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37)

새벽지기1 2017. 2. 18. 07:58


주 되심의 영성 <하나님 형상>

서로간의 친밀함과 우정은 단지 성적 관계뿐만 아니라 일터와 정치 영역에서도 필요하다. 하지만 사람이 죄로 왜곡된 삶의 환경에서 살아가는 한 사람이 보이는 주된 경향은 침울하게도 부정적이다.
남성이 된 것은 좋은 일이다. 남성의 신체, 특성 및 성적 본성 역시 좋은 것이다. 한 남성으로 다른 사람과 형제 관계를 이루어 가는 것도 좋은 것이다. 시편 133편 1절은 노래한다,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최초의 믿음 공동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지체인 ‘형제’라고 일컬어졌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아버지로 둔 형제다. 남성이나 여성은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 온전한 형제 관계를 이루어가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사람은 전인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여러 부분으로 나눌 수 없다. 죄가 없이 통전적인 삶을 가장 완전하게 산 본보기가 예수 그리스도다. 그는 자신의 삶을 기꺼이 희생하심으로써 자신의 통전적인 삶을 모두가 살아가도록 했다. 흔히 ‘구원’이라고 번역되는 성경의 그리스 원어 ‘소테리아’는 ‘건강함’ 혹은 ‘통전성’을 뜻한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베푼 구원은 죄의 결과로부터 회복되는 것이다. 완전한 회복은 우리가 장차 부활할 때 경험하게 되지만 현재에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것을 예기할 수 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문제가 제기된다, 곧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구원 받은 것이 전인적인가 아니면 단지 부분적인가?  성경은 우리의 전 인격이 구원받았음을 강조한다. 우리는 ‘몸의 속량’을 기다린다(롬 8장 23절).’ 그 때는 이 땅에 속한 자신을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히려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장 4절).


이와 달리 구원을 ’혼‘이나 ’영‘과 같이 사람의 생명이 가진 비물질적 면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이러한 이해는 고대 그리스 철학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리스 철학의 중심 주제가운데 하나는 삶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이다. 사람의 지각이 확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큰 한계가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실체를 물질적인 것을 넘어가는 것에서 찾고자 했다.


가령, 플라톤은 몸을 영혼이 머무는 매개물로 보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영혼이 몸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했다. 이들에게 죽음은 영혼이 이 땅의 감옥에서 풀려나 영원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에 영향을 받아 기독교 신학 역시 사람이 영, 혼 및 육 등의 세 요소로 되어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러한 삼분설은 육적인 면과 영적인 면을 마치 서로 반대되는 것처럼 나눔으로써 성경이 말하는 창조 개념과 멀어졌다. 창세기 2장에 따르면, 사람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물질적인 존재임이 명백하다.
또한 사람은 하나님이 그의 숨을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생령이 되었다(창 2장 7절). 여기서 생령은 ‘영혼’을 말하지 않는다. 그것의 원어 ‘네페스’는 짐승과 같이 어떤 형태든지 살아있는 것을 나타낼 때도 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아’나 ‘인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사람은 영혼을 가지고 있는 존재로 보기보다 영혼이라고 보아야 한다. 곧 사람은 영혼이 있는 몸인 것과 같이 몸이 있는 영혼이다. 구조적으로 볼 때, 히브리 성경은 사람이 육신(바사르)으로 지음 받았고 하나님의 숨이나 영(루아흐)이 생기를 불어넣은 존재로 본다.


죽을 때 육신은 흙으로 돌아가고, 하나님의 영은 더 이상 그것에 함께 하지 않는다(창 6장 3절). 사람은 지속적으로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과 갖는 관계와 본질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