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05)

새벽지기1 2016. 8. 19. 11:41


주 되심의 영성<하나님 형상>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어가신 길을 따라 자신을 희생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이것을 실천하기가 쉽지 않으나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이웃과 갖는 관계에서 그러한 도전을 받고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셨다. 그런데 이러한 회복은 우리가 동료 이웃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는 것과 떨어질 수 없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고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피조물과 화해하는 것과 분리될 수 없다. 따라서 사람이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는 데에는 희생적 요소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다른 피조물을 희생의 방식으로 다스림으로써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갈 책임이 있다. 그러한 책임은 우리가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지위와 떨어질 수 없다. 이것은 지음 받은 우리의 본성과 관계될 뿐만 아니라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가 부름을 받고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골 3:10) 새로운 자아로 계시되었다.


그러면 사람은 다른 피조물과 어떠한 관계를 갖는가? 사람은 홀로 살지 않고 남과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다. 이러한 집단적 모습이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더불어 살아가는 것이다.
구약 성경은  ‘네페스’란 말을 모든 생물(창 1:20-24)과 사람(창 2:7)을 나타낼 때 똑 같이 쓰고 있다. 이것은 사람이 다른 피조물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는 뜻을 나타낸다.


사람과 다른 동물 사이에는 두드러진 차별이 있다는 것이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자연이란 문명의 이름으로 정복되어야 한다는 주장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는 사람이 길들여야 하는 야수와는 본질적으로 우월하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짐승처럼 행동한다고 말하면 이것만큼 그를 모욕하는 것이 없다.
신학은 사람이 동물과 다르다는 것을 흔히 사람이 영혼을 갖고 있으나 동물은 그렇지 않다는 개념을 나타내었다.


또한 사람에게 본질적인 것이 무엇인가를 말할 때 흔히 동물은 할 수 없으나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을 든다, 가령, 언어, 이성, 도구 사용 등이다. 하지만 성경은 사람이 동물과 차이가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만 그것의 중요성을 거의 말하지 않고, 사람이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점에서 독특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성경은 동물을 비롯한 다른 피조물이 사람에게 얼마나 유용한가와 관계없이 그것 자체로서 가치가 있다고 가르친다.


따라서 그것은 잘 보살피고 정당하게 대해주어야 한다. 율법은 기록하기를, ‘곡식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지니라’(신 25:4). 예수님이 말씀하시기를, ‘공중의 새를 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6-29).
초기 교회 그리스도인이 살았던 시대는 대부분 농촌 사회였다. 이때는 사람과 다른 피조물이 끊임없이 접촉하고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오늘날과 같이 도시나 산업 환경에서 살아가는 시대에는 사람과 동물의 구별이 확실하다. 사람과 다른 동물의 접촉이 흔하지 않고 동물을 사육하거나 죽이지 않고서도 먹을거리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짐승과 접촉하는 것도 대부분 집에서 기르는 가축을 통해서이거나 아니면 말 경주 같은 동물과 관련된 여가활동을 통해서다. 사람이 애완견이 아닌 동물과 거의 접촉하지 않는 곳이나 식용 고기가 소비자와 거리가 먼 곳에서 준비되는 곳에서는 동물의 권리가 아주 중요한 문제가 되어 왔다. 이것은 잔혹한 동물 실험에 대한 관심과 많은 동물 종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서 더욱 촉발되었다. <계속>

출처.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