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신현수:조직신학

신현수 박사의 조식신학 (107)

새벽지기1 2016. 8. 24. 07:17


주 되심의 영성<하나님 형상>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생명을 갖되, 무로부터가 아니라 생명의 반대 곧 죽음으로부터였다. 우리는 이 새 생명을 성령을 통하여 갖게 되었다(롬 8장 1-11절). 그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탄식하고 있는 모든 피조물도 바라는 것이다(롬 8장 18-23절).


한 편으로, 이러한 이해는 인간이 인간 역사보다 더 넓은 과정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런 뜻에서 사람중심주의는 생명중심주의의 요소를 내포한다. 다른 한 편으로, 이러한 이해는 하나님이 창조주와 구속주로서 생명의 유일한 원천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따라서 사람의 삶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전망은 ‘신본주의’라고 할 수 있다. 이 전망은 만물의 주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중심이다. 그의 삶, 가르침, 죽음 및 부활을 통해 하나님이 창조와 구원 사역을 하고 있다는 놀라운 진리가 밝혀졌고, 우리는 그가 다시 이 땅에 오실 것을 기다린다.


인류와 다른 피조물의 관계는 우리가 참으로 마음 편하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어디인가를 살펴봄으로써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모든 피조물은 이 땅에서 발붙이고 살도록 지음 받았기 때문에 같은 공간과 시간 및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인류가 이 땅의 자원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고 통제되지 않은 과학과 기술 활용으로 그것은 더 이상 인류에게 참된 안전, 의미 및 위안을 줄 수 없다. 고향 상실을 경험한 인류는 참된 고향을 끊임없이 추구하게 되었다.


인류와 다른 피조물의 세계가 갖는 연대를 아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삶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인류가 하나님 앞에서 죄인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자연도 죄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따라서 우리가 이 땅에서 고향을 찾고자 하는 어떤 시도도 아무런 열매가 있을 수 없고 위험하기까지 하다. 참된 고향이란 오직 하나님께만 있고 우리는 하나님을 힘입어 살고 기동하며 우리는 그의 소생이기 때문이다(행 17장 28절)


우리가 경험하는 피조물은 죄의 지배를 받고 있어서 허무한데 굴복하고 썩어짐의 종노릇에서 벗어나기를 탄식하며 기다리고 있다(롬 8장 18-23절). 이사야 선지자는 이러한 희망을 모든 피조물 가운데 있는 자연법칙에 반하는 평화의 관점에서 그리고 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사 11장 6절).


인류가 직면한 절망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 사람은 ‘이 세상이 우리의 고향이 아니고 다만 지나갈 뿐이라고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그러한 관점이 어떤 면에서는 타당하나 땅과 하늘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따라서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대조시키는 경향에 이르기 쉽다는 것이다.
어느 극단을 택하면, 그리스도인이 피조물로서의 위치를 무시할 수 있고 이 땅에 살아갈 때 전혀 편안하지 않을 수 있다. 생태계에 관한 관심을 갖고 행하는 것을 거절하면 널리 퍼져 있는 죄의 현상에 이르게 되고, 자연 우상의 잘못을 지적하는 선지자로서의 행위를 하는 기회가 부인된다.


이러한 수동적인 자세는 자연을 다스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이 땅의 자원을 제한 없이 남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데 그 명령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중심주의나 생태중심주의는 어느 것이든지 하나님과 관련하여서만 참된 뜻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나 이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시고 그것의 생명을 유지하신다. 그런 뜻에서 하나님은 참된 고향이다.<계속>

  출처j...복음신문....피어선신학전문대학원 조직신학 교수...신 현 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