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산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교만한 말인지 몰라도 더 넓은 세상인 서울에서 공부하고 팠다.
물론 대학교 시절에 서울에 대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지만
여전히 소견을 가진 탓인지 대학교는 부산에서 다니자는 재정상 이유가 있었다.
학력고사를 치른 후 유혹이 찾아왔다.
일반대학교의 법대를 가거나 영문학과를 선택했으면 하는 심정이 들었다.
하지만 떨쳐버리고 고신대학교를 당당하게 선택했다. 감사할 따름이다.
그런 후 서울에서 전국에서 몰려오는 학생들과 자신을 점검하고 싶었다.
여기서 공부를 마치면서 마음은 외국에 가 있었다.
세계에 있는 학생들과 자신을 점검하고 팠다.
그것이 현실로 드러나자 나는 당황하였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는구나!
하지만 이제는 그 기나긴 학문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정리하는 중이다.
떠나기 전에는 또는 국가와 국가 간을 이주하면서, 타향살이 20년가량을 하면서 온갖 생각이 많이 들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한다는 확실한 소망이 없었다면 이 모든 것을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다.
중생의 목적이 거룩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거룩한 삶을 살지 못한다.
구원받지 못한 것이 아닌지 의심할 정도로 불안할 때가 많다.
구원의 확신에 대한 메시지를 어떤 경우엔 불안하기만 하다.
아니면 되는대로 살아가는 자인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특별히 죄들을 범할 때는 더욱 그렇다.
이런 죄인도 하나님의 자녀인가?
그분의 복을 받으며 천국에 입성할 수 있을까?
회개할 때마다 우리는 곧잘 "용서해주세요!"라도 외친다.
그리스도의 단번의 속죄로 용서받았다고 했는데 왜? 지속적으로 용서를 구하는 것일까?
구술하지 않으면 용서를 받지 못하는 것인가?
그렇다면 죄들의 용서를 개념을 정확하게 모른다는 것ㅇ니데 이것이야말로 큰일이다.
근간에 일어나는 새관점 학파의 억지 주장과 다를 바 없다하겠다.
아니면 종교개혁의 진리의 재발견한 "칭의"에 대한 확신이 없다는 것이 되고 만다.
생명을 걸고 순교의 길을 걸었던 그런 확신이 없다면서 나는 어떤 자인가?
특별히 기도할 때 기억나는 범죄자들과 심정의 상태를 솔직하게 하나님께 구술한다.
용서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지만 반복되는 범죄를 하나님께 상세히 변명으로 틀어 놓는다.
그렇다고 죄들이 용서받은것이 아니다.
아니! 이미 용서받았는데 무슨 용서의 기도를 하는 걸까?
심리적 안정을 위한 것일까?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죄들의 용서의 기도가 필요하지 않단 말인가? 필요하다. 난감한 처지다.
우리는 회개의 기도할 때에 "용서해주세요!"라고 하지말고,
"긍휼이 여기소서!"라고 해야 한다.
용서는 이미 받은 것이기에, 이미 죄들이 덮였기에,하지만 죄들을 범하고 있으니
연약한 의지를 안타까워하면서 자비하신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는 것이다.
다시 일어서서 담대하게 싸울 것이기 때문이다.
인내하시며 기다리시는 하나님은 긍휼을 간구하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오늘도 박지약행을 안타까워하면서 하나님께 긍휼의 기도를 드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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