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윤선박사

성결 위한 필사의 노력이 오늘날의 개혁

새벽지기1 2016. 9. 24. 17:30


“거룩한 삶을 위해 눈물 흘리며 애쓰는 노력 없는 것 안타까워” 

 

루터는 이신득의론에 해당되는 종교개혁을 성립시켰지만 칼빈은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에서 더 나아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개혁을 이루었습니다. 우리의 개혁주의가 살고 있는 거처가 바로 거기인데 우리의 구원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받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을 우리 생의 목표로 삼는 이것이야말로 참으로 성결을 위한 개혁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습니다. 믿음 정도만이 아니라 성결을 이루어야 합니다. 이 성결을 우리의 생명보다 귀히 여기는 것이 성경이 가르치는 목표입니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거룩히 살기 위해서 생명을 거는 위험한 길이라도 당해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개혁주의는 그러한 정신과 주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세계적으로 교계에서 너무도 이 성결 문제를 등한시합니다. 거룩하게 살아보자는 말이 별로 없습니다. 거룩하게 사는 문제를 중시하지 않고 구원을 받으면 되는 듯이 너무도 안일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거룩한 삶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애쓰는 노력이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흰 옷을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는 이 노력이 오늘날 우리의 개혁입니다. 한국 교회 백년 역사에 있어서 이제 이럭저럭 어두워지고 쇠약해져서 성결을 향하여 달음질하는 것은 별로 없고 불행히도 명목주의와 외부주의와 같은 운동에 급급해 하는 것을 우리가 피부로 느끼게 됩니다.

 

주의 일을 한다는 이들이 지나치게 생활 문제에 포로가 되어 어떻게 하면 밥을 먹을까, 어떻게 하면 집을 장만할까, 어떻게 하면 좀 잘 살아볼까 하는 생각으로 더 분망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기보다 자기를 사랑하기에 급급하고, 하늘나라보다 이 세상을 사랑하는 수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판국이라고 해도 과한 평가가 아닙니다.

 

성결을 위하여 죽도록 노력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개혁입니다. 옛날에 바실(Basil the Great, 330-379)이라는 유명한 성도가 두통 때문에 고생을 하다가 하나님 앞에 두통을 치료해 달라고 기도한 후 두통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그 후부터 자기의 마음에 일어나는 정욕과 모든 부정한 생각을 금할 도리가 없어서 다시 기도하기를 ‘주님이여, 나에게 두통을 주시옵소서’라고 기도했다 합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겠지만 중세 때 아일랜드 사람 성 말라기(St. Malachi, 1094-1148)가 유럽 대륙으로 들어가서 성 버나드 수도원에서 성 버나드(St. Bernard, 1090-1153)에게 배우면서 성결을 힘썼습니다. 버나드는 성 말라기가 죽은 후에 평하기를 “말라기는 살았을 때에 죽었고 지금 죽었지만 살았다” 하는 글을 남겼습니다.

 

말라기는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살아볼까 하는 간절한 마음을 가지고 자기 고향을 떠나 성 버나드 수도원에 가서 성화의 생활을 배우던 가운데 세상을 떴는데, 그가 살았을 때에는 죽은 사람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수도원에서 사는 동안 자기라는 것을 나타내지 아니하고 죽은 사람같이 고요했고 온유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가 세상을 뜬 다음에는 죽은 것 같지도 않다는 뜻으로 그렇게 글을 쓴 것이었습니다.

 

 

출처 / “우리의 개혁은 성결이다”, 『부르심, 네 꼴 보고 은혜를 받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