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목회편지

신학과 목회 - 그 행복한 만남을 위하여

새벽지기1 2016. 9. 14. 07:37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

바른 신학, 바른 생활, 바른 교회는 합동신학대학원의 표어이다. 매우 지혜롭고 성경적인 표어라 생각한다. 한편 우리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바른 신학은 신학교에서, 바른 생활은 집이나 사회에서, 바른 교회는 교회에서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는 함께 조화를 이루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삼정(三正) 사상 조화 이뤄야

바른 생활과 상관없는 바른 신학은 있을 수 없고 바른 신학 없는 바른 교회는 불가능하다. 또한 바른 교회는 바른 생활과 뗄 수 없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은 나뉠 수 없는 분이기 때문이다. 신학 혹은 교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해야 한다. 지식적 체계로 끝나는 신학은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고, 바른 지식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생활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고, 바른 신학과 바른 삶이 결여된 교회 역시 하나님의 성품을 반영할 수 없다.


칼빈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과 ‘인간을 아는 지식’(knowledge of man)을 동시에 강조하면서 어떤 것이 먼저인지 모른다고 고백했다. 우리는 마치 우리 자신 특히 우리 죄성을 몰라도 얼마든지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처럼 착각한다. 우리 생활과 상관없이 얼마든지 신학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그렇다면 그 앎과 신학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잠1:7)고 말씀한다. 즉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분리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과 그 뜻대로 사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 아니라 같은 것이다. 성경 원리와 성경 메시지는 뗄 수 없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원리를 알면서 성경의 내용대로 실천하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뜻이다.


게할더스 보스는 “계시는 하나님의 사역으로 연결되는 행동의 명사이다”고 말한다. 즉 모든 계시는 하나님을 드러내고 모든 성경의 구절들은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지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은 하나님 자신과 연결되어 있다. 예를 들어 솔방울에 관해서 색깔, 모양, 씨, 사용처 등을 아무리 잘 묘사하고 잘 안다고 해도 소나무와 연결시키지 않으면 진정한 솔방울을 파악한 것이 아닌 것과 같다. 우리 신학은 반드시 삼위 하나님께로 향해 있어야 한다. 그러면 결코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따로 둘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이렇게 말씀한다.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딛 2:1-8).


여기 바른 교훈(sound doctrine)은 단지 정보나 지식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위해 주어진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각기 바른 신학과 바른 생활과 바른 교회를 잘 이루도록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세 가지를 잘 조화하는 것도 똑같이 중요하다. 이 조화의 작업은 구석에서 되어질 일이 아니고 또 몇 사람에 의해 되어질 일이 아니다. 신학교와 현장과 교회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를 들어 우리 개혁주의의 모토인 ‘하나님의 주권’은 신학적으로만 세워질 수 없다. 아무리 신학적, 교리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을 논한다고 해도 마른 빵 조각 앞에 기도할 줄 모른다면 하나님의 주권은 사변적 넋두리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우리의 지식, 삶, 교회 모든 영역에 적용되어야 한다. 어느 한 쪽이 결여되면 그 진리는 무너지는 것이다.


청교도들이 자주 강조했던 “신학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이다”(Theology is not a science of knowledge about God, but an art of life unto God)라는 말이 있다. 신학교는 어떤 지식적 체계만을 공급하는 상아탑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을 위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물론 교회와 우리 삶의 현장도 그러한 터전이 되어야 한다.

신학은 삶의 예술 위한 것

예술은 지식만 갖고 되지 않는다. 바울이 디도에게 말씀하는 바 절제, 경건, 근신, 믿음, 사랑, 인내, 선한 일, 경건함, 부패치 아니함, 바른 말 등이 없이는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을 향한 삶의 예술은 신학과 생활과 교회가 잘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한 것이다. 그래야 ‘바른’이라는 말을 앞에 붙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