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06)

새벽지기1 2016. 8. 21. 08:32


주 되심의 영성<하나님 형상>

시골에서는 사람과 다른 유기적 생명의 차이가 그렇게 두드러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일상적인 삶이 동물, 식물 및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곳에서는 사람과 다른 피조물이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에게 의존적이라는 것을 좋게 여긴다.


사람과 다른 피조물이 서로 명확하게 구별된다고 하는 보는 경향은 서양 사회의 경우 18세기 유럽 사회에 크게 영향을 끼쳤던 계몽주의와 산업 혁명 이후에 급속히 생겨났다. 사람의 기원에 관한 진화론적 관점이 널리 퍼짐에 따라 이것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사람도 동물 세계의 부분이라고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는 사람의 존재가 가장 진화되었고, 사람이 이 땅에서 가장 ‘높은“ 형태의 생명이며, 따라서 사람보다 ”더 낮은“ 존재를 원하는 대로 쓸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생각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다윈의 진화론은 역사 낙관론의 시대에 주창되었기 때문에 ”점진적 발전“을 믿는다. 그것은 인류가 자연을 다스리는 영역을 확대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일반 학문 세계는 받아들이고 있지 않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과학 기술의 지배를 의심하는 사람들에 의해 옳지 않다고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형적으로 핵과 생태계의 재앙의 위협에 이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다른 피조물을 지배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옳지 않다. 그것은 동물에 대한 잔학성을 정당화하고, 이 땅의 종의 다양성을 위협하며, 사람의 생명 이외의 어떤 것이든지 그 자체로서 하나님께 본래적 가치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회사에 나타난 기독교 전통에서는 사람과 다른 피조물이 서로 작용하고 있다고 믿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프란시스코 영성을 들 수 있다.


사람중심주의 세계관은 사람의 존재가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의 중심이라고 본다. 기독교 신앙은 이것을 이기적인 형태로 여겨 받아들이지 않는다. 오히려 기독교는 직접적으로 덜 이기적인 형태로서 ‘보존’을 받아들인다. 사람은 미래 세대를 위해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것을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잘 보존해야 할 책임이 있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 가운데 사람에게 주어진 독특한 지위다. 바로 이점이 생태 중심적인 세계관이 팽배해 있는 오늘날 강조되어야 한다.


지난 세대에 알버트 슈바이츠 박사는 ‘생명의 외경’이란 철학의 이름으로 더 높고 더 낮은 생명 형태의 구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대 사회에서 그러한 이해는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지만, 더 넓은 창조 질서의 틀에서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 점에 비추어 보면, 사람은 다른 동물과 모든 유기적이거나 살아있는 생명과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생명의 가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 평가할 것이다. 하나님이 그것을 지으셨기 때문이다.


여기서 성서가 ‘피’의 중요성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이 노아와 맺은 언약은 사람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을 되풀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형태의 피흘림 특히 사람의 피를 흘리는 것을 금하고 있다(창 9장 4-6절).


따라서 피는 특별한 방식으로 하나님의 것이고 이것의 표로서 사람은 피를 흘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인정된다.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요 14장 6절). 그는 자기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버렸고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셨다. 그것은 다른 사람을 망가지고 죄의 속박에 얽매인 상태에서 새롭게 하기 위해서였다(요 10장 11-18절; 고후 5장 19-21절). <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