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하용조목사

모세의 믿음

새벽지기1 2020. 3. 5. 06:12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십자가의 고난이 이해되고 부활이 이해되고 천국이 이해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천국이 상상력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없는 믿음은 공허하며, 인간적이며,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믿음입니다.


  


지난주까지 세 번에 걸쳐 히브리서 11장 말씀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오늘 살펴볼 아브라함의 믿음의 마지막은 부활의 믿음입니다. 믿음의 클라이맥스는 죽은 자를 살리시는 하나님을 믿는 부활의 믿음입니다. 부활에 대해 미리 알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어떤 고난과 역경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천국이 있다는 사실, 곧 우리가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확신의 믿음으로 있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인간에게 부딪치는 어떤 일도 두려움이 되지 않습니다. 내일이 확실한 사람은 오늘이 분명해집니다. 내일이 불확실한 사람은 오늘의 삶에 자신이 없습니다. 의심이 많고 염려가 많고 걱정이 많습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 같이, 또 안 보이는 것을 보이는 것처럼 하시는 분이십니다.  


부활의 믿음 


아브라함의 믿음의 마지막 정점은 부활의 믿음입니다. 그래서 이삭을 죽였지만 살아난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죽이려고 결심했습니다. 칼을 들어 이삭의 심장을 향해 찌르려 했습니다. 그러나 찌르려는 순간 ‘여호와 이레’되시는 하나님은 어린양을 준비해주셔서 ‘네 믿음을 내가 보았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제사이자 또한 예배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오늘 우리의 제사와 예배는 이삭의 심장에 칼을 꽂는 것 같은 믿음을 가지고 드릴 때 참 제사와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믿음의 클라이맥스에서 아브라함이 부활의 믿음 다음으로 한 것은 약속의 자녀를 축복하고 믿음의 유산을 남겨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축복했고 이삭은 야곱을 축복했고 야곱은 요셉을, 요셉은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한 이야기가 창세기 마지막 부분에 있습니다.


성경은 많은 부분을 할애해서 이 믿음의 유산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자녀를 축복하는 것인데, 평소 자녀와 관계가 나쁘면 축복하기가 어렵습니다. 아버지가 해주는 축복을 안 받겠다는데 어떡하겠습니까.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져줘야 합니다. 그리고 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것은 집을 사고 직업을 갖고 결혼하고 성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자녀들은 주 안에서 부모를 공경할 것이요, 부모는 자녀를 분노케 하지 말아야 합니다. 조금만 이해해주면 자녀들과 소통할 수 있습니다. 대개 이 소통이 안 되는 이유는 아들의 입장에서 보지 않고 아버지의 입장에서 보기 때문입니다. 자녀의 입장에서 일하지 않으면 교육은 실패합니다. 아들과 아버지는 수준이 서로 맞지 않습니다. 경험도 맞지 않습니다. 안 맞으니까 부모는 아이를 볼 때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들이 아버지에게 맞춘다는 건 어려운 일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아버지가 아들 입장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부글부글 뭔가 끓어 올라오더라도 삼키면서 받아줘야 합니다.


부부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내의 입장이 돼주는 겁니다. 사람마다 같은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다른 관계가 부부입니다. 부부는 서로 성격이 다르고 취미가 다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 연애한 것입니다. 나하고 다르니까 연애했는데, 결혼하고 보니 서로 다르다는 면이 지옥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나 다른 게 정상입니다. 밥 먹는 것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생각하는 스타일도 다릅니다. 이것을 조화롭게 하나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기술이고 예술이고 믿음입니다.


요셉의 결론은 이스라엘 자손을 축복했다는 것입니다. 이제 아브라함의 믿음을 마치고 모세의 믿음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먼저 23절을 읽겠습니다.  


모세의 믿음 


“믿음으로 모세의 부모는 모세가 출생했을 때 그 아이를 석 달 동안 숨겼습니다. 이는 그 아이가 남다른 것을 보고 왕의 명령을 무서워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조상 야곱은 믿음으로 12지파를 축복했지만 그중에 특별히 요셉을 축복했습니다. 요셉은 믿음의 계승자입니다. 그 믿음을 다음 세대까지 전승했습니다. 모세는 율법의 창시자일 뿐 아니라 율법의 아버지이기도 했습니다. 모세가 처음부터 믿음이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아브라함과 똑같이 그는 인생에 있어서 40세까지 실수를 연발했습니다. 인간적인 열정에서 비롯된 믿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죽이기도 했습니다. 진짜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음을 처음 가질 때는 아무리 머리가 좋고 세상의 경륜이 많고 학식이 높아도 믿음의 실수를 꼭 하게 돼 있습니다. 미성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으로 성숙해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어렸을 때는 물론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중에도 아브라함에게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부모라면 누구든지 자식을 잘 가르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날품을 팔아서라도 내 아이는 학교 보내고 잘 가르치고 싶은 것입니다. 이게 부모의 자녀를 향한 계획이고 섭리입니다. 그러나 자식이 그 부모의 섭리에 반항을 하면, 그래서 집을 뛰쳐나가면 부모가 아무리 주고 싶어도 줄 수가 없는 겁니다. 이미 나가버렸기 때문입니다. 돌아와야 부모는 자기의 사랑을 아들에게 줄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을 때는 섭리의 보호를 받지만 그것을 거부하고 반항하면 하나님의 섭리의 축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모세의 믿음이 초창기에 어떻게 성장했습니까. 모세는 태어나서 아무것도 모르고 자의식이 생기지도 않은 석 달이 될 때까지 어떻게 성장했습니까. 부모의 믿음을 따라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유아세례가 의미가 있습니다. 아이는 모르지만 성인이 될 때까지 부모가 아이의 믿음을 지켜주고 바른길로 인도해주는 것입니다. 믿음이 게임처럼 좋고 기쁘면 누가 안 하겠습니까. 나의 본성은 즐기는 것을 좋아하는데 믿음은 그렇게 얘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믿음을 지키는 것은 죄를 가진 인간의 자연적 본성과 위배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훈계하는 것입니다. 때로는 매를 들고 야단을 쳐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른길로 가도록 인도하는 것이 부모의 역할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고 너무 때리고 야단치면 자식이 그 다음부터는 말을 안 듣게 됩니다. 습관이 되면 또 설교한다고 생각하면서 부모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제가 이런 얘기를 듣고 굉장히 감동을 받았습니다.


소련이 무너질 때 어떻게 무너진 줄 아십니까. 당시 미국 대통령인 레이건이 소련의 고르바초프를 개인적으로 전도했다는 것입니다. 비밀회담이 다 끝나고 마지막에 레이건을 개인적으로 만난 고르바초프가 하나님을 받아들이면서부터 소련이 무너졌던 것입니다. 북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와 뜻으로 무너지는 것이지 협상하거나 남북의 대통령이 만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이스라엘 산파들도 하나님을 이 같이 인정하고 경외했기 때문에 바로 왕의 말을 듣지 않고 아이들을 다 살려놓았습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산파를 축복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자꾸 건강하게 자라니까 왕은 한 단계 더 높은 경고를 내립니다. 히브리인 중에 애기를 낳으면 남자면 모두 나일강에 버려 죽이라는 명령이었습니다. 풍전등화 같은 위기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두려워하는 믿음 


산파들이 남자아이들을 살릴 수 있었던 이유는 애국심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단계 더 높은 이유는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살벌하고 무시무시한 상황 속에서 모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몰래 아이를 키웠습니다. 여기서 발견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여기서 발견하는 믿음의 또 하나의 본질은 세상 법보다 하나님의 법을 더 두려워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세상 법을 두려워합니다. 그건 세상 질서를 지키지 않겠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 경외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을 낳습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합니다. 모세는 아버지, 어머니의 믿음에 따라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름이 안 나옵니다. 레위 지파라는 말만 나옵니다. 레위 지파의 한 남자와 한 여자가 결혼을 했는데 그 사이에서 모세가 태어난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믿음의 사람들이었습니다.


여러분, 잘 들으시길 바랍니다. 부모님이 믿음이 있으면 그 믿음은 자녀에게 계승됩니다. 그렇다면 남편이 예수를 안 믿으면 어떻게 됩니까. 그렇더라도 아내는 그 아이를 기도하면서 키워야 합니다. 그러면 그 아이가 그때는 못 알아들어도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믿음 속에서 자랍니다. 모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모세의 남다른 면을 보고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키웠습니다. 남다르다는 뜻은 무엇입니까. 잘생겼다거나 눈이 또렷하다거나 하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모세에게 있는 것을 부모가 발견한 겁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하나님의 섭리 속에 자라고 있다는 것을 부모가 발견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섭리 


미래가 불안하고 위기에 있을 때 하나님께 미래를 맡기고 믿음으로 나아가면 하나님의 숨겨진 섭리가 드러나게 됩니다. 재미있는 건 나일 강에 목욕하러 왔던 애굽의 공주가 모세의 갈대상자를 발견한 것입니다. 이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하필이면 그 시간에 공주가 나와서 목욕할 게 뭡니까. 또 목욕을 하더라도 그 갈대상자를 발견한 건 왜입니까. 또 갈대상자 안을 보니까 어떤 총명한 아이가 막 울고 있는데 그 아이를 보는 순간 이 공주의 마음에 긍휼한 마음이 생긴 건 무엇입니까. 공주는 히브리인의 아이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하나님의 섭리 때문에 긍휼한 마음을 품게 되었습니다. 젖 먹일 사람을 찾는 공주에게 모세의 누이가 자신의 엄마를 유모로 소개해 모세의 엄마가 모세를 키우게 된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계산이 얼마나 놀랍습니까.


여러분, 어떤 어려움이 생겨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계산 안에 있고, 섭리 안에 있습니다. 직업을 잃어버려도 좋고 가져도 좋습니다. 결혼을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습니다. 가난하면 가난한 대로 부유하면 부유한 대로 우리는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산 안에서 사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프면 아픈 거고 건강하면 건강한 거고 죽을 때가 되면 죽는 거고 또 죽다가 살아나면 아멘 하고 살면 됩니다. 이 섭리, 하나님의 섭리가 내 마음에 꽉 들어 있으면 평화가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 대신에 평화와 기쁨이 솟아나게 됩니다. 로마서 8장 28절에는 “그분의 뜻을 따라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해 선을 이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오늘 여러분이 당하는 현실에서 사업이 안 되고 가정이 위기에 처하고 자녀들은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 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이 믿음으로 기도하고 하나님의 섭리를 믿으면 이 모든 문제가 여러분이 생각하는 수학공식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다 풀리게 됩니다.


24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다 자란 후에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믿음의 뿌리 여기서 우리가 배우는 게 있습니다. 아이는 부모의 기도와 믿음에 따라서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자랐습니다.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때 모세는 이미 그 마음속에 믿음이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에 대해 거절하는 용기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깨닫는 겁니다. 모세는 믿음으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바로의 도움으로 공부했지만 바로의 딸의 아들이라 불리는 것을 거부할 수 있었습니다. 왜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인생의 목적을 모르고 방황합니까. 정체성이 없어서입니다.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러나 그의 본질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자신의 존재와 정체성을 확인하는 것은 자기 인생의 목적과 사명을 깨닫는 것과 같습니다. 존재의 뿌리가 확실하면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이유는 자기의 정체성의 뿌리가 조상이라고 생각하기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과 우리 존재의 뿌리는 하나님입니다.


25절입니다. “그는 잠시 죄의 쾌락을 즐기는 것보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더 좋아했습니다.”믿음은 순간이 아니라 영원입니다. 믿음은 즐기는 것보다 고난 받기를 더 좋아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어떤 권력도 성공도 명예도 거절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소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의 정체성입니다. 26절입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하는 수모를 이집트의 보화보다 더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는 그가 상을 바라보았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여기서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신약의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과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명예와 권력과 부보다 더 가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는 것이라는 겁니다. 구약시대에 예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사건이 사실은 몇 천 년 후에 일어날 예수 사건임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천국의 믿음  


이런 의미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사건은 예수 사건입니다. 내가 직업을 갖는 것도, 직업을 잃는 것도 다 예수 사건입니다. 고난도 예수 사건입니다. 애굽의 보화보다 그리스도의 수난에 동참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젊은 모세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리스도를 본 적도, 불러본 적도 없지만 믿음의 조상들은 예수님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이삭을 바쳤지만 살아날 것도 알았습니다. 모세는 더 나은 본향, 천국이 있다는 것을 영감으로 알았던 겁니다. 27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왕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고 이집트를 떠났습니다. 그는 보이지 않는 분을 보는 것같이 여기고 인내했습니다.” 믿음은 권력과 폭력과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항상 추구한 것은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해야 합니다. 믿음의 조상들은 단순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약속을 믿고 나아갔지만 그 약속이 먼 훗날 예수 그리스도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하나님과 친밀해지고 가까워지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난이 이해되고 죽음이 이해되고 부활이 이해되고 천국이 이해됩니다. 오늘 여러분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천국이 상상력으로 가득 차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천국을 보고, 믿음으로 예수의 고난도 보고,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의식을 보고, 믿음으로 이 모든 것이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사건이 없는 믿음은 공허한 믿음이고, 인간적인 믿음이고, 바람에 날리는 겨와 같은 믿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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