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음을 회개하십시오.
옛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못 박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십시오.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죄를 회개하고 슬피 우십시오.
애통하는 자의 삶이 더욱 건강하고 거룩해질 것입니다.
한국교회의 최고령 목사이신 방지일 목사님은 새벽 두세 시에 일어나 경건의 시간을 보내십니다. 목사님은 그 시간에 말씀 앞에서 자신의 죄와 허물이 발견되면 통회의 눈물을 흘린다고 합니다. 그런데 눈물을 흘릴 때마다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낀다고 합니다. 100세가 넘으신 방 목사님이 자신의 심장이 건강한 이유는 눈물을 자주 흘렸기 때문이라는 말씀하신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과거에 암전문의 이병욱 박사님이 쓰신 <울어야 삽니다>라는 책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눈물을 많이 흘리는 사람이 건강하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 책의 내용과 방지일 목사님의 경험이 연관성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참회의 눈물을 많이 흘리는 영혼이 건강하다는 것입니다.
임병곤 시인의 ‘눈물예찬’이라는 시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눈물은 보약입니다.
눈물은 그냥 물이지만 흘리고 나면 몸에 면역력이 생기는 종합비타민입니다.
눈물은 해독제입니다.
해일처럼 밀려와 깊은 마음속을 뒤집고 우울과 절망을 몰아내는 살균수입니다.
눈물은 신비한 액체입니다.
쇳물도 못 녹이는 꽁꽁 얼어붙은 원수의 마음도 봄눈 녹듯이 녹입니다.
눈물은 하늘 씨앗입니다.
마음껏 울고 나면 웃음꽃이 피어나고 눈물을 뿌리면 기쁨을 추수합니다.
눈물은 약속입니다.
비갠 후 희망의 무지개가 피어나듯이 눈물 후 언약의 무지개가 피어납니다.
눈물은 은혜입니다.
눈물의 기도가 수증기가 되어 올라가면 은혜의 단비가 되어서 촉촉이 내립니다.
아 눈물 흘리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회개하는 애통의 눈물
회개의 눈물은 거꾸로 흐릅니다. 눈물이 땅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로 올라가 하나님께 갑니다. 하늘로 올라간 그 눈물을 하나님이 기쁨의 단비로 바꾸어주십니다. 오늘 본문은 스가랴가 장차 오실 메시야의 죽음으로 인해 그를 바라보는 모든 이들이 회개하며 슬피 울 것을 예언한 내용입니다.
10절에서 14절까지 말씀에서 ‘슬피 울 것’이라는 단어가 열여덟 번이이나 나옵니다. 이 말씀은 큰 슬픔의 눈물이 강물처럼 온 세상을 뒤덮을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이 눈물은 실패나 아쉬움 때문에 흘리는 눈물이 아닙니다. 또한 고난이나 고통 속에서 흘리는 눈물도 아닙니다. 이 눈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를 슬퍼하며 흘리는 회개의 눈물입니다. 거듭난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애통의 눈물입니다. 이 눈물은 억지로 흘릴 수 없습니다. 배우들이 감정이입해서 흘리는 눈물과도 다릅니다. 애통의 눈물은 쉽게 흘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눈물샘이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애통의 눈물은 하나님이 마음을 부어주셔야 흘릴 수 있습니다.
거듭난 영혼이 흘리는 눈물
“내가 다윗의 백성과 예루살렘에 사는 사람들 위에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부어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찔러서 상처를 입은 나를 보고 슬피 울 것이다. 마치 외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 것이며 맏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 것이다”(10절).
오늘 본문에 예언된 슬픔은 깨달음이나 각성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위로부터 부어진 마음 때문에 생기는 슬픔입니다. 성령님이 임재해서 거듭나게 되었을 때 애통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죽은 사람은 토하지 않습니다. 토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몸에 있는 불순물을 없애기 위해 토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죽어 있을 때는 애통의 눈물이 흐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이 임하시면 새사람으로 거듭나게 되고, 영혼 속에 있는 불순물을 빼내기 위해서 애통의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그렇게 죄를 씻어내는 것입니다.
애통의 눈물은 거듭나기 위해서 흘려야하는 것이 아니라 거듭난 영혼이 흘리는 눈물입니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태어난 영혼들이 흘리는 눈물이 여러분의 삶속에서 계속 흘러내리기를 바랍니다. 최근 한 CEO의 간증을 들었는데 그분에게 성령이 임하였을 때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다고 합니다. ‘슬피 울리라’는 말씀이 이 시대에도 이뤄지고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애통의 눈물은 성령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을 주셨기 때문에 흐르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죄와 의, 그리고 심판에 대해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용서가 없으면 살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영혼들이 비로소 하나님 앞에서 울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십자가를 바라보고 은혜와 용서를 구하게 됩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고, 허리를 찌른 로마 군병들을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군병들에게 명령을 내린 본디오 빌라도는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그는 정치적인 야먕을 위해서 양심을 버렸습니다. 예수님이 죄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신의 위치를 보전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사형에 쳐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도 예수님에 대한 시기와 질투 때문에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가룟 유다는 탐욕 때문에 예수님을 팔아넘겼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못 박았고, 찔렀습니다. 그런데 과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건이 그들만의 책임일까요. 만약 이 시대에 예수님이 오셨더라면 어땠을까요. 탐욕, 시기, 질투, 야망이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못 박았을 것입니다.
화가 리차드 렘브란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라는 그림을 보면 군중들과 어울리지 않는 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많은 해설가들이 화가 자신이 그곳에 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그림과 어울리지 않는 한사람을 그려 넣었다고 해설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곳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못 박은 자로 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면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생기는 이유는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대신해 예수님이 죽은 것을 알기 때문에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천국을 경험하는 영혼들
십자가 없이는 회복될 수 없습니다. 눈물 없이 십자가를 깨달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바라볼 때 가슴속에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마음이 생기고, 삶속에서 참회의 눈물이 흘러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스가랴가 장차 오실 메시아를 통해서 이뤄질 모습이라고 예언한 내용입니다.
여러분도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떠올리며 슬피 우는 체험을 하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이 눈물이 한번 흘리고 마는 눈물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이 흘러야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묵상할 때마다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거룩한 삶을 살기를 바랍니다.
“슬퍼하고 탄식하고 통곡하십시오. 여러분의 웃음을 탄식으로, 기쁨을 슬픔으로 바꾸십시오”(약 4:9).
십자가를 바라보며 통곡하며 탄식하는 영혼들이 기쁨의 능력을 회복합니다. 천국을 날마다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과 축복의 약속입니다.
외아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슬픔
십자가를 바라보면 슬피 우는 사람들의 슬픔이 얼마나 큰지를 설명하기 위해 두 가지 사례가 나옵니다.
첫 번째 사례는 외아들을 잃은 부모의 시례입니다. 10절 후반부를 다시 읽겠습니다.“마치 외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 것이며 맏아들을 마음에 두고 슬피 울듯이 슬피 울 것이다”(10절).
아마 사람이 세상에서 경험할 수 있는 슬픔 중에 가장 큰 슬픔이 외아들을 떠나보내는 슬픔일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슬피 우는 슬픔이 마치 외아들을 잃어버린 부모의 슬픔과 같다는 것입니다. 이 슬픔은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외아들을 잃은 슬픔을 비유하셨을까요. 그 해답은 하나님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할 때 하나님의 마음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가 아무런 죄도 없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장면을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겠습니까. 하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외아들을 잃는 상상할 수도 없는 슬픔을 담당하셨습니다.
지도자를 잃었을 때의 애통함
둘째, 선한 지도자를 잃었을 때의 애통함입니다. “그날에 예루살렘에서 크게 슬피 우는 소리가 마치 므깃도 골짜기에 있는 하다드림몬에서 크게 슬피 울던 소리 같을 것이다”(11절).
구약시대 남왕국 유다의 선한 왕이었던 요시아 왕이 므깃도 골짜기에서 부상을 당하고 죽었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그 골짜기에서 슬피 울었습니다. 요시아 왕은 하나님의 율법대로 나라를 개혁했던 선한 지도자였습니다. 기울어 가던 남왕국 유다를 다시 일으켜 세운 장본인이었습니다. 그런 훌륭한 지도자를 잃어버린 백성들이 통곡하는 것처럼 우리가 십자가를 바라볼 때도 그런 슬픔이 있어야합니다.
이러한 슬픔은 스가랴서의 예언대로 예루살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고 사도들이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자 통곡이 시작되었습니다. 복음을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습니다.
선교는 통곡의 역사
“그러므로 이스라엘 모든 집은 확실하게 알아 두십시오. 여러분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듣고 마음이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이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습니다”(행 2:36~37).
양들이 참 목자를 배척했다는 메시지를 들었을 때 그들의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외아들과 지도자를 잃은 슬픔처럼 그들이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수님을 한번도 본적 없는 빌립보 감옥에 있는 간수가 기도하며 찬양할 때 옥문이 열리는 기적 속에서 복음을 듣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합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할 때마다 예수님을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 통곡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통곡이 유럽, 북미, 아시아로 번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선교의 역사는 통곡의 역사입니다.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사람들은 슬피 울었습니다. 대각성 부흥이라는 것도 함께 모여 우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대부흥’이 일어났을 때에도 엄청난 통곡이 있었습니다.
이 통곡은 사람들의 의도대로 되는 통곡이 아닙니다. 통곡은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우리의 마음속에 은혜와 용서를 부어주실 때 통곡의 눈물이 흐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통곡의 눈물을 사모하십시오. 이 나라와 민족이 통곡의 눈물이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구원이 임하는 개인적 체험
십자가를 바라보며 개인적으로 통곡의 눈물을 흘리는 경험이 중요합니다. “온 땅의 각 집안이 따로따로 슬피 울 것이다. 다윗 집안이 따로 울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울며 나단 집안이 따로 울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울며 레위 집안이 따로 울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울며 시므이 집안이 따로 울고 그들의 아내들이 따로 울 것이며, 모든 남은 백성들도 각각 따로 울고 그들의 아내들도 따로 슬피 울 것이다”(12~14절).
이 구절에서 ‘따로’라는 단어가 12번이나 반복해서 나옵니다. 따로는 개별적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의 눈으로 십자가를 바라보며 성령의 임재와 애통을 경험해야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대신 울어줄 수 없습니다. 이웃집의 슬픔을 내가 대신 울어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회개의 눈물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흥미로운 것은 집안에서도 각각의 눈물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시대에는 아내의 권리는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감정조차 인정하지 않았던 시대입니다. 인구조사에도 여자들은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런 시대에 ‘아내들이 따로 울 것’이라는 표현은 굉장히 파격적입니다. 문화와 관습을 뛰어넘고, 시대를 넘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아내들의 울음을 강조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남편이나 아내도 서로의 죄에 대해서 대신 울어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은 개인적인 체험이입니다. 스스로가 눈물을 흘려야합니다. 그래야만 구원이 임하기 때문입니다.
회개하고 슬피 우십시오.
예수님이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비틀거리며 걸어가실 때 슬피 울며 통곡하는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군중들은 그 여인들의 슬피 울며 통곡하는 소리에 전혀 반응하지 않았지만 나 예수님은 슬피 우는 여인들의 울음소리에 반응해 주셨습니다.
헤롯앞에서 한마디 하지 않고, 빌라도 앞에서도 몇 마디 안하셨던 예수님이 온몸이 찢긴 상태로 십자가를 지고 가며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해서 울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마지막 설교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상에서 가상 칠언을 남기셨지만 그 말씀들은 짧은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회중을 향하여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최후의 설교는 바로 슬피 우는 여인들을 위한 말씀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죽는 이유에 대해 깨달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Passion of christ)’를 보면서 끔찍한 모습으로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흘리는 눈물이 그런 눈물에서 그치면 안 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어야했는지를 깨닫고 흘리는 눈물이 더 중요합니다.
스가랴서에 기록된 예언은 예수님의 모습을 정확하게 보여줍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며 통곡하며 슬피 우는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한대로 지금 우리가 그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십자가를 바라보며 슬피 울지 못했던 우리의 메마른 눈물을 다시 한 번 흘러내리기를 바랍니다.
내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음을 회개하고 슬피 울어야합니다. 십자가에서 옛사람을 예수님과 함께 못 박고 새사람으로 거듭나야합니다. 죄를 회개하고 슬피 우는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슬피 우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는 축복을 약속하셨습니다.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애통의 눈물을 흘리십시오. 삶이 더욱 건강하고 거룩해질 것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눈물을 잃어버렸습니다.
눈물샘이 식어버렸습니다. 마음이 멀어졌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 번 주님 앞에 은혜와 용서를 구합니다.
성령님 임하여 주시옵소서.십자가를 바라보며 살게 하여 주옵소서.
날마다 주님을 내가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고백하며
은혜와 용서를 구하는 인생 되게 하옵소서.
슬피 울리라는 약속의 말씀이 삶속에 임하게 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윤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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