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지성, 이성, 영성(2) - 반지성주의

새벽지기1 2017. 6. 19. 10:36


반지성주의

교회를 지배하고 있는 정서를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아마 <반지성주의>라고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에도 이런 반지성주의는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십자군 전쟁과 종교재판은 이에 대한 아주 두드러진 사건들입니다. 어떻게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할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겠다는 사람들이 폭력적으로 타종교를 말살하려고 했는지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일입니다. 아마 나름대로의 논리는 있었을 것입니다. 모슬렘들에게 빼앗긴 기독교 성지를 되찾자는 명분이 있었습니다. 이런 명분에는 단지 종교적인 것만이 아니라 오히려 정치적인 것이 훨씬 강하게 작용했습니다. 참으로 종교와 정치는 인간의 문화 중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보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가장 파괴적으로 작용하기도 합니다. 이 둘이 손잡고 나쁜 일을 하기 시작하면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가 몸으로 느끼고 있는 이라크에 대한 미국의 전쟁 준비는 바로 현대판 십자군 전쟁이 아닐까요? 대테러 전쟁이라고는 합니다만 독재자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해서 수십만명의 양민이 희생될 수도 있는 전쟁을 치르겠다는 부시의 생각은 비록 그가 매주일 열심히 교회에 나가서 예배 드리고 기도하는 대통령이라고 하드라도 반지성적 신앙인의 본보기인 것 같이 보입니다. 중세기의 십자군 전쟁을 일으킨 교황들의 신앙도 이와 마찬가지였겠지요. 지금 프랑스, 독일, 러시아는 가능한대로 이라크 전쟁을 늦추어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이라크의 무기사찰 기간을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에 반해서 미국의 부시는 당장 이라크를 요절내도록 유엔에서 결의해야 한다고, 그런 결의가 없더라도 자신들이 앞장 서서 때려부수겠다고 준비 중입니다. 반지성적인 십자군 전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종교재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세계 기독교 역사에는 진리에 대한 탐구와 순전한 선교적 열정에 못지 않게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향한 박해의 흔적이 많습니다. 수많은 물리과학자, 천문학자, 인문학자, 신학자, 또는 짚시들이 종교재판을 받고, 때에 따라서는 화형에 처해지기도 했습니다. 마틴 루터가 종교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아시죠? 갈릴레오도 그렇습니다. 수년 전에 감리교회에서는 감리교 신학대학의 두 교수를 종교재판에 회부해서 교수 면직(출교?) 처분을 내린 바 있습니다. 그 두분이 종교다원을 주장했다는 이유입니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지성을 박해하고, 스스로 반지성주의의 길을 걸었습니다.

이런 반지성주의는 성서에 대한 오해에 근거합니다. 성서를 문자적으로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일종의 기독교 패권주의적 사고방식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기독교 믿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기독교 패권주의를 강화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약간 예민한 주제를 조금 생각해보실까요? 여러분은 진화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진화론을 부정해야만 참된 신앙인이 되는 걸까요? 요즘도 소위 <창조과학회> 소속된 사람들은 터어키 지역에서 노아 방주의 잔해를 찾아보겠다면서 탐사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사람들은 노아 홍수 사건이 객관적 역사라고 믿는 것입니다. 노아 홍수와 같은 이야기는 구약성서만이 아니라 바빌론 신화에서 많이 등장합니다. 고대인들은 그런 엄청난 자연재해를 신의 징벌로 생각했습니다. 구약성서 기자들도 역시 그런 고대인들의 자연관과 사유방식 안에서 하나님을 생각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설화들을 도입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계몽주의 이후를 사는 오늘 기독교인들에게 이런 사건을 역사로 믿어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은 참된 기독교 신앙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반지성적 맹신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경우는 아니라고 해도 우리의 일상적 신앙생활에서도 역시 이런 반지성주의는 매우 교묘하게 작용함으로써 지성적인 기독교인들의 의식을 마비시키려고 합니다. 교회 안에서는 믿음은 무조건적인 것이라는 주장이 전가의 보도처럼 행사됩니다.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믿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해 되지 않는 사태를 어떻게 믿을 수 있나요? 기독교의 신앙은 말도 안 되는 것을 억지로 믿는 것이 아니라 이해되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믿음과 이해의 관계를 좀더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옳으니 그르니 너무 따지지 말고 믿어야 돼!" 이런 말을 우리는 귀가 따갑도록 듣습니다. 교회의 주류가 그런 쪽에 있으니까 그 말이 맞는 것 같기도 하고,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 이해되는 것도 아니라는 점에서 믿음이 중요하다는 주장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합니다. 물론 믿음은 아주 독특한 삶의 결단이고 체험이며, 모든 사물이나 이론들은 결국 믿음의 대상이라는 점에서 원칙적인 점에서 이 말은 맞습니다. (맞고요!). 그러나 문제는 믿음 일방주의가 우리의 지성적 활동을 불신앙적인 것으로 몰아간다는 데에 있습니다. 큰 병에 걸린 사람을 병원에 데리고 갈 생각은 않고, 안수 기도로 치료하겠다고 하면 이게 어디 정상적인 신앙입니까? 경기도 포천에 있는 <할렐루야> 기도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집니다. 정통 교회에서도 이런 일에 관심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들처럼 노골적으로 밀어붙이지 못할 뿐이지 속내에는 그런 현상에 대한 부러움이 많습니다.

한국교회의 반지성주의는 속히 제거되어야 합니다. 7,80년대에 한국교회가 반지성적인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결국 그런 토양에서 생활하던 젊은이들이 지금 장년이 되어서 교회에 발길을 끊고 있습니다. 전주에 있는 한일장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김영민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이상한 곳이 있다. 돈 몇 푼으로 인륜이 망가지고 천륜에 금이 가도록 알알이 자본주의적인 세상이지만, 수령자도 모르면서 한 주에 수 천만원이 자발적으로 헌납되는 탈자본주의적인 곳이 수두룩하다. 희한한 곳이 있다. 시간이 돈이라고 분초를 다투어 뛰어다니며 실없는 모임이라면 누구나 기피하는 세상이지만, 엿새를 꼬박 일하고도 쉴 줄 모르고 줄기차게 매주 수 백명 씩 한데 모여 별 생산성 없는 프로그램을 경건하게 진행하며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 있다. 기이한 곳이 있다. 온갖 원심력으로 찢겨진 마음을 한 데 모을 수 없는 세상이지만, 믿을 수 없이 견고한 구심력으로 뭇 사람들을 한 데 모으고, 냉소와 허탈이 만연한 세상에서 열정과 광기가 살아 번득이며, 이기적 보신주의로 살벌한 세상에서 스스로 에너지를 쏟아붓고도 득의한 듯 희희거리는 곳이 있다. 그러나 정녕 이상한 일은 그 놀라운 자산과 열정과 에너지가 여름 강물처럼 사회로 밀려들어가 정화와 연대와 정의를 위한 변혁의 힘으로 기능하지 못한 채 필경 파편처럼 분분히 날라가 버리고 만다는 것이다. ... 아 교회여, 내 순정의 샘터였던 곳이여, 돌진적 근대화의 튀기나 속물들과 단호히 결별하고 전국의 인문 세력과 견결히 연대하시라."(한겨레21, 1999.4.15.). 우리의 가슴에 비수가 꽂히는듯한 독설이지만 따지고 보면 옳습니다. 생각을 갖고 살아가려는 젊은 지성인들이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는 이 반지성주의로부터 우리가 어떻게 자유로워질 수 있단 말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