로 기도하다보면 방언도 나옵니다. 때로는 영이 시키는 대로 기도하다보면 나는 이 제목으로 기도하려고 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다른 문제를 놓고 기도하라고 말씀하실 때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영적 싸움과 경험을 계속 해야 합니다.


저는 온누리교회를 여기까지 끌고 오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생각이라면 이유 없이 순종하며 따라갔습니다. CGNTV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상상만 했을 뿐인데 하나님께서 생각을 불어넣어주셨고, 생각지도 못한 사람을 통해 물질도 채워주시고, 불가능한 환경도 가능하게 해주시고, 사람도 보내주시는 것을 봅니다. 제가 건강이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말씀을 놓지 않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계속 이끌어주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임하면 불가능이 쉽게 보이고 문제도 쉽게 느껴집니다. 기도는 얼마나 오래 했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얼마만큼 채널을 고정시켜서 기도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과거의 죄도 깨닫게 하시고 미래의 일도 알게 하십니다. 이런 일이 계속 경험될 때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들어가게 됩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옵소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은 영으로 기도하셨는데 성령이 오시기 전이라 제자들이 예수님의 기도를 잘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사건도 십자가의 사건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오늘 이 시간 이 설교를 통해 여러분이 영의 기도를 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사명과 비전을 깨닫고 순종하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먼저 자기를 위해 기도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위한 기도는 자신의 육체나 정신을 위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라고 하셨는데 피하지 않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지겠다고 하면서도 고난이 오면 피하기 바쁩니다. 손해 보려고 하지 않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고 편하고 생색나는 일만 골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여러분, 내가 희생하지 않는데 어떻게 은혜가 있겠습니까? 희생이 있어야 은혜가 있습니다. 내가 고생하고 수고하고 욕을 먹고 때로는 오해도 받아야 은혜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기도하셨습니다.(1절)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할 때에도 눈을 뜨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이르렀을 때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다스리는 권세를 깨달아 알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하나님의 권세와 하나님의 부르심을 놓치지 않게 해달라는 뜻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부르신 목적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의 목적에 맞지 않게 살기 때문에 부딪치고 힘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뜻 가운데 있기만 하면 힘들고 어렵게 느껴졌던 문제도 결국 풀립니다. 이것이 영의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자신을 위해 기도한 것의 요점은 자신의 삶이 아버지께 영광이 되게 해달라는 기도입니다. 제자는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 6절을 보겠습니다. “나는 아버지께서 세상에서 택하셔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냈습니다. 그들은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아버지께서 내게 주셨고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켰습니다.” 제자는 내가 키운 사람이 아닙니다. 성경의 기준에서 보면 제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준 사람입니다. 여러분의 제자는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사람입니다. 자신의 죽음을 알고 있었던 예수님께서는 “나는 떠나지만 남아있는 제자들을 보호해주시고 하나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은 ‘화해와 일치’입니다. 서로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서로 얼굴을 붉히고 분노하고 미워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분열이 아니라 연합입니다.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기다리고 하나 되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에 하나됨의 역사가 있기를 기도하십시오.


두 번째는 내가 떠나도 제자들 중에 한 명도 멸망하는 사람이 없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12절) 우리도 “내가 떠나도 교회가 무너지지 않게 하시고 성령님과 말씀이 우리의 목자 되어서 모두 한 길을 가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세 번째는 죽을 때 기쁘게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13절) 제자들도 죽을 것인데 자신처럼 기쁘게 십자가를 받게 해달라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네 번째는 제자들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을 때 기쁘게 감당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14절) 다섯 번째는 내가 떠난 후에 제자들이 이 세상에서 악에 빠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 사탄은 이리떼들처럼 양들을 집어삼키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여섯 번째는 세상을 따라 가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16절) 일곱 번째는 아버지가 나를 세상에 보낸 것처럼 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18절) 인간은 안주하려는 본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에 따라 떠나기 위해 오는 곳입니다.  


‘거룩’은 ‘순결’ 


오늘 본문 말씀의 모든 기도의 내용을 보면 하나도 편한 것이 없습니다. 기분 좋은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감사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우리는 항상 의미 있는 자리, 높은 자리, 사람들이 박수 쳐주는 자리에 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을 위한 예수님의 마지막 기도는 정반대입니다. 세상에 속하지 않고, 유혹받지 않고, 죽을 때 기쁘게, 후회 없이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이 거룩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니다.(19절) ‘거룩’은 ‘순결’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너무 더러워지고 생각도 언어도 더러워져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나를 거룩하게 해주십시오. 온누리교회를 거룩하게 해주십시오. 교회가 장사치들의 모임이 아니게 해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변하지, 세상과 같다면 세상이 우리를 보고 변할게 뭐가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영으로 기도하십시오. 그리고 우리의 삶이 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기도가 응답될 때 우리의 삶에는 찬란한 기적과 영광스런 축복이 임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