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윤선박사

형식에 그치는 믿음

새벽지기1 2016. 9. 27. 10:21


“예수를 믿는 일에서 주님 팔아먹는 데로 갈 위험성 높아” 

 

제자들은 자기를 위험시한 것이 분명합니다. 예수를 팔아먹을 위험성이 내게도 있다 하는 것이었는데, 자기들이 무엇이라고 말은 안 하지만 그 마음에 뭔가 무거운 것이 있었습니다. 나도 별 수가 없는 인간이라고 하는 생각이 그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몇 가지를 더 생각해보겠습니다.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라는 것이 그렇습니다. 디모데후서 3장 4절 하반절인데 사람이라는 것이 그렇게 되기 쉽다 말입니다. 하나님을 대면하여 무시할 수 있는 악독한 소질입니다.

 

쾌락이 한편에 있고, 하나님이 다른 편에 계신 경우에 무엇을 택하느냐? 하나님을 대면하여 모욕할 수 있는 그런 위험성이 있습니다. 쾌락을 택하게 되는 그런 위험성,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는 소질이 제자들에게도 있을 수 있는 것이지요. 과연 어떠한 형편에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이 전혀 없다고는 할 수가 없습니다.

 

또 명예 사랑하기를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명예와 감투 때문에 실제로 예수를 팽개치는 일이 얼마나 많은가요? 그것이 또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요? 물질 때문에 주님을 팽개치는 일은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를 믿는다고 하지만 그저 형식뿐이고 어려울 때에나 써먹으려고 하는 정도에 그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수를 믿기는 믿는다고 하지만 그 중심 속에 얼마나 믿는가 하는 이것이 참 문제입니다. 자기의 중심에서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이 허약한 것을 점검해 보지 아니하며 그 약점을 고쳐보려고 피나는 노력도 하기 싫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예수를 믿는 일에서 그저 형식에 머무르는 것이 주님을 팔아먹을 수 있는 데로 갈 위험성이 얼마나 높은 상태인가를 인식해야 합니다. 형식주의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목사와 전도사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형식주의란 그저 이름만 걸어놓고 지나가는 것입니다. 심각한 결단도 없으며 피나는 노력도 없이 그럭저럭 세월 보내면서 이름 가지고 나 목사요, 나 전도사요, 또 무엇이요 하면서 지나간단 말입니다.

 

주의 일을 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과 그 지시를 따라서 행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는데, 예수님을 대충 믿어서 되겠습니까? 우리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이 어두운 세상에서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곳으로 가게 하는 그 길입니다. 또 진리요 생명이라고 했는데 우리가 생명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나에게 생명이라 생각할 때에 참으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귀한 예수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할 때에 그의 말씀 하나하나, 그의 지시 하나하나를 받아서 그야말로 청지기의 신분을 가지고 일을 해나가야 합니다. 그저 주의 일을 하는 일꾼이라는 이름을 걸어 놓고는 자기 나름대로의 행동을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자기가 본래 생겨먹은 대로 일을 해나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에 깊이 들어가지도 못했고 기도하는 일에서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한 인간이 어떻게 예수의 말씀과 지시대로 일을 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신학교 졸업장을 가지고 나가지만 한번 그 상태를 점검하여 볼 때에 성경도 별로 알지 못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인데 하나님 말씀을 별로 아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그저 학과 시간에 강의를 좀 듣고 몇 줄거리 기억했다가 시험 범위를 알려 달라고 해서 그 범위 안에서 습관적으로 몇 가지를 써서 통과하는 식으로 과정을 이수하여 졸업장을 받습니다.

 

3년이라는 세월이 무척 아까운 세월인데 그 3년 동안에 성경을 얼마나 알았느냐 할 때에 자신 있게 대답할 분들이 몇이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 졸업하고 나가서 잘하겠다고 하지만 신학공부 하는 3년 동안에 결단이 없이 이럭저럭 세월을 보냈는데, 앞으로도 그러한 성격이 나타날 내가 아닌가를 자기가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과 지시에 따를 줄 모르는 사람으로서 형식적으로 나는 목사요, 나는 전도사요 하면서 한평생을 지낸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팔아먹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을 팔아먹을 소질이 다분히 있다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엇보다도 자기를 위험시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요 자기가 사는 길입니다. 자기를 위험시하는 것이 과연 주님의 일을 하는 착실한 첫걸음입니다. “주여 저는 아니지요?” 이 얼마나 의미심장한 말입니까?

 

출처 / “예수를 팔아 먹을 사람”, 『부르심, 네 꼴 보고 은혜를 받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