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08)

새벽지기1 2016. 8. 28. 21:08


주 되심의 영성<하나님 형상>

이 땅은 사람과 다른 피조물이 함께 살아가는 곳이다. 하지만 그들은 모두 이 땅에서 타락한 피조물로서 살아간다. 특히 죄는 사람이 이 땅을 마지막 고향으로 삼을 수 있다는 거짓된 확신을 갖게 한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으로 바라보아야 할 것은 죄 아래에 있는 현재의 자연 세계가 아니라 미래에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전을 갖고 우리는 ‘새 하늘과 새 땅’의 아름다움과 평화 및 정의를 이루어가야 한다.


우리에게 평안을 주는 이른바 ‘고향’을 생각할 때 인간 사회와 인류로서 살아가는 환경이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상호 작용 곧 인간의 문화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문화는 사람이 특정한 환경에서 가치를 추구하는 활동의 총체를 말한다. 이것은 문화가 사람이 이 땅에 살아가는 한 모습이라는 것을 뜻한다. 문화는 사람이 살아가는 모든 면에 관계되고 모든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문화란 우리가 늘 들이마시는 공기와 같다. 우리의 몸이 건강하면 숨 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처럼 문화란 일부러 그것에 관심을 두지 않거나 다른 문화에서 살아가지 않으면 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나라를 여행하거나 특히 그 나라 말을 알아듣지 못할 때 문화 환경이 급속히 바뀐다. 이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살아갈 때에도 흔히 경험할 수 있다. 우리가 어느 파티에 참석했는데 그곳에서 주로 알지 못하는 음악만 나온다면 와서는 안 될 곳에 왔다고 느낄 것이다.


성경 자체는 사람의 문화가 다양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성경은 문화적으로 가지각색의 기록을 모아둔 것이다. 성경은 아주 넓은 범위의 사회적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적어도 1500년 동안에 걸쳐서 쓴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중동, 유다 및 그리스 문화 등 다양한 관습을 찾아볼 수 있다. 어떤 문화를 정죄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 어떤 문화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유대 족장들이 유목민으로 살아가는 방식은 이른바 ‘발달된 문화’를 가진 모세의 그것과 두드러질 만큼 달랐다. 사무엘, 아모스 및 훌다와 같은 선지자는 동족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 문화에서 활동하였지만, 에스더, 에스겔 및 다니엘은 지배 계층의 문화에 반하거나 뛰어넘어 살았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음의 평안을 주는 형태도 달랐다, 곧 족장 시대에는 그것이 장막이었고, 국가 시대에는 성전이었으며, 흩어진 시대에는 회당이었다.


신약 시대 교회는 어떤 문화이든지 복음에 전적으로 유리하거나 불리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로마 시민권과 자신이 유대인으로서 갖고 있는 유산을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다(행 16:37; 22:3; 빌 3:4-8). 로마 황제 체제가 묵인될 수 있으면서도(롬 13:1-7) 가증스러운 바빌론으로 간주되었다(계 18장).
초기 교회도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의 삶에 중심적인 논쟁점은 유대인과 이방인의 관계였다. 그들은 신학적인 뿌리와 함께 문화가 서로 달랐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누구나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유대 율법의 요구가(창 17:9-14), 그리스도를 주로 믿은 이방인 교인들에게는 면제되었다(행 15:15-21). 이렇게 큰 변화가 일어난 것은 관련된 문제들을 놓고 많이 갈등하고 싸우는 과정과 함께 하나님이 그것을 특별히 인도하신 이후였다(갈 1:16-17).


예수님은 이 땅에서 사역을 마치면서 사도들에게 모든 민족에게 가서 제자를 삼으라고 명령하셨다(마 28:19). 여기서 ‘민족’이라는 말은 문화를 뜻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민족’이란 말이 신약성경 다른 곳에서는 ‘이방인’이라고 번역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오늘날 그 말이 특정한 사회 정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복음을 듣고 반응해야 하기 때문이다(고전 9:22).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