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특강

지성, 이성, 영성 (4) - 이성과 영성의 통전화로!

새벽지기1 2017. 6. 22. 07:11


이성과 영성의 통전화로!

결국 신앙의 토대는 반지성주의도 아니고, 그렇다고 지성주의도 아니라, 오히려 이성에 놓여야 한다는 말이 됩니다. 지성과 이성의 차이를 앞에서 잠시 언급했습니다만, 일반적으로는 별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서 시대의 헬라어를 보면 이 차이를 명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 12장1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너희의 드린 영적 예배니라." 여기서 "영적인 예배"라는 단어를 자세하게 보십시오. 공동번역은 "진정한 예배"라고 표현하고, 루터번역은 "vernuenftiger Gottesdienst"(이성적인 예배)라고 표현했습니다. 원래 헬라어 성경에는 "로기켄 라트레이안"인데, 로기켄의 원형인 로기코스(이 형용사는 로고스라는 명사에서 왔음)라는 헬라어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rational, 다른 하나는 spiritual입니다. 개역성경은 로기코스를 영적인 것으로, 루터는 이성적인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진정한이라는 뜻으로 번역한 공동번역은 그 중간의 입장 같군요. 아마 바울이 살던 그 시대에는 이성과 영성을 같은 것으로 본 것 같습니다. 이 말씀을 읽으면서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이성적인 것과 영적인 것은 당연히 달라야 하는데 헬라 사람들은, 그리고 그런 헬라 사람들과 똑같은 의미에서 이 단어를 사용한 바울 같은 초대 교회 지도자들은 이 두 개념을 하나로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왜 이성과 영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을까요?

직접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선 교회 안에서 영성이 어떻게 왜곡되어 있는지 짚어보도록 하겠습니다. 보통 교회 안에서 "박 집사님은 참으로 영성이 풍부하네요."라고 말할 때 보통 사람들과 다른 세계에 삶의 무게를 두고 살아간다는 것을 뜻합니다. 때로는 이런 의미가 비이성적이고 비합리적인 삶의 태도로 받아들여질 때도 있습니다. 기도원 출입이 잦고 철야기도를 많이 하고, 입만 열었다하면 온갖 신비로운 언어를 쏟아내는 사람들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좀더 극단적인 경우에는 흡사 족집게 점쟁이처럼 누구의 인생을 훨히 내다보는듯한 말을 할 때도 있습니다. 심지어는 임산부가 아들을 낳을 것인지 딸을 낳을 것인지 기도를 통해서 미리 알아낼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소위 <영발>이 센 사람들 말입니다. 이런 요소들을 영적이라고 한다면 위에서 인용한 성서구절의 로기코스의 다른 한 축이라할 이성과는 거리가 먼 것입니다. 영성이 건강한가 아닌가 하는 검증은 바로 그것이 이성적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습니다. 가장 이성적인 것이 가장 영적인 것이며, 가장 영적인 사람이 가장 이성적인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성과 영성은 바로 하나의 사실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자, 이제 우리는 바울과 초대 교회는 왜 이성과 영성을 동일한 것으로 보았는가에 대해서 답할 차례입니다. 그 대답은 의외로 간단합니다. 이성이나 영성 모두 사물과 사건의 근본에 관계되는 인간의 구성 요소라는 사실이 바로 그 대답입니다. 영적인 사람은 사물의 근본을 통찰합니다. 이성적인 사람도 역시 그와 같습니다. 예를 들어 여기 꽃이 있다고 합시다. 보는 사람마다 각각 느낌과 판단이 다릅니다. 꽃가게 하는 사람은 그 꽃의 가격을 생각하겠고, 꽃꽂이 하는 사람은 머리 속에 그런 그림이 떠오르겠죠. 식물학자는 그 꽃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지 않을까요? 시인이라면 한편의 시상이 떠오를지도 모릅니다. 모두가 제 나름대로의 경험으로 그 꽃이라는 사물을 평가합니다. 그들 중에 영적인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꽃의 근원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 꽃의 생명 작용, 그 원인과 결과, 그것의 우주론적 의미들을 파헤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는 이제 그 꽃으로 돈벌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꽃의 일부가 되어서 자신을 초월하게 됩니다. 인간의 이런 정신적 작용이 바로 영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동양종교에서는 늘 화두를 안고 수행합니다. "이게 뭐꼬?" 곰곰이 생각해보면 이 지구상의 모든 사건과 현상은 신비, 그 자체입니다. 이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지구 상에서 벌어지는 이 온갖 조화는 어디에 오며 어디로 가는 걸까요? 저는 이 자리에서 두 가지 예만 들겠습니다. 하나는 우리 주변에 지천으로 널려 있는 물입니다. 신기합니까, 아닙니까? 지구상의 물질은 우리가 아는 한 기체와 고체와 액체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중에 액체인 물이 가장 신기한 것 같습니다. 어떻게 자기 형체를 갖지 않으면서 고유한 물질일 수 있습니까? 손을 씻거나 목욕을 하면서 그 물의 느낌을 좀더 절실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무언가 다른 차원의 인식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헤르만 헷세가 쓴 <싯달타>를 보면 그가 강물을 보고 큰 깨침을 얻습니다. 지금도 인도인들은 인더스강을 신의 젖줄기처럼 생각하면서 살아갑니다. 기독교의 전통에서도 보면 세례받을 때 물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약간만 시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 이 문제는 훨씬 심각한 것으로 다가옵니다. 지구에 비해서 거의 무한대의 공간인 우주에서 물이 있는 곳은 거의 지구가 유일합니다. 아마 외계인이 지구를 방문했다고 한다면 모든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만 그중에서도 물이 제일 그렇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화학방정식으로는 H2O라는 아주 간단한 조직으로 구성된 물은 태양과 지구의 사이의 절묘한 조화로 인해서 존재하게 된 물질입니다. 지구와 똑같은 행성인 금성은 태양에 가깝게 붙어 있기 때문에, 화성은 멀기 때문에 물을 만들어낼 수 없었으며, 잠시 만들어냈다가도 유지시킬 수 없었습니다. 물이 없으면 모든 생명현상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지요?

두 번째의 예는 쌀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의 이야기 모음집의 제목이 <나락 한알 속의 우주>라고 되어 있습니다.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하던 청년들은 장일순 선생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어느 정도 감을 잡았을 것입니다. 쌀 한톨에 우주가 담겨 있습니다. 너무 흔하기 때문에 별생각 없이 밥을 먹습니다만 그 쌀은 단순히 우리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생산된 먹거리이기 전에 우주론적인 사건입니다. 탄소동화작용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물과 탄소와 태양이 놀라운 화학작용을 일으킴으로써 모든 생명의 기초인 식물의 생명을 유지시켜나갑니다. 따라서 쌀 한톨에는 1억5천만 킬로미터 가량 떨어져 있는 태양으로부터 광속 8분동안 달려온 태양 에너지가 담겨 있다는 말이 됩니다. 이런 쌀을 먹는 우리 인간도 역시 생물학적인 관점에서만 본다면 태양의 자손입니다. 그 태양 에너지가 밑바탕이 된 식물을 먹고 살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제가 여기서 말하려고 한 바는 우리 앞에 드러난 현상은 단지 우리가 체감할 수 있는 현상 자체만이 아니라 훨씬 큰 힘이 그 뒤에 놓여있다는 사실을 눈여겨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모든 현상들이 그런 대상이 됩니다. 위에서 예를 든 그런 물질 현상만이 아니라 고통과 소외, 기쁨과 희열 같은 심리적인 문제도 그렇고, 궁극적으로는 생명과 죽음이 그렇습니다. 이런 문제에 자기의 모든 삶을 집중시키는 사람들을 우리는 수행자, 수도사, 또는 도사라고 합니다. 일상을 꿰뚫고 있는 본질을 들여다 보려는 것입니다. 간혹 자신들이 깨달은 바를 몇 마디 말로 표현합니다. 삶은 대몽이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 이들의 깨달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들은 뭔가 희한한 사람들이라고, 또는 위대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외면하거나 냉소적으로 바라봅니다. 이들의 작업이 추상적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일상에 취해서 살아가는 우리보다 훨씬 현실적이고 구체적이고 정확합니다.

이런 점에서 영성과 이성은 상통합니다. 본질을 꿰뚫어본다는 점에서 이성과 영성은 같은 지평의 인간 작업입니다. 굳이 구별해본다면 이성은 좀더 분석적이며, 영성은 통시적입니다. 이성은 미시적이라고 한다면 영성은 거시적입니다. 그러나 반드시 구별될 필요는 없습니다. 사물을 가장 정확하게, 가장 구체적으로, 가장 미시적으로, 가장 분석적으로 보는 사람은 결국 영적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초월해서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사족같은 말을 덧붙인다면 여기서 초월은 이 세상과 아무 상관없이 그저 신선놀음 하듯, 뜬구름 잡듯이 자기 흥에 겨워서 살아간다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의 외면적 현상에 사로잡혀서 온갖 번뇌와 이해타산에 빠지지 않고 훨씬 본질적인 것에 모든 마음과 삶을 투자함으로써 참된 평정심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도 사람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저런 염려에 빠지지 말고 우선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고 했습니다. 부엌에서 많은 일로 분주하던 마르다에게 이르기를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한 두가지 뿐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이런 차원에서 영적인 공동체일까요?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교회의 일들이 오히려 우리의 마음을 분산시킬 때가 많지 않습니까? 그런 정도가 아니라 우리는 어쩌면 반지성적이거나, 또는 추상적인 지성주의에 빠져 있기도 합니다. 모든 사물과 역사를 가장 정확하게 파악하며 사는 사람들이 바로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성적이며 영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