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권성수목사

대화와 타협

새벽지기1 2017. 12. 14. 06:15


터키 주재 영국대사관 앞에서 자살 테러 사건이 터져 수십명이 죽고 수백명이 부상했다. FTA(자유무역협정) 체결을 앞두고 농민들이 사활을 건 시위를 벌였다. 핵폐기장 시설을 놓고 부안 군민들이 도로를 차단하고 차량에 방화했다. 이런 사건을 볼 때마다 그저 막막하기만 하다. 어떻게 풀어야 할 것인가 하는 생각보다 과연 풀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선다. 죽여야만 하고 부숴야만 하고 태워야만 한다는 의식의 막다른 골목을 보기 때문이다.

극한 대결의 막다른 골목에서 빠져나오는 길은 없을까? 사람들은 말을 하고 말이 통하는 존재들이다. 대화를 통해서 의사를 전달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존재들이다. 문제는 대화와 타협의 길이 막혔다는 데 있지만 그래도 대화로 풀어가야 한다.
우선 대화가 가능한 단계에서 문제를 푸는 지혜가 필요하다. 말이 통하는 단계를 기회로 보고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문제가 서서히 불거질 때 초기 단계에서 대화를 통해 타결할 수 있는 길을 계속 열어놓아야 한다.

대화를 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성의와 배려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자기편의 목표를 고정시켜 놓고 그것을 관철해야만 하겠다는 강박관념으로 상대편을 몰아붙이면 대화의 문은 막히고 만다. 대화를 통해서 상대방의 입장과 형편과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고 이해하고 배려해야 한다. 자기편에 속한 사람 중에 상대편을 배려하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어용이니 스파이니 해서 몰아붙이면 해결의 길은 점점 더 멀어진다.

대화를 통한 타협의 길을 가지 않으면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서 이겨도 결국 양측이 다 지는 것이다. 일시적으로 목적은 달성했다 해도 나라 전체의 국제적 신인도가 떨어진다면 궁극적으로는 지는 것이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상대적으로 든든하게 해도 후손들의 삶의 터전을 허물어뜨리는 결과를 가져 오기 때문이다.

대화의 길이 막혔으면 그 길을 뚫어야 한다. 말 한 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 아비가일은 칼을 차고 달려오는 다윗 군대 앞에서 멸문(滅門)의 위기를 대화로 해결했고 (삼상 25장) 한 지혜로운 여인은 요압 군대에 포위돼 전멸의 위기에 빠진 아벨성을 대화로 건져내었다(삼하 20장). 아무리 답답해도 대화와 타협의 길을 가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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