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해지기 시작하면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스스로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리는 않도록, 이 민족이 교만해지지 않도록 간구해야 합니다. 겸손한 마음으로 귀한 일에 쓰임 받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시고, 다시 선택해주시고, 다시 손을 붙잡아 주시고, 다시 사명을 주면서 하나님 나라의 백성들을 회복시킵니다. 회복시켜 주시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필요합니다.
일으켜 세우려는 ‘기적’과 ‘환성’
여러분,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인격적인 결단이 필요한데 그 결단이 바로 회개입니다.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께 돌아가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회복될 수 있는 길이 있다는 것을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하나님 열어 주신 회복의 길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부족한 우리를 위해서 하나님은 때때로 기적과 환상을 보여 주십니다.
하나님은 낙심하고 절망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서 스가랴를 통해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스가랴를 통해 보여준 그 환상은 초월적이고 신비했습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 나타난 기적과 초월, 신비를 받아들이지 않거나 믿지 않으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성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신이 판단에 기준에 의해 받아들일 수 있는 것들만 받아들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자신의 이성과 경험으로 하나님의 일을 판단하려는 것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현실세계를 무시하고 신비만을 추구하려는 것은 잘못된 것이지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제한하는 것은 이 보다 더 잘못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포로에서 귀환해 성전을 재건해 보려고 했지만 실패하고, 16년 동안이나 성전을 방치해 두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의와 좌절에 빠져있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일으키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그들은 믿음조차 고갈되고 없었습니다. 그들에게 용기를 불어넣고 새로운 믿음이 생기게 하기 위해서는 환상이 필요했습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 ‘심판의 약속’
여러분, 인생 가운데 한 단번이라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기적이나 환상을 본 사람은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기적과 환상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만 하면 하나님은 새로운 길을 열어주십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이 스가랴를 통해 보여주신 여덟 개의 환상 가운데 두 번째 환상입니다. 두 번째 환상의 내용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무너뜨린 주변 나라들을 하나님께서 심판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첫 번째 환상에서는 하나님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척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셨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이 사랑하는 백성들을 무너뜨리고 괴롭힌 주변 열국들에게 몹시 화가 나있다는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말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첫 번째 환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마음이 그대로 실행되는 것이 바로 두 번째와 세 번째 환상입니다. 여덟 가지 환상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네 개의 ‘뿔’과 네 명의 ‘대장장이’ 스가랴가 눈을 들어보니 네 개의 뿔이 있었습니다. 어떤 동물인지 기록되어 있지 않는 것은 뿔만 보여줘도 충분히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네 명의 대장장이들이 나옵니다. 스가랴가 “이것들은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 하나님은 “유다와 예루살렘과 이스라엘을 무너뜨린 주변의 대적들이다”라고 분명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또 “대장장이는 누구입니까?”라고 질문했을 때에는 “뿔들을 꺾어버릴 하나님의 종들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스가랴의 환상이 보여주는 의미가 어려울 것 같지만 환상에 대한 해설이 있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약 해설이 없었다면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의 견해를 밝혔을 것입니다. 스가랴가 본 환상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네 개의 뿔들을 네 명의 대장장이가 부셔 버린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뿔은 힘과 권세를 의미합니다. 힘과 권세가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백성들에게 힘과 권세를 주셔서 쓰임 받을 수 있도록 한다’는 긍정적인 의미로도 사용이 됐습니다. 힘과 권세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용되는가가 중요합니다. 힘과 권세를 하나님을 위해서 사용하는지 혹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사용하는지가 문제입니다.
‘뿔을 들어 올렸다’의 의미
스가랴의 환상에 나오는 뿔들은 어떤 뿔들입니까. 21절 전반부에 보면 “이 뿔들은 유다를 흩어지게 해서 그 백성 누구도 자기의 머리를 들지 못하게 만든 나라들이다” 19절에서는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흩어 버린 뿔들이다”라고 했습니다. 역사적으로 남유다와 북 이스라엘은 앗시리아, 이집트,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등의 민족들로부터 멸망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바벨론, 메데, 페르시아, 그리스, 로마를 스가랴의 환상에 나온 뿔이라고 해석했습니다. 좁은 의미에서 보면 이 민족들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멸망시킨 뿔이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면 모든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세력들을 뿔이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21절 후반부에 보면 “뿔을 들어 올려 유다를 흩어지게 하고 유다 땅을 짓밟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뿔을 들어 올렸다’는 표현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힘과 권세를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교만함으로 악용하고 남용하고 탐욕스럽게 사용했다는 표현을 ‘뿔을 들어올렸다’라고 표현합니다.
“내가 거만한 사람들에게는 ‘바보처럼 굴지 말라’고 했고 악인들에게는 ‘뿔을 들지 말라.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고 뻣뻣한 목으로 말하지 말라’고 했다. 왜냐하면 높이는 일이 동쪽이나 서쪽이나 남쪽에서 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께서 누구는 낮추시고 누구는 높이시는 것입니다”(시 75:4~7).
여러분, 교만한 바보는 아무도 못 고칩니다. 교만하게 살다가 하나님이 치시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뿔이 얼마나 단단합니까. 그 뿔을 꺾기 위해서 얼마나 강한 망치가 있어야겠습니까. 하나님이 뿔을 깨뜨릴 때,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교만의 뿔이 꺾일 때는 매우 고통스럽습니다.
교만의 뿔 꺾는 대장장이
여러분, 쓰임 받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하나는 영광스럽게 쓰임 받는 사람이고, 또 다른 하나는 심판의 도구로 쓰임 받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목적대로 아름답고 선한 일에 쓰임 받는 인생과, 하나님이 악한 자를 심판하실 때 쓰는 인생이 있습니다. 여러분, 악한 자를 심판할 때 쓰임 받는 악한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선한 일과 기쁜 일, 축복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열방을 심판하는데 도구로 사용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계획보다 훨씬 악하고 고통스럽게 벌을 주었습니다.“나는 내 백성에게 화를 조금 냈는데 다른 여러 나라들은 내 백성에게 내가 벌주는 것보다 더 큰 고통을 주었다”(15절).하나님의 계획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벌을 주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만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뿔을 들어 올린 교만 때문에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것보다 훨씬 더 악하게 백성들을 대했습니다.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서를 보면 주변 나라에 대한 예언이 많이 나오는데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공통점은 하나님은 교만의 뿔을 반드시 꺾는 다는 것입니다.
대표적인 말씀이 오바댜 선지가가 에돔 족속에 대해 예언한 구절입니다. “보아라. 내가 너를 이방 민족들 가운데 가장 작게 만들 것이니 네가 철저히 멸시 당하게 될 것이다. 높은 평원의 바위 굴 은신처에 살며 ‘누가 나를 땅바닥으로 끌어낼 것인가?’라고 스스로 말하는 사람들아, 네 교만한 마음이 너를 속였다. 네가 독수리처럼 높이 날고 네가 별들 사이에 둥지를 틀더라도 내가 거기에서 너를 끌어낼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이다”(옵 1:2~4). 기가 막힌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반드시 끌어 내리십니다.
본문에서 네 개의 뿔을 네 명의 대장장이를 보내 꺾는다고 말씀하신 의미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예외가 없다는 것입니다. 네 개의 뿔은 네 개의 국가가 아니라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들을 의미합니다. 사방에 있는 대적들의 수가 몇이든 상관없이 하나님은 반드시 교만의 뿔을 꺾으십니다. 아무리 단단한 뿔도 하나님의 대장장이에게는 꺾일 수밖에 없습니다.
스스로 들어 올린 뿔은 꺽인다
여러분을 괴롭히고 있는 교만한 뿔이 있다면 기도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미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대장장이가 오면 끝납니다. 구약의 역사를 보면 교만한 나라들의 종말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줍니다.
4대문명 중 하나인 애굽은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지만 교만이 하늘을 찔렀고, 바로는 신이 되려고 했습니다. 불멸하기 위해 미이라를 만든 애굽을 하나님은 앗수르를 통해 꺾으셨습니다. 앗수르는 문명이 없는 민족이면서 잔인한 민족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앗수르의 교만을 바벨론이라는 나라를 통해서 꺾으셨습니다. 바벨론역시 교만했습니다. 바벨론은 페르시아를 통해서 꺾으셨습니다. 많은 지역을 지배했던 페르시아는 아주 작은 나라 그리스를 통해 꺾으셨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작은 나라가 페르시아를 꺾었습니다. 그리스의 교만은 로마를 통해 꺾으셨습니다.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로마제국의 교만은 게르만 민족을 통해서 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나라가 교만해졌을 때 하나님의 대장장이 역할을 하는 나라를 통해서 교만의 뿔을 꺾으셨습니다. 나라들의 역사만이 아니라 개인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안에 교만의 뿔이 있으면 하나님은 반드시 꺾으십니다. 하나님이 높여주신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뿔을 들어 올린 교만은 하나님의 대장장이를 통해 반드시 꺾입니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두려워했던 그 주변 나라들을 하나님이 꺾으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더 이상 주변 나라들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는 핑계를 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믿음생활에 있어서 환경과 상황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대적을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하나님께 집중하라는 것입니다. 모든 상황은 하나님이 해결 하실 테니 염려하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말씀을 하시기 위해서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교만한 뿔을 꺾으실 것입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사도바울과 같은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교만’
“그러므로 우리는 사방으로 환난을 당해도 절망하지 않고 답답한 일을 당해도 낙심하지 않습니다. 핍박을 당해도 버림받지 않고 넘어뜨림을 당해도 망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항상 예수의 죽으심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이는 예수의 생명 또한 우리의 죽을 몸에 나타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고후 4:8~10).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사방에서 대적들의 교만한 뿔을 보았습니다. 때로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방인들의 교만의 뿔, 지식과 경험과 이방신들에 사로잡힌 이방인들의 교만한 뿔들로 인해 상처를 받았습니다. 매도 맞고. 돌도 맞으면서 죽을 고비도 수없이 넘겼습니다. 한편으로는 율법에 얽매인 유대인들의 교만의 뿔에게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답답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였던 사도 바울이 어떻게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이 교만의 뿔을 반드시 꺾는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사도 바울처럼 고백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을 자신의 몸에 짊어지고 예수님의 생명이 자신을 통해 나타나도록 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의 죽으심을 몸에 항상 짊어졌다는 것은 시체와 산사람을 포개서 시체의 독기가 산 사람에게 스며들게 해서 죽이는 당시의 사형 방식을 의미합니다. 예수의 죽으심은 예수의 시체를 끌어안고 짊어지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나의 죽음이 되고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시는 생명의 부활의 역사를 통해 우리도 함께 부활하는 된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요.
사도 바울은 자신을 대적하는 주변의 여러 교만의 뿔들을 하나님이 꺾어 주시지만 문제는 자신 안에 있는 교만의 뿔은 다른 사람이 해결해 주지 못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교만의 뿔 들지 않으려 간구
사도 바울은 교만하지 않기 위해서 ‘주님이 보배시다. 내가 보배가 아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교만은 자신이 보배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건강하게 사랑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자신을 멸시하고 자신을 비하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자기 자신을 사랑해야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우리도 우리 자신을 사랑해야합니다. 그러나 자신만을 사랑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우리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가 보배이기 때문에 우리 자신을 사랑하되 건강하게 사랑해야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신만을 사랑하려는 습관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교만을 “자기만 즐기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속일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속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교만하다는 것을 자신은 절대로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신이 겸손하다고 생각합니다. 교만은 나이나 지식, 재물의 정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생길 수 있습니다. 왕과 같은 지도자이든 아니면 평범한 사람이든 누구나 교만에 빠질 수 있습니다. 교만해지면 주변 사람들을 괴롭힙니다. 이들에게는 주변사람을 흩어버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 교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 가정은 깨집니다. 공동체 안에도 교만한 사람이 있으면 그 공동체는 깨집니다.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린 지도자가 있으면 나라가 깨집니다. 결과적으로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린 자 때문에 주변 사람들 모두가 피해를 보게 됩니다. 무엇보다 나 스스로가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 기도해야합니다. 또한 이 나라와 민족이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린 민족이 되지 않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심판의 대상이 되는 순간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리면 안 됩니다. 어디 교회를 출석하느냐가 자신의 신앙을 보증하는 것이 아닙니다. 유명한 영적 지도자를 안다고 해서 그것이 나 자신의 신앙을 보증해 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얼마나 겸손하게 하나님 앞에 서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역사에 자신의 이름을 남겨보겠다고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 앞에 외면당하고 퇴출당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교만의 뿔을 들어 올렸기 때문입니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나라들은 모두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린 공통점이 있습니다.
여러분, 교만의 뿔을 꺾으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면서 귀하게 쓰임 받는 성도가 되십시오. 교만의 뿔을 꺾거나 꺾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귀하고 선한 일에 도구로 사용되는 성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와 민족이 교만의 뿔을 들고 있다면 그 뿔을 내려놓아야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대국이라고 해도, 아무리 돈이 많은 민족이라 하더라도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리는 순간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부강함을 자랑하는 민족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교만의 뿔을 내리고 하나님 앞에 겸손한 마음으로 귀하고 선한 일에 쓰임 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역사 속에서 일하시는 하나님께서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린 민족들을 꺾어버리셨던 엄중한 교훈을 우리가 마음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합니다.
이 나라와 이민족이 교만의 뿔을 들어 올리지 않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 인생이 교만한 인생이 되지 않게 하옵시고,
하나님 앞에 교만해져서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는우리 모두가 되게 하옵소서.
선하고 귀한 일에 쓰임 받는 인생으로 하나님께 축복받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정리 김남원 부장 one@onnuri.org
'좋은 말씀 > 이재훈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는 하나님 (스가랴 3장 1~10절) (0) | 2017.05.29 |
---|---|
보호하시는 하나님 (스가랴 2:1-13) (0) | 2017.05.27 |
다시 선택하시는 하나님 (슥 1:7-17) (0) | 2017.05.22 |
내게로 돌아오라 (스가랴 1:1-6) (0) | 2017.05.21 |
교회의 각성 (행 5:1-11) (0) | 2017.05.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