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갈라디아서

갈라1- 갈라디아교회에 닥친 복음의 위기

새벽지기1 2017. 11. 26. 20:07


갈라디아서는 바울이 제일 먼저 쓴 편지입니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 때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한 후 갈라디아 교회에 심각한 위기가 닥친 것을 알고 쓴 편지입니다. 그렇다면 갈라디아 교회에 닥친 위기는 무엇일까요? 갈라디아 교회에 닥친 위기의 본질을 알려면 먼저 바울을 알아야 합니다.

이 편지를 쓴 바울(사울의 로마식 이름)은 본래 예수를 핍박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서 예수가 메시아라는 것을 도무지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전통적으로 십자가에 죽은 자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신21:22-23)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울은 예수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라고 생각했고,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가 이스라엘의 존엄과 자유를 회복하는 메시아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께 저주받은 자를 메시아라고 믿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고, 유대교의 정통성을 크게 위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는데 앞장섰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뿌리 뽑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이고,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라고 생각하고 열과 성을 다하여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이 갑작스럽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을 체포하러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 운명적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만났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고 호소하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고, 도저히 눈을 뜰 수 없는 강렬한 빛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충격적인 일이었습니다. 놀라운 이적을 보았다는 게 충격이 아니고 하나님께 저주받았다고 생각한 예수가 저주받은 게 아니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살리셨다는 것 자체가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앞으로 갈라디아서를 보면서 자세히 이야기하겠지만 바울은 이 사건으로 인해 기존의 모든 것이 깨어지고 무너졌습니다. 지금까지 하나님에 대해 알았던 것들, 지금까지 바울이 붙잡았던 신앙체계와 인식체계가 완전히 깨어지고 무너졌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바로 이 사건에서 출발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강력하게 말합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은 사람의 창작물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고, 사람에게 배운 것도 아닙니다. 오직 메시아 예수의 계시를 통해 온 것입니다.”(갈1:12)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입니다. 바울은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와 만난 사건을 ‘환상’이라고 말하지 않고 ‘계시’(apocalupsis)라고 말했습니다. 헬라어 ‘아포칼룹시스’는 ‘드러냄’을 의미합니다. 항상 거기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아서 몰랐던 것이 갑자기 너울이 벗겨져 드러나는 것이 아포칼룹시스입니다.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는 말은 바울이 다메섹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부활하신 예수님과 만나기 전까지 바울에게 하나님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바울에게 하나님은 엄격하고 순수하고 깨끗한 분이셨습니다. 시체나 더러운 것과 접촉하기라도 했으면 반드시 몸을 씻어야만 하는 분이셨고, 죄인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또 죽음과도 거리가 먼 분이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은 자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의 육체를 감싸 안아 살리시고 하나님 보좌 우편으로 들어 올린 것을 보았습니다.

이 순간 바울의 심정이 어떠했을 것 같습니까? 아마 경천동지할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건 뭐지?’ 하는 큰 충격에 빠졌을 것입니다. 십자가에 죽은 자를 살리신 이 하나님은 바울이 지금까지 알고 있는 하나님과는 완전히 다른 분이셨기 때문에, 바울이 지금까지 지켜왔던 신앙체계와는 완전히 다른 분이셨기 때문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인과 상종하지 않는 분인 줄 알았는데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을 보고 하나님은 죄인과 함께 하지 않는 분이 아니라 죄인과 함께 하는 분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을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 인식이 새로워진 겁니다. 기존의 하나님 인식이 깨어지고 새로운 하나님이 인식이 생긴 겁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 하나님의 참 모습이 드러난 겁니다. 하나님이 계시된 겁니다. 그래서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와 만난 사건을 ‘환상’이라고 말하지 않고 ‘계시’(apocalupsis)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한 예수를 통해 하나님 인식이 새로워지자 예수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지고, 세상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지고, 자신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졌습니다.

 

바울의 복은은 여기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를 통해 하나님을 본 것,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인식한 것에 바울의 복음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말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롬10:9) 예수를 주로 시인하는 것,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 바울 복음의 근원이고 핵심입니다.

 

이 사건 이후로 바울은 이전의 바울처럼 살 수 없었습니다. 실로 모든 것이 새로워졌기 때문에, 존재와 세계와 삶의 체계가 근원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이전의 바울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전까지는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는데 그 후부터는 예수의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됐습니다. 그 전까지는 예수를 증오했었는데 그 후부터는 예수의 종이 되어 살았습니다. 그 전까지는 예수가 걸림돌이었는데 그 후부터는 예수가 디딤돌이 됐습니다.

그야말로 한 순간에 천지가 개벽을 한 겁니다. 이것은 바울만의 경험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면 천지가 개벽을 합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든, 지금까지 어떤 삶을 살았든 상관없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살아계신 예수를 만나면 존재와 세계와 삶의 체계 전체가 근원적으로 달라집니다. 자기 삶에 의미를 부여했던 모든 것들이 달라집니다. 생명의 종류가 달라지고 생명의 차원이 달라집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을 보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중생입니다.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후부터 예수에게 자기의 운명을 걸고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이방인에게 예수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첫 번째 전도여행을 하면서 갈라디아 지방에 복음을 전했습니다. 갈라디아는 유럽에서 이주한 갈리아 족(Gaul)들이 자기들의 땅이라 하여 붙인 이름인데, 서기 25년경 로마 제국이 이 땅을 정복하여 로마의 한 주(州)에 편입시켰습니다. 갈라디아 지방에는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의 도시가 있었고, 이곳에는 일찍부터 유대인들이 이주하여 자리를 잡고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할 때 그곳의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는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받고 쫓겨나 이고니온으로 떠나야 했고(행13:45,50), 이고니온에서는 이방인과 유대인과 관리들까지 합세하여 돌로 치려고 달려들어서 화급히 루스드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행14:5-6). 그런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 살던 유대인들이 루스드라까지 쫓아와서 의식을 잃을 정도로 바울을 때리고, 성 밖으로 끌고 가 죽도록 내버리기까지 했습니다(행14:19). 바울은 이토록 엄청난 핍박과 박해를 받아가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정말 목숨을 바치는 순교의 각오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갈라디아를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루살렘에서 어떤 자들이 왔습니다. 저들은 정통 유대인으로서 예수를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믿는 예수를 저들도 믿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갈라디아에 오자말자 작정한 듯 바울의 가르침을 비판했습니다. 바울이 여러분에게 전한 복음은 온전한 복음이 아닙니다, 바울은 여러분이 예수를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고 하는데 그것은 진실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예수를 믿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유인들처럼 할례도 받고 절기도 지키고 모세 율법도 지켜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아브라함의 후손이 됩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됩니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바울은 여러분들이 예수만 믿으면 율법으로부터도 자유하고 할례와 유대 절기로부터도 자유하게 된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예수를 쉽게 믿을 수 있게 하려는 속임수에 불과합니다, 사람들의 귀를 즐겁게 하는 싸구려 복음에 불과합니다, 라고 원색적으로 비판했습니다.

 

갈라디아교회 성도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바울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지 저들의 가르침을 따라야 하는지 혼돈에 빠졌습니다. 바울의 복음을 믿는 믿음에서 흔들렸습니다. 그러다가 점차 바울이 전한 복음을 버리고 저들의 가르침을 따르기 시작했습니다(1:6). 바울은 당혹스러웠습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 서두에 자기 심정을 가감 없이 토로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갈1:6). 여기서 ‘이상히 여긴다’는 말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말입니다. 3장에서는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는 탄식으로 표현했습니다.

누가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이때의 일을 아주 짧게 기록했습니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받지 못하리라 하니 바울 빛 바나바와 그들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15:1-2)

 

사실 바울이나 바울을 비난한 자들이나 똑같이 예수를 믿고 따랐습니다. 그런데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달랐습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충분하다고 말했고, 저들은 그 믿음 위에 율법과 할례가 더해져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으면 되지 굳이 유대적 질서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말했고, 저들은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유대적 질서 속으로까지 들어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닥친 위기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교회 역사에서 벌어진 최초의 신학적 대립이요 갈등이었습니다. 예수의 복음을 이방인에게 전파하는 과정에서 불거진 최초의 대립이요 갈등이었습니다.

이 대립과 갈등의 본질은 사실 믿음이냐 율법이냐가 아닙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을 보면 ‘믿음이냐 율법이냐’처럼 보이고, ‘예수 믿는 이방인에게 할례를 받게 할 것이냐 말 것이냐’처럼 보이기 때문에 대부분 그렇게 생각하는데 사실은 그것이 문제의 본질이 아닙니다. 문제의 본질은 훨씬 깊은데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는 문제도 현실적으로 큰 장애물이었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사도들과 장로들을 만나 자세히 얘기하고는 공적인 해결을 요청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요청을 받아들여 회의를 소집했습니다. 당연히 갑론을박이 오고갔습니다. 바리새파 출신인 어느 형제가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것을 비롯해서 열띤 논쟁이 오갔습니다(행15:5-6).

 

그 후에 베드로가 자리에서 일어나 이렇게 말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께서는 이방인들도 이 복된 메시지를 듣고 받아들이기 원하신다는 것을 일찍부터 아주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것도 전해들은 말이 아니라, 바로 내가 전하는 말을 직접 듣고 받아들이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어떤 겉치레에도 속지 않으시고 언제나 사람의 생각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과 똑같은 성령을 그들에게도 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대하신 것처럼 이방인들을 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을 믿고 신뢰하는 이방인들에게 역사하셔서, 먼저 그들이 누구인지 깨닫게 하시고 그 중심에서부터 시작해서 그들의 삶을 깨끗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보다 더한 하나님이 되어서 우리 조상을 짓누르고 우리까지 짓누른 규정들을 새로 믿은 이 사람들에게 지우려는 것입니까? 주 예수께서 놀랍고도 너그러운 은혜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구원해 주신 것처럼, 우리 민족이 아닌 이방인들도 그렇게 구원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가 믿지 않습니까?”(행15:7-11.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베드로가 말을 끝내자 한동안 침묵이 흘렀습니다.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때 바나바와 바울이 조용히 일어나, 자기들의 사역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 행하신 기적과 이적을 사실대로 보고했습니다. 그 후 야고보는 선지자들의 말까지 인용하면서 의견을 제시했습니다.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행15:19-21)

 

이렇게 해서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자기가 전한 메시지가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 자기의 신학이 옳다는 것을 공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현실적인 갈등과 대립은 해소되었지만 문제의 본질은 훨씬 깊은데 있다는 걸 알았기 때문에 좀 더 분명하게, 또 심도 있게 설명할 필요를 느꼈습니다. 흔히 “악마는 디테일에 있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악마는 작은 부분에 숨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작은 부분의 차이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생깁니다. 명품과 유사품의 차이도 사실 큰 데 있지 않아요. 아주 작은 부분, 아주 미세한 부분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큰 부분에서 차이가 없다 해도 아주 작은 부분, 아주 미세한 부분의 차이에서 본질적인 차이가 생깁니다. 바울도 악마가 디테일에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디테일한 부분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편지를 쓰기로 마음을 먹고 깊이 묵상을 한 끝에 편지를 쓴 겁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너희들은 너희들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라, 나는 내가 알고 있는 것을 말하겠다, 우리의 차이는 소소한 차이에 불과하다, 그러면서 자기의 길을 갈 수도 있습니다. 우리나 너희나 예수를 믿는 것은 똑같으니까 부분적으로 다른 것이야 적당히 묻어두자, 하고 넘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를 믿는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받게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율법을 지키게 할 것이냐 말 것이냐,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게 할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을 사소한 문제로 생각하고 그냥 넘어가지 않았어요.

바울은 이 문제를 복음의 본질이 걸린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유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복음은 예수의 복음과 비슷한 복음이 아니라 ‘다른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1:6,7,8,9). 하나님에게서 나온 복음이 아니라 사람에게서 나온 복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심지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 할지라도 하나님께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1:8).

 

여러분, 좀 심하다 싶지요? 그래도 똑같이 예수를 믿는데, 저들도 나름대로 진정성을 가지고 갈라디아 지방까지 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는데 저주까지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저주까지 하는 것은 너무 독선적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좀 들지요? 예, 그런 측면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그렇게까지 하는 것은 단지 화를 참지 못해서이거나 독선적이라서가 아닙니다. 저들의 가르침이 결국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헛되게 하기 때문입니다(갈2:21). 은혜로 말미암는 믿음의 세계를 송두리째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시작한 일을 육체로 마치게 하기 때문입니다(갈3:2-3).

 

예, 바울의 판단이 옳았습니다. 이 문제는 대충 넘어가도 되는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이 평생 이 문제와 씨름했을 만큼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더욱이 이 문제는 초대교회만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이 문제는 이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모양만 좀 다를 뿐이지 계속되고 있는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지금도 믿음이냐 행위냐, 은혜냐 율법이냐,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로 뜨겁게 논쟁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빠진 문제에 똑같이 빠져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지금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 은혜와 율법 사이의 관계에서 많은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와 로마서를 통해 충분히 이야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문제의 본질이 무엇인지조차 이해하지 못한 채 다른 복음을 좇고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갈라디아서를 설교하려고 마음먹은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한국교회가 믿음과 행위 사이의 관계, 은혜와 율법 사이의 관계에서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의 핵심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많은 성도들이 다른 복음을 좇고 있기 때문에 다시금 새롭게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한국교회가 어떤 함정에 빠져 있는지를 제대로 알고, 함정에서 빠져나와 진정한 복음의 세계로 나아가기 위해서입니다.

아무쪼록 우리의 선입견을 내려놓고 겸허한 마음으로 갈라디아서 속으로 들어가 봅시다. 바울이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갈라디아 교회에 밀어닥친 복음의 위기가 무엇인지를 살펴가면서 바울의 말에 귀기울여봅시다. 아무쪼록 갈라디아서 공부를 통해 참된 복음의 세계로 한 걸음 더 들어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