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따라라.”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의 길을 가지 마라. 네가 계획한 일, 그 길을 가지 말고 주님을 따라라.” 예수님은 상처 받은 사람들, 배반한 사람들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주변에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위로하고 격려하십시오. 오늘의 본문 말씀은 예수님과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또한 배신자와 예수님과의 만남을 보여주고 있고, 예수님과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 다 버린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요한복음은 전체 흐름상 20장에서 끝내야 자연스럽습니다. 그런데 한 장을 더 기록한 것은 요한복음에서 뺄 수 없는 내용, 포기할 수 없는 내용을 21장에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상처 입은 제자들 치유하신 예수님
21장에는 설교를 하기 위한 내용이나 병을 고치거나 기적을 행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습니다. 21장에서는 예수님을 3년 동안 잘 따라다니다가 실족해서 따를까 말까 고민하는 제자들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상처받은 제자들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지 않으면 이 제자들이 하나님의 일을 목숨 걸고 계속할 수 있을지 잘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지 않고 40일 동안 이 땅에 머무셨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 다른 사역은 하지 않고 실망과 실의에 빠져 있는 제자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닙니다. 상처받은 제자들을 만나 밥을 먹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격려를 하는 장면으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저는 21장에 기록된 부분이 그 어떤 기적보다도 더 큰 기적이라고 생각합니다. 21장을 보면 죽어가는 사람, 비전을 받았지만 그 비전을 행하지 못하는 사람, 어찌할 바 모르는 사람들만 찾아서 하나씩 회복시켜 주시고 격려해주시는 말씀이 기록돼 있습니다.
목숨을 걸고, 때로는 직업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들이 왜 이런 형편이 되었을까요?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충격적으로 경험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떠올리면 십자가와 부활의 능력을 말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으신 후 삼 일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십자가의 사건도 부활의 사건도 직접 경험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후에 왜 예전의 삶으로, 예전의 직업을 찾아 돌아가려고 했을까요? 여기서 우리는 영적으로 배우는 것이 많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아무리 은혜를 받고 성령을 체험하고 십자가와 부활을 체험해도 과거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이고, 어쩔 수 없는 죄성입니다. 과거에 위대한 성자가 사창가에서 발견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입니다. 그래서 믿음이 좋고 신앙생활을 많이 한 사람일수록 쉽게 허물어지는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비전을 회복하라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그대로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다시 일으키시고 세워주신 것입니다. 그들을 다시 회복시키고 치유하신 목적은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에게 비전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에게 비전이 없으면 동물과 같습니다. 먹고 누리고 유명해지기만 한다면 인간은 더 이상 희망이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비전을 일깨워주십니다. 우리는 비전을 받았다가 어느 한순간에 시험 들어서 그것을 잊어버리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비전에 대해 무관심한 사람도 있습니다. ‘내가 세상에 왜 태어났나? 무엇을 위해 태어났나? 무엇을 하다가 천국으로 가나?’ 병들고 나이 들고 시험 들면 비전에 대한 생각이 희미해집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나를 따르라’라고 말씀하시며 비전을 회복시키십니다. 그 비전에 따라 살다가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합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에서 가룟 유다만 자살했고, 나머지 모든 제자들은 다 흩어져서 자기 사명을 감당했습니다.어떤 사람들은 자기 직업이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사람에게 직업은 꼭 필요하지만 직업이 인생의 목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 직업이 소중한 것입니다. 결혼은 인생의 목적이 아닙니다. 결혼도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며, 비전을 이루는 통로입니다. 이러한 핵심을 놓치면 주변 모든 사건은 의미가 없습니다.
위기 가운데 옆에 계시는 주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한 명 한 명 마음의 상처를 치료해주십니다. 21장을 보면 처음에 제자들의 얼굴이 밝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했으면 제자들이 춤을 추며 기뻐해야 하지 않습니까? 찬양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자들은 말을 잃고 겸연쩍어합니다. 21장은 두 가지 사건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한 가지는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부로 다시 돌아가서 고기를 잡고 있는데 그 장소에 예수님이 나타나신 사건입니다. “얘들아, 고기 많이 잡았니”라는 예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5절) 여러분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예수님이 여러분 옆에 있는데 알아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들은 위기를 당하면 대부분 혼자 괴로워합니다. 위기를 어떻게 뚫고 나갈까 혼자 고민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의 위기 속에는 언제나 우리 옆에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보기만 해도 내가 다시 살아나는데 그걸 보지 못하기 때문에 혼자 자기 문제에 파묻혀 괴로워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돼 있지는 않지만 제자들이 만나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하면 좋으냐”며 미래에 대한 걱정을 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죽기까지 주를 따르겠다”면서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어린 계집종 앞에서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을 만큼 많은 실수를 했습니다. 그런 자신들의 모습을 모두 회상했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먼저 “나는 고기나 잡으러 가겠소”라며 과거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3절)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 직업이었던 어부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따르라’며 초청해주셨는데 그 비전은 다 희미해지고 자신감도 잃었습니다. 그러자 다른 제자들도 함께 가겠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잘 잡히던 고기가 그날 밤은 한 마리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살면서 항상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배신도 당하고 친구도 잃어버리고 돈도 잃어버릴 때가 많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교훈이 몇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 인간은 성자라 할지라도 과거로 돌아가려는 습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합니다. 겉으로 볼 때 훌륭해 보여도 실제로 우리의 믿음이 흔들릴 때도 있습니다. 왜 과거로 쉽게 돌아가려고 할까요? 바로 상처 때문입니다. 과거의 실패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나간 과거의 실패에 얽매이지 마십시오. 과거의 실패를 상처로 만들지 마십시오.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제자들
예수님은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한 제자들이 새벽이 되자 그물을 거두고 배에서 내리려고 할 때 제자들 앞에 나타나십니다. “얘들아, 고기를 많이 잡았냐?”라고 물으십니다. 그런데 그 소리를 듣고도 모든 제자들이 절망에 도취되어서 예수님을 보지 못합니다. 여러분, 우리 안에 죄가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합니다. 들릴지라도 왜곡해서 듣습니다. 영적 감각이 둔해집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서는 먼저 디베랴 바닷가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을 회복시키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오른쪽으로 던져라”고 말씀하시자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힙니다.(6절) 그러자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보기 시작합니다. 베드로는 ‘주님이시다’라는 말을 듣자마자 순간 자기가 그렇게 사랑하던 주님을 배신했던 것도 다 잊어버리고 주님을 향해 뛰어갑니다.(7절)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우선 고기를 많이 잡게 해서 기쁨을 안겨줍니다. 또한 추운 새벽, 배가 고플 시간에 숯불을 따뜻하게 피워놓고 빵을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상처 받은 사람들, 자기를 배반한 사람들을 야단치지 않았습니다.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한테 ‘왜 그랬냐’라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수치와 부끄러움을 주지 않는 분입니다. 실패에 대해 질책하지 않습니다. 베드로를 향해 “너는 어떻게 나를 세 번씩이나 부인하냐”고 묻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을 보고 처음 하신 일은 고기를 구워서 따뜻한 빵과 함께 나눠주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주변에 이렇게 상처받고 힘들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함께 식사하면서 그냥 위로하고 격려하십시오.
위기 앞에서 주님을 부인한 베드로 두 번째 사건은 바로 오늘 본문 말씀에 나옵니다. 카메라가 풀컷으로 촬영하다가 줌인 해서 한 사람에게 포커스를 맞추는 것처럼 베드로에게 집중됩니다. 제자들도 많이 있었는데 오늘 본문에서는 딱 두 사람만 남습니다. 예수님과 베드로입니다. 15절을 보겠습니다. “그들이 아침 식사를 끝마치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예 주여, 제가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 어린 양 떼를 먹여라.””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했을 때 베드로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주께서 아시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그 말은 ‘내 사랑은 실패했습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한 줄 알았습니다. 사랑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결정적인 위기 앞에서 주님을 배반했습니다. 내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걸고 대신 죽는다고 말 못했습니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가실 때 베드로는 가장 끝에 서서 따라갔습니다. 두려움이 왔던 것입니다. ‘나도 같이 한패라고 잡혀서 몽둥이로 맞고 채찍으로 맞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합니다. 세 번째 부인할 때에는 예수를 저주하면서 모른다고 말합니다. 그때 닭이 울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나 통곡을 합니다. 그렇게 진짜 자기의 모습을 보고 나서는 사랑한다는 고백이 쉽게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없어요. 그러나 내 마음 그 가슴 끝에는 친구의 우정이나마 조금 남아 있는 것을 주님은 아실 거예요”라는 뜻에서 “주를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아십니다”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한 영혼을 돌보는 목자
주님은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실 때 ‘아가파오’라는 단어를 씁니다. ‘아가페로 사랑하느냐’는 뜻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나는 아가페적인 사랑을 할 수 없습니다. 실패했습니다. 배신했습니다. 내가 사랑할 수 있다면 우정입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세 번째 물으시자 베드로는 ‘왜 세 번씩이나 물으실까’라고 생각하며 겁이 납니다. 이 부분에 대한 학자들의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그중에 하나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 부인했기 때문에 세 번 질문을 해서 상처를 하나씩 지워주신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실수한 만큼 사랑하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자 예수님은 비전을 주십니다.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양을 치고 먹이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순모임입니다. 여러분, 진짜 사람을 섬기시기 바랍니다. 실수하고 절망하고 상처받은 한 영혼을 만나주고 그들의 얘기를 들어주고 기도해주십시오. 대부분 임직자들은 많은 사역이 있기 때문에 일을 하기 위해서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나 실제로 개인적으로 한 영혼을 돌보고 양육하는 일은 많이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우리 장로님들한테도 모두 순장을 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돌보는 사람이 있어야 스스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저는 설교해야 살아납니다. 설교 끝나고 강단에서 내려가면 또 비실거립니다. 설교가 저를 살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일대일 양육도 하고 만나기 싫은 사람도 만나서 돌보십시오. 그리고 큐티하십시오.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가 일을 얼마나 잘 했는지, 얼마나 큰 집을 샀는지, 세상에서 얼마나 인정받는 유명인사가 되었는지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어가는 한 영혼, 절망하는 한 영혼을 과연 사랑했는지, 얼마나 그 사람을 도와줬는지, 얼마나 회복시켰는지에 관심이 있으십니다.
“나를 따라라”
베드로는 성령을 받고 나자 생각이 정리됩니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없으면 우리는 비전을 향해 나아가기 힘듭니다. 베드로와 예수님과의 마지막 대화를 들어보면 베드로에게 ‘네가 회개했느냐’라고 묻지 않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십니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보고 내가 하나님인 것처럼 야단을 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시험이 오고 힘들면 똑같이 넘어지고 쓰러지는 연약한 죄인입니다. 21~22절을 보겠습니다. “베드로가 그 제자를 보며 예수께 물었습니다. “주여,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원한다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베드로는 뒤따라오는 요한을 지목하며 그의 운명에 대해 예수님께 묻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요한이 오래 살건 일찍 죽건 그것은 요한의 문제지 네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며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십니다.(21~23절)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의 문제 때문에 시간을 많이 보낼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내가 돌아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원한다 한들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겠느냐?”라고 물으십니다. 마지막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향해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나를 따라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오늘 이 시간 주님께서 여러분을 향해 말씀하십니다. “네 인생의 길을 가지 마라. 네가 계획한 일, 그 길을 가지 말고 주님을 따라라.”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주님은 우리에게 회개하라고 하시고
야단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느냐고 묻습니다.
주님,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지를 주께서 아십니다.
내 힘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처럼
우리가 주님을 따를 능력은 없지만 주님을 따르기로 결심하겠습니다. 헌신하겠습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좋은 말씀 > 하용조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상의 빛 (요한복음 1:4~14, 8:12) (0) | 2020.05.04 |
---|---|
제자들을 위한 기도 (요한복음 17:12~19) (0) | 2020.04.22 |
예수와 빌라도 (요한복음 18:28~38) (0) | 2020.04.19 |
향유를 부은 여인 (요한복음 12:1~8) (0) | 2020.04.17 |
실로암의 기적 (요한복음 9:1~12) (0) | 2020.04.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