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의로운 왕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왕으로, 겸손한 왕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그분을 기뻐하십시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 여러분에게 성경이 어떤 책이냐고 질문한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시겠습니까. 교회에서 예배드릴 때 읽는 책이라 하시겠습니까. 성경은 시간과 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한 해석이 들어있는 역사책입니다. 일반 역사책과는 다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주는 계시의 역사책입니다. 하나님이 스스로를 나타내 주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결코 알 수 기 때문에 성경책을 기록한 것입니다.
예언으로 이루어진 역사
성경에서 나타내고 있는 계시의 내용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모두 예언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예언과 성취구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구약에는 이천 개가 넘는 예언들이 기록되어 있는데 놀랍게도 그 예언들이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아직 한 가지 이뤄지지 않은 예언이 있는데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입니다. “내가 처음부터 장차 일어날 일들을 밝혔고 오래전에 이미 아직 이뤄지지 않은 일들을 일러 주었다. 내 뜻은 이뤄질 것이며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반드시 이루고야 만다”(사 46:10). 성경이 예언의 구조로 기록된 이유는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일을 반드시 이루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경에 나오는 모든 예언의 초점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서 나에 대해 기록된 모든 일이 마땅히 이루어져야 한다고 너희에게 말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눅 24:44). ‘율법과 선지자와 시편에서’라는 표현은 구약의 전체를 의미합니다. 구약에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다는 것에 대한 구절만 해도 이백 개가 넘습니다. 이렇게 많은 예언들이 예수님 한분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신약학자 존필드는 유월절의 음모라는 책에서 메시아가 되기 위한 예수님의 음모라는 주장을 했습니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한사람이 신약의 모든 사건들을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백 개가 넘는 예언들이 예수님의 인생에서 성취된 것을 우연의 일치라고 볼 수 있습니까. 과학자 피터스 토너는 이것을 과학적으로 인증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찾다가 한 사람의 인생에서 예언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확률을 계산했습니다. 확률적으로 여덟 개의 예언이 한사람의 인생에서 완벽하게 이뤄질 확률을 10의 17분의 좌승분의 1이라고 합니다. 10의 17분의 좌승분의 1이라는 것은 미국 텍사스주의 넓이에 2feet 높이의 동전을 쌓아 놓고 그 동전 중하나에 표시를 해준 다음 다시 동전을 섞어 표시한 동전을 집어내는 정도의 확률입니다. 이정도의 확률이 우연히 가능한 일이겠습니다. 48개의 예언이 한사람의 인생에서 우연히 일어날 확률은 20의 157의 좌승분의 1입니다. 이백 개가 넘은 예언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우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 경외심을 가지고 성경을 믿어야합니다. 성경은 일반적인 책이 아니라 예언의 역사, 구원의 역사, 계시의 역사가 담긴 신비의 책입니다. 오늘 본문은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예언입니다. “시온의 딸아, 마음껏 기뻐하여라! 예루살렘의 딸아, 소리쳐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니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9절). 스가랴 9장부터 14장까지는 성전재건이 완료되고 약 40여년이 흐른 후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성전재건은 이미 완료되었습니다. 스가랴서 8장에 나오는 환상과 격려의 말씀을 통해서 성전은 재건되었습니다. 성전이 재건되었지만 스가랴의 사명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성전재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전재건을 넘어서 하나님이 이루실 일들에 대한 예언을 스가랴를 통해 주셨습니다. 1장부터 8장까지는 환상 중심의 말씀이었다면 9장부터 14장까지는 하나님이 미래를 가르쳐주는 내용입니다. 그 예언의 중심은 장차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만왕의 왕이 오신다 “마음껏 기뻐하고 소리치라”는 말씀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만왕의 왕이 우리에게 오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만왕의 왕이신 그분이 나의 왕으로 오십니다. 여기서 만왕의 왕이 우리에게 오신다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바로 나를 구원하기 위해 그분이 친히 오시기 때문입니다.
왕을 맞이할 때는 기뻐서 즐거워하고 소리칩니다. 만왕의 왕이 오신다는 것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들은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입니다. 자신이 왕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는 왕이 필요 없습니다. 여러분, 만왕의 왕이 나의 왕으로 오시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성경은 만왕의 왕이 오신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 기록된 책입니다. 성경은 역사의 진정한 왕이 누구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태초에 인간을 만드시고 에덴동산에 그들을 두었을 때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나라를 구성하는 3대 조건은 영토, 국민, 주권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나라에 대입해 보면 에덴동산이 하나님 나라의 영토이고, 국민은 아담과 하와, 주권은 하나님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주권을 맡기셨습니다. 대리인에게는 최종적인 주권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왕인 에덴동산을 꿈꿨는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면서 자신들이 왕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왕이 되시는 것을 거절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왕인 민족을 만들기 위해 하나님이 선택하신 민족입니다. 에덴동산 이후 하나님이 왕인 나라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담과 하와처럼 하나님이 왕 되심을 거절했습니다.
기뻐하고 노래해야하는 이유
“그들이 사무엘에게 말했습니다. ‘이제 당신은 늙었고 당신 아들들은 당신이 행한 길을 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에게 왕을 세워 주셔서 다른 모든 나라처럼 왕이 우리를 다스리게 해 주십시오.’ 왕을 세워 다스리게 해 달라는 말을 들은 사무엘이 마음이 언짢아 여호와께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백성들이 네게 하는 말을 다 들어주어라. 그들이 너를 버린 것이 아니라 나를 버려 내가 그들의 왕인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삼상 8:5~7).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무엘에게 다른 나라들처럼 왕을 세워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은 직접 나라를 다스리기를 원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절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인간 왕의 한계를 체험해보라고 왕정제도를 허락하셨습니다. 그렇게 세워진 왕이 사울왕입니다. 이스라엘이 실패한 이유는 하나님의 왕 되심을 거절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역사의 마지막에 진정한 왕이 오신다고 예언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진정한 왕은 바로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왕으로 오시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왕 되심을 거부했지만 하나님은 역사 속에서 왕 되심을 나타내셨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 대로 우리가 소리치고 기뻐하고 노래해야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오셔서 왕이 되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예언
9절 말씀은 1절에서 8절까지의 역사적 상황을 배경으로 주어진 말씀입니다. 9장 1절에서 8절까지의 말씀은 스가랴시대 이백년 후에 일어난 사건들을 예언한 것입니다. 스가랴 시대 이백년 후에 그리스제국의 알렉산더 왕이 북쪽으로는 시리아, 남쪽으로는 애굽, 동쪽으로는 터키와 소아시아까지의 지역을 점령합니다. 스가랴서 9장 1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보면 이백년 후에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예언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마치 후대의 사람들이 역사를 기록한 것처럼 이백년 전에 주어진 예언의 말씀이 장차 일어날 일들을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9장 1,2절에 나오는 다메섹, 하드락, 하맛 등은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지역입니다. 알렉산더 왕은 시리아 지역에 있는 도시들을 점령하고 애굽을 목표로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지중해 동부 연안으로 남하하기 시작하는데 그쪽 지역에 페니키아라는 나라에 두로와 시돈이라는 지역이 있었습니다. 두로와 시돈은 부자도시였습니다. 또한 난공불락의 강력한 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성은 앗수르와 바벨론 시대에도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이 성은 해변으로부터 2.5km 떨어진 섬에 만들었는데 얼마나 부유했는지 순금이 거리에 진흙처럼 쌓여있던 도시였습니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도시로써 엄청난 부를 자랑하던 이성이 알렉산더 왕에 의해 무너졌습니다.
이방 민족들을 심판
“주께서 그가 가진 것을 빼앗고 쫓아내시며 바다에서 떨치던 그의 힘을 무너뜨리시고 그를 불로 삼키실 것이다”(4절).하나님은 두로의 영화와 교만을 알렉산더 왕을 통해서 무너뜨렸습니다. 페니키아의 두로가 무너지자 그 아래에 있는 블레셋의 도시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아스글론이 그것을 보며 두려워할 것이고 가사도 몹시 무서워할 것이며 에그론도 바라던 것을 잃고 무서워할 것이다. 가사에서 왕이 끊길 것이요, 아스글론에는 사람이 살지 않을 것이다”(5절).
블레셋의 도시들은 알렉산더 왕이 오기도 전에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왜냐하면 앗수르와 바벨론의 엄청난 공격에도 끄떡없던 두로가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알렉산더의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알렉산더 왕이 온다는 소식은 그들에게 죽음을 의미했고, 공포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알렉산더 왕을 사용하셨습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약속의 땅에 있는 이방 민족들을 하나님이 심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알렉산더 왕을 심판의 도구로만 사용하신 것이 아닙니다. 알렉산더 왕은 지중해 연안 팔레스타인 일대를 정복하면서 헬레니즘 문화를 가져오고 헬라어를 공용어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이 헬라어로 번역되었고 예수님이 오셨을 때 헬라어로 복음이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알렉산더 왕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도구였지만 당시 사람들에게 공포와 두려움을 주었고 잔인한 무력으로 세상을 정복했던 왕입니다. 그는 33세에 바벨론에서 갑자기 죽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왕
알렉산더 왕의 정복 루트가 이백년 전에 기록된 스가랴서에서 예언 되었습니다. 알렉산더가 북쪽 시라아를 통해서 페니키아를 거쳐서 블레셋으로 남하하는 동안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이 무너지지 않은 이유를 쉽게 항복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예루살렘 주변이 쑥대밭이 되고 알렉산더 왕이 점령한 도시들을 잔혹하게 다룬 것을 보면 예루살렘이 무사하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입니다.
“적이 오지 못하도록 막기 위해 내가 내 집을 둘러 진을 칠 것이다. 내가 내 눈으로 똑똑히 지키고 있으니 억압하는 사람이 다시는 그곳으로 침입하지 못할 것이다”(8절). 예루살렘이 무사한 이유는 하나님이 보호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스가랴서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불성벽이 되어서 눈동자처럼 지켜주실 것이라는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말씀하신 일들이 역사에서 그대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시온의 딸아, 마음껏 기뻐하여라! 예루살렘의 딸아, 소리쳐라! 보아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는 분이다. 그는 겸손하셔서 나귀를 타시니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9절). 소리쳐 기뻐하며 왕이 오시는 것을 맞이해야합니다. 우리가 왕을 기뻐하며 맞이해야 하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그분은 의로운 왕이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왕권을 가지면 끝까지 의롭게 통치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절대적 권한이 부여되면 부패한다는 것을 우리는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왕정시대가 오래가지 못하는 이유도 이러한 이유입니다. 의로운 왕은 알렉산더처럼 자신의 야망을 충족시키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하는 왕입니다. 우리에게 오시는 왕은 군림하거나 정복하는 왕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함으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시는 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뻐해야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둘째, 그분은 겸손한 왕이기 때문입니다. 그 왕은 어린 새끼 나귀를 타고 오신다고 했습니다. 이 예언은 오백년 후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 정확하게 성취되었습니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 때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걸어 다니던 예수님이 무엇 때문에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가셨을까요. 여기에는 놀라운 비밀이 숨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전까지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고 했지만 피하셨습니다. 그러던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면서 나귀를 타셨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목했습니다.
이때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린 후였기 때문에 유대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결심하고 계획을 세우던 위험한 때였습니다. 이러한 때에 예수님은 자신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노출시켰습니다. 정상적인 생각이라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숨어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당당하게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하며 왕으로 오신다는 예언을 성취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겸손하셔서 많은 사람들이 환호성을 외칠 때 그들의 환호를 즐거워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가신 이유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가셨습니다.
날마다 기뻐하십시오
셋째, 그분은 평화의 왕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에브라임에 있는 전차를 없애고 예루살렘에 있는 말을 없애고 전쟁용 활도 부러뜨릴 것이다. 그가 다른 민족들에게 평화를 말하고 그가 바다에서 바다까지 다스리며 유프라테스 강에서 땅 끝까지 다스릴 것이다”(10절). 우리는 예수님이 다시 오실 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이세상의 통치자들은 무기를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예수님이 다시 오시면 평화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국방력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방력으로 생긴 평화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결국 사람이 만든 무기에 의해 망하게 될 것입니다. 전쟁이 멈추는 날은 과연 언제 올까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한 그분이 다시 올 때에 비로소 평화가 올 것입니다. 10절의 예언은 아직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9절과 10절 사이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땅에 예수님이 왕으로 오심을 기뻐하고 계십니까. 그분은 살아계신 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다시 맞이하게 되는 그 날까지 날마다 그분을 나의 왕, 가정의 왕, 나라와 민족의 왕으로 모셔야합니다. 예수님이 우리 곁에 다시 오실 때 이 땅에 완전한 평화가 임하고, 이 세상의 모든 무기가 사라질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기뻐하지 않은 사람은 예수님이 다시 오셔도 기뻐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처음 오셨을 때 기뻐하고 소리쳐 즐거워했던 사람들은 예수님이 평화의 왕으로 다시 오시는 그날을 사모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을 기뻐하십시오. 마음껏 기뻐하십시오. 의로운 왕으로, 구원을 베푸시는 왕으로, 겸손한 왕으로, 구약의 모든 예언을 이루기 위해 오시는 그분을 기뻐하십시오.
기도합시다.
이천년 전에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왕이신 것을 고백합니다. 그분을 기뻐합니다.
다시 오셔서 진정한 평화를 이루실 것을 기대하며
날마다 주님이 왕 되심을 인정하는 저희들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일러스트 윤종은 janehom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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