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강대식목사

성령을 따라 행하라 (갈 5:13-17)

새벽지기1 2017. 8. 8. 06:55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책망한다.

갈 3:3은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이 말씀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꼬임에 빠져,

거기에 할례와 같은 율법의 의식 행위를 더해야 한다고 따라가는 데 대한 책망이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 생활 전반에 대한 말씀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인은 성령으로 시작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성령을 따라 행하고, 성령으로 마쳐야 하는 사람들이다.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았다면, 그는 교인일 수는 있어도,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시작도 안한 사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 바람이 임으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그러하니라”(요3:3-8)

 

여러분, 성령으로 거듭났는가?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시작을 했는가?

거듭남이란 참 믿음을 갖는 순간 인간의 마음과 본성이 변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교회 안에는 항상 두 종류의 그리스도인이 존재한다.

하나는 이름과 형식만 갖춘 그리스도인이고,

다른 하나는 신앙과 행위가 일치하는 참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을 형식적으로 예배하는 사람들과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사람,

좁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과 넓은 길을 걸어가는 이들이 있다.

 

참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이유는 거듭났기 때문이고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에 머무르는 이유는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었지만, 이름뿐인 그리스도인은 마음이 변화되지 못한 것이다.

마음의 변화가 모든 차이를 빚어낸다.

 

성경은 다양한 상징과 비유를 통해 마음의 변화를 강조한다.

(겔11:19) '내가 그들에게 한 마음을 주고 그 속에 새 영을 주며

그 몸에서 돌 같은 마음을 제거하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주어'

(겔36:26)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

(엡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의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

 

모두 표현만 다를 뿐 마음과 본성의 변화를 가리킨다.

속사람이 철저하고 획기적으로 변화되어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에 동참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는 경험”을 뜻한다.

 

거듭남은 외형이나 육체의 변화가 아닌 속사람의 변화를 의미한다.

인간의 마음에 새로운 기능이 첨가되는 것이 아니다.

내면의 성향과 본성이 전적으로 새로워지는 것이다.

 

거듭난 사람은 의지와 취향은 물론

세상과 성경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관점이 완전히 새로워진다.

 

거듭남의 시기는 사람마다 다르며 모두 똑같은 방법으로 마음이 변화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대다수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마음의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그런 변화를 일으킬 수 없고 다른 사람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거듭남은 성삼위 하나님의 사역에 속한다.

특히 성령은 성부와 성자의 뜻에 따라 중생의 역사를 일으키신다.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벧전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요5:21)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 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

(요일2:29)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3:6)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거듭남은 그리스도와의 생명적 연합에서 필연적으로 비롯하는 결과이다.

그리고 내적 거룩함(성화)의 근간이자 시초이다.

 

어떤 사람들은 거듭남에 관한 이런 정의가 지나치게 엄격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들은 거듭남과 회심을 구분하기도 한다.

성경 어디에도 거듭남을 그런 식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구절은 없다.

(요3:5)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구원의 서정을 교리적으로 논리적으로 구분하지만 한 성령의 한 역사로 보아야 한다.

거듭남과 회심의 인타발을 너무 길게 잡다 보니 둘 다가 아닌 것이 되어 버리고,

회심하여서 보면 그 전의 거듭남이라고 합리화 했던 것들이 아닌 것이다.

성경적으로도, 경험적으로도, 존 라일을 위시한 청교도들의 중생과 회심을 구분하지 아니하고

하나로 보는 견해가 맞다고 할 것이다.

중생하고서 회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회심하고서 중생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중생하였는데, 회심하지 않았다 하면, 그 중생은 가짜인 것이다.

 

우리가 구원 받았다면 경험으로 그 사실을 느끼고 알 수 있다.

거듭남은 참 그리스도인의 징표이다.

자신이 거듭났는지, 거듭나지 못했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

자아와 세상으로 향하는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하는 마음으로 변화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거듭나지 못한 것이다.

중생으로 근본적인 변화가 없는 사람은 언제고 세상에 돌아가고 만다.

 

왜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야 하는가?

인간의 본성이 죄로 부패해 있어서 인간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악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영혼의 원수를 사랑하고 우리 영혼의 친구를 배척한다.

우리는 선을 악이라 하고, 악을 선이라 하며, 죄를 지을 뿐 아니라 죄를 사랑한다.

 

우리는 온갖 죄를 씻고 죄의 권능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우리의 성향과 의도와 습관이 완전히 변화되어야 한다.

죄로 파괴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고 우리 내면을 지배하는 무질서와 혼란이 제거되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을 구원하실 때는 항상 두 가지 일을 행하신다.

첫째 칭의로 주님은 죄인의 죄를 보혈로 깨끗이 씻으시고 값없이 용서해 주신다.

둘째 거듭남이다.

주님은 죄인의 마음에 성령을 부어주셔서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신다.

 

칭의와 중생은 구원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구원의 필수 요소이다.

죄사함이 없으면 천국에 들어갈 권리나 자격이 없고

거듭남으로 마음의 변화가 없으면 설령 천국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그곳의 삶을 누릴 수 없다.

 

칭의와 중생은 서로 분리되거나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모두 거듭난 사람이고,

거듭난 사람은 모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다.

 

거듭남의 필요성을 부인하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부패했음을 알지 못하는 소치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 죄사함과 거듭남의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감사하자.

 

호랑이는 사슬에 묶여 있어도 여전히 호랑이이고, 뱀은 똬리를 틀고 앉았더라도 여전히 뱀이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훨씬 더 깊고 철저한 변화가 필요하다.

마음에 새로운 본성이 거해야 한다.

샘의 근원이 정화되고 뿌리가 온전해져야 한다.

거듭남은 근본적인 변화를 요구한다.

 

문제는, 이름만 그리스도인인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데 있다.

그들은 진정으로 죄를 뉘우치고 돌이켜야 한다.

거듭남은 영원한 운명을 결정짓는 중대한 사안이다.

지옥의 실재와 영원성을, 그 비참함과 고통을 말씀하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거듭남은 구원 받기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스스로 느끼고 스스로 알고

스스로 경험해야 할 문제이다. 거듭나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거듭나지 못하면 이 땅에서도 지옥같은 인생을 살다가 영원 지옥으로 간다.

거듭나면, 이 땅에서도 천국같은 인생을 살다가 영원 천국으로 간다.

그럼 거듭남의 표시는 무엇인가?

요한일서는 거듭남의 여섯 가지 징표를 말해 준다.

 

첫째, 거듭난 사람은 습관적으로 죄를 짓지 않는다.

(요일3:9)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

거듭난 사람도 얼마든지 죄를 지을 수 있다. 하지만 거듭난 사람은 진정으로 죄를 혐오한다.

거듭난 자의 가장 큰 소망은 죄를 짓지 않는 것이다.

 

둘째, 거듭난 사람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굳게 믿는다.

(요일5: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셋째, 거듭난 사람은 의를 행한다.

(요일2:29)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때로는 넘어지거나 잠깐 곁길로 치우치는 경우도 있지만

거듭난 사람은 꾸준히 하나님을 향해 한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다.

 

넷째, 거듭난 사람은 같은 신자를 사랑한다.

(요일3:14)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거듭난 사람은 그런 사람들을 한가족이자 형제로 받아들인다.

그들은 전우이자 동반자이고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다섯째, 거듭난 사람은 세상을 이긴다.

(요일5:4)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거듭난 사람은 세상 사람들의 견해를 옳고 그름의 척도로 삼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세상의 방법과 관념과 관습을 따르지 않는다.

거듭난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만 바라보며 어디를 가든지 그분을 따르기로 결심한다.

 

여섯째, 거듭난 사람은 주님이 그의 영혼을 지켜 주신다.

(요일5:18)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거듭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주의 깊게 보살핀다.

죄를 멀리할 뿐 아니라 죄를 짓게 하는 모든 유혹을 경계한다.

 

거듭난 사람들 가운데도 거듭남의 징표가 나타나는 정도에는 차이가 있다.

사도 요한은 거듭남의 징표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난 자”가 아니라고 거듭 강조한다.

즉 이 여섯 가지 징표가 있는 사람은 거듭난 사람이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거듭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거듭난 것은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 사이에는 공통된 가족의 형질이 존재하게 마련이다.

거듭난 자의 내면에는 순금임을 인정하는 확인 도장처럼 성령의 증거가 명백히 드러나야 한다.

(갈5:22-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거듭남의 표징이 없는 사람은, 자신이 심각한 위험에 처했음을 깨닫고,

무사안일주의의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복음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성경을 읽어야 한다.

또한 기도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성령의 선물을 간절히 구해야 한다.

자신이 거듭 나지 못한 죄인임을 자복하고 통회하는 심령으로 주님께 나아가야 한다.

 

거듭나기를 강청하라.

단순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라(시34:18, 요일1:8-9, 행3:19).

그런 노력을 거부한 채 현재 상태에 만족한다면 그것은 바로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는 증거이다.

 

거듭남의 징표를 지닌 사람은 해를 거듭할수록 그 징표가 더욱 뚜렷해져야 한다.

그것이 유익하고 행복한 신앙생활에 이르는 첩경이다.

그것이 진리를 대적하는 원수들을 이길 수 있는 비결이기도 하다.

 

세례 받은 사람은 모두 거듭났다는 주장을 경계해야 한다.

세례는 여러 가지 외형상의 특권을 부여하는 유익이 있다.

유형 교회의 일원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며, 생명의 떡에 쉽게 다가 갈 수 있고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한다.

 

그러나 이 특권들은 거듭남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장자로 태어났지만 장자의 권리를 누리지 못한 에서처럼

세례만 받았을 뿐 진정한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들도 많다.

 

그릇된 거듭남의 교리를 경계하라.

거듭났는데도 다른 사람이 의식하거나 관찰할 수 있는 삶의 증거가 없다는 것은

바람이 부는데도 느낄 수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안타깝게도 세례 받은 사람들 가운데 성령의 열매는 거의 없고

육신의 열매만 주렁주렁 매달고 살아가는 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은 “의에 대해 자유로운 죄의 종”(롬6:20)일 뿐이다.

 

그들은 죄의 지배를 받으며 의에 대적하는 원수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값없이 주어지는 은혜 안에서 구원을 얻었다고 고백하면서도

고의로 죄를 지으며 부끄러움을 모른 채 부도덕한 삶을 살아간다.

그들은 성령님을 근심케 하며 그리스도를 모욕하고 기독교를 불명예스럽게 한다.

 

이제까지의 논의는 19세기 청교도적 신앙을 대표하는 존 라일이 성경적으로 잘 정리한 것이다.

나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이 성령으로 시작한 것이 분명하다면,

이제 우리 남은 생애의 과제는 바로 이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이다.

끝까지 성령으로 마치는 것이다.

 

우리 영혼은 성령으로 거듭났지만, 우리 육체는 죽는 날까지 거듭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라.

성령으로 거듭난 우리 영혼은 성령을 힙입어서 성령을 따라서 육체와 싸워야 한다.

죄가 우리 육체에 왕노릇 못하게 하고 주님의 성품을 닮아 가는 것, 그것이 성화의 과정이다.

 

성령을 따라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않을 수 있다.

거듭남으로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지 않을 수 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령과 육체의 갈등이야말로 거듭남의 확실한 증거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거듭나지 못한 사람은 이런 갈등을 모르고 없기 때문이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거듭남의 징표로 주신 것들을 확실한 열매로 맺어가는 것이다.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은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갈5:22-23)

우리가 육체를 따라간다면 확실한 육체의 열매를 맺을 수 밖에 없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그래서 원수 갚는 것도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는 것이다.

(롬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이다.(갈5:24)

우리가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면, 우리는 성령으로 행해야 한다.

육체의 기회로 삼거나 육체의 열매를 맺지 말고 성령의 열매를 맺어가야 한다.

 

성령의 열매는 그 자유로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는 것이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신다.

 

오늘 내가 맺고 있는 열매를 보면서

그 열매가 육체의 열매인지, 성령의 열매인지를 보고서, 우리는 돌이켜야 한다.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고 하신다.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라고 하신다.

 

그 선택이 거듭난 사람으로서의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성령을 따라 행하는 것은, 내 육체의 지혜와 감정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고,

말씀이 명하는 바를, 성령을 힘입어, 오늘 내가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