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십자가가 없으면 부활도 영광도 영생도 없다.
그것이 기독교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교회들은 카톨릭 시절부터 부활절 전 한 주간을 고난 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부활절 전 40일 동안을 사순절로 하여 지키기도 한다.
절기라는 것이 도움도 되지만, 폐해가 더 많아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에 분명히 정한 절기 외에는 다 폐하여 버렸다.
바울이 유대교의 절기를 다 폐한 것처럼 종교개혁자들은 카톨릭의 절기들을 다 폐하였다.
(골 2:16-23)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초하루나 안식일을 이유로 누구든지 너희를 비판하지 못하게 하라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
너희가 세상의 초등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규례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한때 쓰이고는 없어지리라)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을 따르느냐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는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따르는 것을 금하는 데는 조금도 유익이 없느니라'
그런데 종교개혁이 이루어진지 5백년이 지난 지금 교회는 카톨릭화 되어 가고 있다.
절기와 외형에 있어서 그 전철을 그대로 답습해 가고 있다.
그로 인하여 종교가 형식화 되고 그에 따른 율법화와 세속화가 따르기 마련이다.
십자가는 기독교의 핵심이고 중심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인의 영원한 현재이다.
한 주간을, 40일을, 뭐라 하여 생각하고 마는 것이 결코 될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라면, 거듭나는 순간부터 죽는 그 순간까지
우리 영혼과 삶의 중심에 십자가가 있어야 한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내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회심한 사건을 말한다.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로 인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렸음을 믿고 눈물로 회개하고,
그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영접한 사건을 말한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제 그 후로는 내가 주인이 아니고,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주인으로 사는 삶이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제 내가 죽는 그 순간까지 육체 가운데 살지만, 이제는 그 옛날의 내가 아니다.
나를 믿고 내 가진 것을 믿고 내 혈육을 믿고 사는 내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죽는 날까지 그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그런데 그 아들이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십자가에서 버리셨다.
갈라디아서 2:20은 십자가가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인 것을 밝혀 주는 말씀이다.
십자가에서 주님과 함께 죽은 나의 옛사람이 육체를 타고 기승을 부릴려고 할 때마다.
거듭난 내 영혼이 이 말씀을 묵상하며 성령을 힘입어 싸워 이겨야 하는 것이다.
2. 십자가는 우리 중심이면서 우리의 자랑이 되어야 한다.
교회 다닌다고 하면서도 십자가를 부끄러워하고 거리끼고 어리석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십자가를 전하는 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었고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다.
(고전1:22-24)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라면 맞겠지요.
또, 로마 제국의 황제이신 그리스도, 교황이신 그리스도라면 맞겠지요.
그러면 자랑스럽게 맞이했을 것이고, 늦을세라 앞다퉈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도들은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했고 그 때문에 순교를 당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인권, 재산권을 다 몰수당하고 순교하면서도,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고 전하고 자랑하였다.
그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능력이요 지혜인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누가 알게 했나요? 사도들이 전한 복음을 듣고, 성령이 역사하셨기 때문이다.
영이 우리 안에 오시기 전에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을 수가 없지요.
그래서 영이 없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십자가를 화려하게 장식해서 부담 없이 믿을려고 한다.
그 십자가에는 피도 없고 죽음도 없고, 오직 넘치는 축복과 영광이 있을 뿐이다.
어떻게든 그리스도를 세상의 권력과 부를 쥔 황제로 만들고 교황으로 만들어 믿고자 한다.
세상의 지혜와 능력으로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라는 개념은 성립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곳에서는 교회와 성직이, 부와 권력의 상징이 되고, 성전도, 솔로몬 성전과 같고
베드로 성전과 같이 화려하고 금빛 찬란한 건물이 되어야 한다.
그 모퉁이 돌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아니고 세상의 부와 권력으로 만들어진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이
그들의 이성과 능력으로는 이해가 될 수 없고, 어리석고 거리끼고 걸리는 돌이 될 뿐이다.
그래서 적당히 죽이고 약화시키고, 다른 것을 섞어서 십자가를 변형시키고 헛되게 하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인 것을 믿으시기 바란다.
그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충족이 된다.
죄에 대해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와, 죄인들을 구원코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동시에 충족되는 곳이 십자가이고, 동시에 실현되는 사건이 십자가 사건이다.
피 흘림이 없이는 죄사함이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이고 법도이다.
그것을 구약 4천년 동안 피제사 방법을 통하여 인식시키고 또 인식시키셨다.
죄는 사망이 그 형벌이다.
죄지은 사람이 죽을 수가 없어서 짐승 위에 안수하고 그 피로 죄가 속량되었다.
우리 주님은 때가 차매 여인에게서 나시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유월절 어린 양으로 오셨다.
인간의 모든 죄를 지셔야 했기에 그 제물은 하나님이셔야 했고,
피를 흘리고 사망을 해야 했기에, 그 제물은 사람이셔야 했다.
죄를 속해야 했기에, 그 제물은 죄가 없어야 했고,
그래서 처녀의 몸에서 성령으로 잉태하여 인간의 몸으로 오셔야 했다.
그분은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 성자 하나님이셨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셨다.
그분은 영원한 말씀 하나님이셨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
그 말씀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셨다.
(눅 22:19-20) '또 떡을 가져 감사 기도 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저녁 먹은 후에 잔도 그와 같이 하여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니 곧 너희를 위하여 붓는 것이라'
그분은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 유월절 제물이 되어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셨다.
사망을 친히 맛보시고 그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그분의 인성도 영광스런 보좌에 오르셨다.
그분이 바로 우리의 그리스도이시요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이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게 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고, 은혜가 왕노릇하는 영역에 속하게 되었고,
환난 중에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는 신분이 되었다.
그래서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지혜이고 능력이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것이다(고전1:18).
이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인 십자가를 어찌 유대인과 헬라인들이 알 수 있겠는가?
어찌 당시 종교권력과 부를 걸머쥔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하수인이 되고 악인들로 쓰임을 받았다.
비극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현대에도 교회 안에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이 있고,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있다.
그 무리 가운데 속하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양들과 염소들이, 알곡과 가라지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는 곳이 교회이다.
그리스도가 못 박힌 십자가가 중심에 있는 사람들과 세상이 중심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목자들 가운데도 참 목자들과 거짓 목자들이 있다.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면서,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는 목자들과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는 목자들이 있는 것이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1-2)
참 목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다만 성도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한다.
그러나 거짓 목자들은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여
성도들의 믿음이 다만 사람의 지혜에 있게 하는 사람들이다.
영이 없는 같은 성도들은 좋아하겠지요.
그리고 한 묶음이 되어 지옥으로 가고 거기서 영원한 형벌 가운데 영생을 살겠지요.
3. 십자가로 인하여 세상과 내가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한다.
(갈6: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십자가의 의미를 알았다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어야 한다.
그러한 사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산다.
또한 내가 세상을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삶을 살아간다.
우리 주님을 본받아 나 역시 내게 지워진 내 십자가를 지고 날마다 주님을 따라가는 삶을 산다.
그래야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다고 하셨다. 그 십자가 끝에 영광이 있다.
(눅9:23)'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왜 자기 십자가를 날마다 지지 못하느냐?
이유는 간단하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은 것을 알고 여기고 내려 놓으면 되는데 아까워 내려 놓지를 못한다.
우리의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죽어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않기 위함이다.
우리는 이미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롬6:6-7).
이제 내게 지워준 내 십자가는 내가 날마다 지고 가야 한다.
그만큼 우리는 죄와 싸워 이기고 주님을 닮아가며, 가나안 기업에 그만큼 다가서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살아난 우리가 해야 할 일을 로마서는 말씀한다.
(롬6:10-14) '그가 죽으심은 죄에 대하여 단번에 죽으심이요, 그가 살아 계심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심이니,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이렇게 매일 살도록 힘쓰는 것이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고,
육체를 위해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해 심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고 함께 산 우리의 신분을 확실히 알고 여기는 것이 중요하다.
모르면 당하는 것이고, 여기지 않으면 속아 넘어가게 돼 있다.
왜, 모르느냐? 성경을 읽지 않고 성경을 듣지 않고 귀하게 여기지 않고 버려두기 때문이다.
(갈6:7-9)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사람은 무엇으로 심든지 그 열매를 거두게 되어 있다.
우선 좋은 것을 취하지만 그것이 미래의 열매를 위해 심는 것이다.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신다.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한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은 육체를 위해서만 사는 사람들이 있다.
내 중심에 있는 것이 십자가인지 세상인지
내 자랑하는 것이 십자가인지 세상인지 보면 알 수 있다.
성령을 위해 심는 일을 소홀히 하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들은 썩어질 것을 거둘 날이 온다.
이 땅에서도 그의 종말이 그러할 것이고, 더군다나 그의 영원한 삶이 거둘 열매이다.
오로지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된다는 말씀을 새길 필요가 있다.
성령을 위해 심는 사람들은 마음과 뜻을 다해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은 이를 위해 자기에게 그토록 유익했던 것들을 배설물처럼 내려 놓았다.
바울은 당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정치적 특권층의 사람이었고,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자랑스런 바리새인의 종교적 특권층이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 이 특권을 통해 누릴 것이 많았다.
그래서 이 특권을 위협하는 예수쟁이들을 잡아 없애기 위해 특심을 부렸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의 사건과 그 의미를 알고서는
그에게 그렇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고 버렸다.
예수를 핍박하고 훼방하던 자가 그를 증거하는 일꾼이 되었다.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딤전1:12-13).
회심은 이러한 것이다. 내게 유익하던 것이 해로 여겨지고, 배설물로 여겨지는 것.
그 대신에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하는 것이다.
아직도 세상에서 영광스럽게 될려고 하고 세상에 있는 것들을 얻을려고 하는 사람들.
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이라 한다.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들이다.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될 것이다.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3:18-19)
그것을 언제 아느냐? 모래 위에 쌓은 성이 무너지는 순간이요, 마지막 날 심판대에서이다.
그리스도인은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자들이다. 이 땅에 살면서도 하늘에 속한 자들이다.
하늘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예수를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 우리의 소망이 되어야 한다.
이 땅의 소유와 영광은 죽음이 닥칠 때 참으로 허망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것을 하나님처럼 붙들었던 사람들도 허망한 신세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목적, 삶의 목적이 달라져야 한다. 성령을 위해 심어야 한다.
내게 주어진 일에 충성하되, 우리의 궁극적 목적을 잊거나 잃지 않아야 한다.
언제 죽어도 부름 받아도 후회하지 않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가 우리의 중심이 되고 자랑이 되지 아니하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다.
선을 행하다가, 성령을 위해 심다가,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끝까지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둘 날이 올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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