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존 오웬

내 안의 죄죽이기 (9) / 존 오웬,

새벽지기1 2016. 7. 20. 12:25


8. 죄를 죽이기 위한 9가지 방법

 

방법1 정욕에 동반되는 여러 위험한 징후들을 살펴라

 

- 고질적 습관

만약 어떤 죄가 당신의 마음을 오랫동안 타락시켜 왔는데 그것의 위력을 물리치고 거기서 치유받으려고 노력하지 않았다면, 그 죄의 병은 매우 심각한 것이다. 혹시 당신은 오랫동안 세상적 생각, 야망, 욕심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끊임없는 동행의 삶을 위해 필요한 다른 의무들을 저버리지는 않았는가? 아니면 수많은 날을 헛되고 어리석은 악한 생각으로 보내며 당신의 마음을 더럽히지는 않았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의 정욕은 매우 위험한 수위에 있다.

다윗의 경우가 그랬다. “내 상처가 썩어 악취가 나오니 나의 우매한 연고로소이다”(시38:5). 마음 속에 오랫동안 자리 잡은 정욕은 사람을 타락시키며 곪게 하고 짓무르게 하여 영혼을 비참한 상태로 만든다. 일반적인 처방으로는 치료가 불가능하다. 특단의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결코 평화를 맛볼 수 없다.

특정 정욕은 당근과 채찍이라는 양면작전을 통해 영혼이 특별히 눈치 채지 못하도록 자신의 존재를 오랫동안 숨겨왔을 수도 있다. 그리고 말씀을 통해 주어지는 각종 은사들의 도전 앞에서 오랫동안 굴복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다. 정욕은 속병으로 일단 사람 속에 습관으로 자리를 잡게 되면 발본하기가 어려워진다. 그것은 스스로 죽은 법이 없기 때문에 매일매일 우리가 그것을 죽이지 않는다면 그 위력은 점점 더 커진다.

 

- 죄와 타협하려는 마음

내주하는 정욕의 힘 앞에서 복음의 방법으로 그것을 죽이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명목으로 그것과 은근히 타협하려는 것은 마음속에서 그 죄가 치명적인 수위로 발전했다는 또 다른 증거가 된다.

첫째, 죄로 인한 생각으로 고통을 당할 때 그것을 파괴하려고 노력하기보다 자신의 마음속에서 그런 죄의 속성 외에 다른 좋은 면이 있는지를 찾아보고 그것을 찾게 되면 죄에 대해 관용하는 것이다.

사람의 양심이 하나님과 대면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죄성이 꾸짖음을 받을 때, 그 죄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용서받고 성령으로 죽이기보다 오히려 전에 가졌던 좋은 경험들을 생각하며 위안을 얻고 하나님이 자신의 목에 놓은 멍에를 회피하는 것은 실로 위험한 행동이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내세우며 스스로 위로하고 합리화했다. “악화일로에 있을지라도 자신 속에는 여전히 평화가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태도는 죄를 사랑하고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화를 무시하려는 심리가 있다.

둘째, 죄를 죽이기 위해 신실하게 노력하는 대신에 죄를 은혜와 자비의 논리로 합리화하는 것도 죄와 타협하려는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색욕거리로 만드는 셈이다(유4절).

실로 사람은 천성적으로 이처럼 육신적인 거짓 논리에 무엇보다도 쉽게 사로잡힌다. 그래서 육신은 ‘은혜’라는 핑계를 대고 더욱 방종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비와 관련된 말은 무엇이든지 귀를 쫑긋하고 낚아채서 자신의 타락한 목적을 위해 왜곡시킨다.

 

- 죄의 유혹에 동조하는 태도

죄의 정욕이 치명적인 수위에 이르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징후는 죄의 유혹이 성공을 거두고 빈번히 사람의 의지가 죄의 지배에 동조하는 경우이다. 정욕에 휘말리는 일을 의도적으로 하든 무심코 하든 그 결과는 동일하다.

 

- 죄와 싸우지 않고 논쟁하는 자세

사람이 죄와 싸워야 할 때 앉아서 죄의 문제와 죄의 심판에 대해 논쟁만 한다면 그것은 죄가 그의 의지를 사로잡은 증거이며, 그의 마음속에는 사악함이 가득 차 있다는 징후이다.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소유가 된 성도는 복음의 원리에 기초해서 순종하고 그리스도의 죽음,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죄의 혐오스런 속성을 깨달아 하나님과 동행하며 죄를 죄로 여기고 경멸한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득죄하리이까”(창39:9).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 도다”(고후5:14).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고후7:1).

율법적 자세에서 죄를 억제하려는 노력은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 강력한 복음의 요새를 떠나 스스로 정욕과 맞서 싸우게 되면 그 정욕은 즉시 당신을 삼키게 될 것이다. 적과 싸울 때 천 배의 힘을 발휘하는 무기를 적에게 넘겨준다면 결코 당신은 적의 지배에서 해방될 수 없다.

 

- 징계의 심판에 대한 무감각

당신이 정욕으로 인한 강퍅함, 또는 적어도 징계의 심판을 느끼지 못하고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을 때 이것은 죄의 또 다른 위험한 징후이다. 하나님은 때때로 자신의 자녀들에게 죄나 정욕을 허락해서 그들을 당혹하게 만들고, 그것을 통해 그들이 가졌던 죄, 태만, 그리고 어리석음을 교정하신다.

 

-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을 방해하는 것

죄를 교정하려는 하나님의 방법을 정욕을 통해 방해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죄의 징후이다. “그의 탐심의 죄악을 인하여 내가 노하여 그를 첬으며 또 내 얼굴을 가리우고 노하였으나 그가 오히려 패역하여 자기 마음의 길로 행하도다”(사57:17). 실로 하나님의 사랑을 저항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경멸하는 행위다!

 

위험한 죄의 징후는 이상에서 말한 것 외에도 많다. 주님이 귀신 들린 자를 고치시면서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라고 하신 말씀은 정욕을 죽이는 문제에서도 적용된다. 일상적인 방법으로 죄를 죽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직 특별한 방법을 통해서만 죄를 죽일 수 있다. 그러므로 당신은 죄와 싸울 때 위에서 말한 그러한 위험한 징후들이 있는지를 먼저 살펴야 한다.

당신이 진정으로 성도라는 증거를 갖기 원한다면 성도의 속성을 가져야 한다. 이런 속성을 가진 사람만이 “비록 성도이지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 대해 곤고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곤고함 속에서도 마음의 평화를 갖기 위해서는 진정으로 성도인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증거들이 있어야 한다.

 

방법2 죄의식, 죄의 위험, 죄의 사악함을 항상 인식하라

 

당신의 마음과 양심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변함없는 분명한 인식이 있어야 한다. 즉, 첫째는 죄의식, 둘째는 당신을 괴롭히는 죄의 위험, 그리고 셋째는 그것의 사악함을 항상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 죄의식

사람이 정욕의 지배를 받을 때 정욕은 그 사람에게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도록 속인다. 그래서 림몬의 당에 들어가 우상 신에게 경배를 할 때 하나님도 그 정도는 봐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이것은 나쁘지만 다른 악에 비해 그렇게 나쁜 것은 아니라고 구실을 대도록 한다. 죄가 사람의 마음을 속여 올바른 죄의식을 갖지 못하게 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죄는 요란한 광기를 일으키며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올바른 사물판단 능력을 흐리게 한다.

다시 말해 당혹스런 논리, 사람을 무력화시키는 달콤한 약속, 혼란스럽게 하는 욕망,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지나친 신뢰, 잘못된 목적으로 죄와 싸우도록 유도하는 것과 같은 방법들을 통해 비등해가는 정욕을 의식하지 못하도록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것이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니라”(호4:11). 여기서 마음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종종 판단력, 지혜, 통찰력 등을 의미한다.

죄의 정욕의 힘은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최고조에 달하지만 부분적으로 중생한 사람들에게도 비슷하게 역사한다.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죄에 대해 의식을 하지 못한다. 자신의 생명을 잃어버릴 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는 어리석다.

“에브라임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지혜가 없어서”(호7:11) 자신의 비참하고 곤고한 상태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분명한 죄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처럼 오랫동안 죄에 사로잡혀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정욕은 사람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죄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확실히 죄를 죽이기 원하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속에 있는 죄성에 대해 우선적으로 올바른 판단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도움이 되는 몇 가지가 있다.

첫째, 죄는 마음속에 은혜를 간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그 위력이 약해서 다른 사람들의 경우처럼 그를 지배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런 사람에게도 여전히 죄성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의 죄성은 죄로 인해 더욱 악화될 수 있다. 은혜를 받지 않은 사람들의 죄보다 은헤를 받은 사람들의 죄가 더 사악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따라서 스스로 깨달아 반성해야 한다.

둘째, 하나님은 믿지 않는 사람들의 영광스런 업적이나 하나님의 종들의 외형적인 행동보다 성도들 마음의 열망과 소원을 보고 거기서 더 풍부한 아름다움을 느끼신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마음속에 있는 정욕을, 사악한 사람들의 공개적인 악랄한 행동이나 성도들이 곧잘 외형적으로 범하는 죄보다 더 큰 악으로 여기신다. 그래서 그런 성도들의 마음을 더욱 질책하시고 그에게 더 많은 수치를 주신다.

당신은 이와 같은 사실을 깨닫고 자신 속에 거하는 죄성에 대해 분명한 인식을 갖기 위해 노력하라. 그래서 마음을 약화시키거나 변명하게 만드는 생각들을 청산하고 죄가 힘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하라.

 

- 죄의 위험들

죄는 속임수를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강퍅케 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못하도록 유혹한다. 강퍅함이란 완고함이다. 모든 정욕들은 발전해서 사람을 완악하게 만든다. 한때 온유했고, 하나님의 말씀과 고난을 통해서 부드러워졌던 사람이 정욕으로 인해, 더 이상 설교 말씀이나 질병 앞에서도 찔림을 받지 않고 완고해진다. 죄가 자라나면 그 종착지는 죄, 율법, 천국과 지옥 등에 대해서 거의 생각하지 않는 상태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주의하라. 당신의 정욕이 노리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심지어 정욕은 마음을 강퍅케 하고, 양심을 마비시켜서 생각을 어둡게 하고 감정과 영혼을 속인다.

둘째, 죄의 위험은 죄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징계를 불러일으킨다는 데 있다. 이 징계를 성경은 복수, 심판, 그리고 처벌이라고 말한다(시89:30-33). 하나님은 당신의 마음속에 있는 불경한 죄로 인해 당신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지만 그 분의 막대기를 통해 당신을 징계하신다. 즉, 하나님은 당신을 용서하시지만 당신이 지은 죄에 대해서는 벌을 내려 그 결과에 책임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다윗이 당한 고난을 기억해 보라.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광야로 피신했던 일을 생각하고 그에게 향한 하나님의 징계의 손길을 숙고해 보라. 하나님이 분노에 의해 당신의 아이를 죽이고 당신의 재산을 파괴하며, 분노로 당신의 뼈를 사르고, 당신을 죽이고 파멸시키며, 당신을 어둠 속에 가두었다면 당신은 그것을 대수롭게 여길 것인가?

셋째, 죄의 정욕의 위험은 사람의 일생 동안 평화와 힘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데 있다. 정욕을 죽이지 못할 때 그 정욕은 영혼에게 평화와 힘을 빼앗는다. 이 진리를 우리는 다윗의 경우에서 극명하게 볼 수 있다. 다윗은 종종 죄로 인해 자신의 뼈가 쇠하며, 자신의 영혼이 불안하고, 자신의 상처가 중하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조금 지나면 당신은 하나님의 얼굴을 더 이상 보지 못할 수 있다. 아마도 내일쯤이면 당신은 기쁨과 활기를 거의 잃은 채, 기도, 성경 읽기, 설교 듣기 등과 같은 의무들을 억지로 수행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후에 당신의 삶은 고요한 평화를 전혀 맛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당신의 생애동안 당신의 뼈는 고통과 두려움으로 채워지게 될 수 있다. 확실히 하나님은 자신의 화살을 당신에게 쏘아 고통과 불안, 두려움 그리고 혼란을 만드실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저주거리와 놀림거리가 될지 모른다.

또한 하나님은 당신에게 매순간 지옥과 분노를 보여주고 하나님이 당신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깨닫게 하여 당신을 놀라게 하실지도 모른다. 그 결과 당신의 상처는 계속 흘러 마르지 않고 당신의 영혼은 위로받기를 거절하게 될 것이다.

넷째, 죄는 사람을 영원히 파멸시킬 수 있는 위험을 가지고 있다. 사람이 계속해서 죄의 권세 아래 있다면 하나님으로부터 영원한 분리와 파멸의 위협이 그들을 사로잡게 된다. 이 점을 히3:12와 히10:38이 잘 말해주고 있다.

결국 하나님의 규칙은 이와 같다. 즉, 하나님을 떠나 불신앙을 통해 다시 죄악의 길로 돌아선 영혼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가 파멸할 때까지 계속 그에게서 분노가 떠나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갈6:8).

누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다”한 말의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육신을 좇지 않고 영을 좇는 사람”만이 그 주장을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스스로를 판단한다. 첫째는 자신의 인격이고 둘째는 자신의 행동 양식이다. 사람은 자신의 인격에 대해 좋은 증거들을 가지고 호의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더 중요한 점은 자신의 사악한 행동 양식이 파멸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판단 능력이 없다면 그는 무신론자이다.

물론 사악한 행동 양식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개인적 관심의 증거들을 내팽개친다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들이 그 증거들을 삶 속에서 지키지 못한다는 의미이다. 사람은 자신의 사악한 행동 양식이 죽음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판단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그 판단을 통해 자극을 받고 죄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해야 한다. 실로 우리 영혼이 죄의 정욕의 얽매임에서 해방되고자 한다면 이 점을 숙고해야 한다.

 

- 죄의 사악함

죄의 위험은 미래에 속하는 것이지만 죄의 악은 현재와 관련된 것이다. 정욕을 죽이지 못할 때 부수적으로 동반하는 많은 악들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죄는 성도의 마음에 거하도록 보내진 성령을 근심케 한다. 부드러운 사람이 친구의 무례함을 보고 근심하는 것처럼 성령은 죄의 정욕을 보면 근심하게 된다. 우리에게 어떤 고통과 근심도 주지 않는 성령을 우리가 매일의 삶 속에서 근심시킨다면 정말 배은망덕한 일이 아닌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들이 마음과 생각을 항상 정결케 하고 모든 영역에서 거룩함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들 속에 거하여 그들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만들고 그들과 만나주시는 성령 때문이다.

둘째, 죄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시 상처를 입히는 악을 행한다. 또한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새사람도 그 죄를 통해 상처를 입게 된다. 실로 죄는 그리스도의 사랑의 힘을 빼앗고 대적자인 사탄의 욕망을 채워준다. 죄의 속임수를 통해 주님을 완전히 저버리는 행위는 주님을 다시 못박는 행위와 같다.

셋째, 죄는 이 세상에서 사람의 유용성을 말살시킨다. 그래서 죄의 지배 아래에 놓인 사람은 아무리 노력할지라도 하나님의 축복을 거의 받지 못하게 된다. 실로 이 세상은 신앙을 공헌하지만 스스로를 괴멸시키는 불쌍한 영혼들로 가득차 있다. 정말로 아름다운 영광의 빛속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은 매우 극소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황폐하여 거의 쓸모없는 사람들이다. 그 원인은 많은 사람들이 마음속에 자신들의 영을 삼키는 정욕들을 계속 품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들의 정욕은 벌레처럼 순종의 저변에 기생하여 매일매일 순종을 갉아 먹는다. 그래서 은혜의 효력을 증진시키는 은혜의 모든 수단과 방편들을 손상시킨다.

 

방법3 양심으로 죄를 느껴라

 

단순히 죄의식을 가졌다는 것으로는 불충분하다.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죄의 분출과 동요를 보고 당신의 양심은 괴로워야 한다. 다음과 같은 조치가 필요하다.

 

- 점점 구체적으로 죄를 느껴라

첫째, 정직하고 거룩한 율법의 관점에서 당신 속에 나타나는 죄를 양심으로 느껴라. 하나님의 율법을 당신의 양심에 가져와 타락한 당신의 성품을 율법 아래에서 점검하라. 그 율법을 통해 자극받기를 기도하라. 율법이 갖는 거룩함, 영성, 불같은 엄격함, 절대성, 그리고 내면성을 생각하고 당신이 그 앞에서 어떻게 설 수 있는지를 느껴라. 율법 안에서 주님이 얼마나 무서운 분이신지를 양심으로 크게 느껴라. 그리고 공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당신의 범죄가 마땅히 응분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양심으로 깨달으라. 율법의 정죄 능력은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은 율법에서 자유롭다고 변명할지 모른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 속에 정욕이 아직 죽지 않는 한, 당신의 양심을 정죄하는 죄의 능력에서 당신이 자유로울 수 없다.

은밀한 마음 깊은 곳에서 율법의 정죄의 능력에서 자유롭다고 항변하고, 죄의 정욕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사람은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비록 겉으로는 그런 행색을 낼지라도 그는 결코 그런 영적인 증거들을 가질 수 없다.

율법의 목적은 당신 속에 있는 죄를 발견하고 그 죄에 대해 당신 영혼을 일깨워 겸손하게 만드는 데 있다. 한마디로 그것은 죄를 반사시켜 주는 거울이다. 여기서 당신이 자신의 죄를 대면하기를 거절한다면 그것은 당신의 마음이 강퍅하고 죄의 속임수에 넘어갔다는 증거가 된다.

실로 신앙을 공언했던 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배교했다. 그들은 율법에서 자신들이 해방된 사람처럼 자부하고 율법의 안내를 전혀 받지 않았다. 그 결과 그들은 율법을 통해 자신들의 죄를 판단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이런 태도를 통해 조금씩 죄의 원리가 그들 속에 파고들어 그들의 실제적인 이해력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을 사로잡게 되자 그들의 의지와 감정은 불경한 모든 죄에 노출되게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토대로 나는 정욕과 타락에 대해서 주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율법의 소리에 당신의 양심이 부지런히 귀기울일 것을 촉구한다. 실로 당신의 귀가 열려 있다면 율법의 소리에 당신은 떨림으로 땅에 엎드려지고, 당신 속은 놀람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둘째, 당신은 당신의 정욕을 복음의 빛 속에서 조명해야 한다. 이것은 복음에서 위로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더욱 자신의 죄를 인식하기 위함이다. 당신이 찌른 주님을 바라보고 비통해 하라. 그리고 당신의 영혼에게 이렇게 말하라. “내가 무엇을 했는가? 내가 어떻게 그 큰 사랑과 자비, 보혈, 은혜를 경멸하고 짓밟았는가? 보답이 이런 것이었는가? 주님께 이런 식으로 보상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씻음을 받고 성령이 내주하게 된 나의 마음을 이런 식으로 내가 더럽혔단 말인가? 어떻게 그분 앞에서 뻔뻔스레 머리를 들 수 있는가? 그분과의 교제를 너무나 소홀히 다루어 나의 정욕으로 인해 나의 마음속에서 그분의 설 자리가 거의 사라졌던 것은 아닌가? 이 큰 구원을 무시한 내가 어떻게 심판을 회피할 수 있단 말인가? 마음 속에 정욕을 품기 위해서 사랑, 자비, 은혜, 선하심, 평화, 기쁨, 위로 등을 보두 저버렸고 그것들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고 말았다.”

하나님 아버지의 도움을 받았던 내가 오히려 그 분의 얼굴 앞에서 그 분을 노하게 만들었단 말인가? 나의 영혼이 씻김을 받았던 이유가 단지 새로운 죄를 짓기 위함이었는가? 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을 훼손시키는 행동들을 나는 계속할 것인가? 나의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주는 성령을 매일 근심시킬 것인가? 매일 당신의 양심에 다음과 같은 약속을 지키게 하라. 즉, 죄로 악화되기 전에 죄에 맞서 양심을 세우겠다는 다짐이다.

 

- 구체적인 은혜와 죄성을 숙고하라

첫째, 특별히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한 인내와 참으심을 고찰하라. 만약 하나님의 당신의 죄를 보고 당신을 이 세상의 수치거리와 영원한 분노의 대상으로 만들려고 하셨다면 어떤 조치를 취하셨을지를 숙고해 보라.

둘째, 죄의 속임수로 인해 거의 강퍅해진 당신이었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무한하고 풍부한 은혜로 자주 당신을 회복시키시고 그 분과 다시 교제할 수 있도록 그동안 역사하셨다! 그동안 당신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헤는 점점 쇠퇴해갔고, 당신은 의무, 규율, 기도, 그리고 묵상과 같은 일에 흥미를 잃었다는 사실을 당신도 인정하지 않는가?

셋째, 하나님이 은혜의 섭리 가운데 당신에게 베푼 구원, 고통, 자비, 즐거움 등은 모두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그런 섭리를 통해 당신의 양심에 죄의식의 짐을 지워야 한다. 그리고 당신 속에 거하는 타락한 죄들로 인해 그 상처를 인식하고 주님 앞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석고대죄하며 철저히 괴로워하라.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구원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양심이 죄의식을 희석시킨다면 당신의 영혼은 죄를 죽이려고 결코 힘쓰지 않을 것이다.

 

방법4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기를 끊임없이 갈망하라

 

일단 죄를 심각하게 인식하게 되면 그 죄의 권세에서 해방되기 위해 끊임없이 갈망해야 한다. 한순간이라도 당신의 마음 속에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려는 생각이 있으면 안 된다. 영적인 구원을 갈망하는 행위는 그 자체가 은혜가 되어, 영혼으로 하여금 그것이 추구하는 대상을 닮도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죄와 대항하고자 하는 강력한 열망이 있었다. 죄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열망이 없다면 결코 당신은 구원 받을 수 없다.

이 점을 확실히 깨닫는다면 당신의 마음은 경계심을 갖고 대적자와 싸우기 위해 자신에게 유리한 모든 수단과 기회들을 강구할 것이다. 강력한 열망을 가져야 되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열망을 통해 우리의 믿음과 소망이 힘을 발휘하게 되고,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을 향하여 움직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당신의 마음속에서 항상 갈망하는 자세를 견지하라. 바라고 울부짖으라. “항상 기도하라”는 강력한 열망의 본뜻이다.

 

방법5 성품 속에 죄가 뿌리를 내리고 있는지 살펴라

 

당신을 혼란에 빠뜨리는 죄가 당신의 성품 속에 침투하여 뿌리를 내리고 당신의 체질로 정착하여 세력을 확산시키고 있는지 살펴라. 확실히 어떤 죄들은 사람들의 기질과 성향으로 굳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 무조건 죄를 자신의 기질 탓으로 돌리지 말라

우리의 성품이 타락하고 부패했기 때문에 우리의 천성적인 기질에 죄의 자양분이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특정한 죄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당신의 성품 속에 정욕이 특정한 모습으로 분출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 분출로 인하여 당신은 수치를 당하는 것이다.

 

- 죄의 성향은 사탄에게 유리하게 작용한다.

당신에게 각별한 경각심과 주의, 그리고 부지런함이 없다면 그들이 당신의 영혼을 확실히 잡아 삼킬 것이다. 실로 수많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이유로 서둘러 지옥으로 떨어졌다.

 

- 하나님의 방법으로 몸을 복종시켜라

“내가 내 몸을 쳐서 복종케 한다”(고전9:27). 몸을 복종시키는 행위는 죄를 죽이기 위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이것은 죄의 천성적인 뿌리를 억제하고, 죄의 기름진 토양을 제거하여 그것을 시들게 만든다.

첫째, 자신의 몸을 외형적으로 손상시키고 약화시키는 행위 자체가 어떤 위력이 있거나, 그런 행위를 통해 자동적으로 죄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둘째, 금식이나 철야기도와 같은 수단들이 그 자체에 어떤 마술적인 힘이 있기 때문에 죄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이런 수단들은 성령이 자신의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서 때때로 사용하는 도구에 불과한 것이다.

요약한다면 죄가 우리의 천성적인 기질이나 성향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의 영혼이 해야 할 일은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방법으로 그와 같은 죄의 천성적인 뿌리들을 억제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법6 죄에 대항하여 항상 깨어 있으라

 

깨어 있는 것은 실로 우리의 의무이다(마13:37). 깨어 있는 삶은 이런 것이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타락한 성품의 분출을 막기 위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다윗은 이 의무를 스스로 실천하려고 노력했다. “내가 또한 그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나니”(시18:23).

죄의 상황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오히려 즐기는 사람은 결국 죄를 짓게 된다는 사실을 명심하라. 죄의 유혹의 모험에 빠져드는 사람은 결국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

 

방법7 처음부터 죄에 대해 결사적으로 대항하라

 

죄가 당신의 마음 밭에 결코 서지 못하도록 항거하라. 죄는 일단 한 걸음을 내딛으면 그 다음 발걸음을 취한다. 죄가 진행되지 못하도록 그것을 묶어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강바닥에 흐르는 물과 같다. 그래서 죄가 일단 자리를 잡게 되면 물줄기처럼 자신의 경로를 따라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그러므로 분출된 죄를 더 이상 진행되지 못하도록 막는 일보다 차라리 처음부터 그것을 원천봉쇄하는 일이 더 쉽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은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4-15).

 

방법8 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고 겸손하라

 

-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을 묵상하라

하나님의 탁월한 위엄을 묵상하면서, 그것에 비해 너무나 동떨어진 당신의 초라한 모습을 생각하라. 이와 같은 생각을 많이 하게 되면 당신의 자신의 사악함을 깨닫게 되고, 속에 거하는 죄의 뿌리를 잘라낼 수 있다. 마음의 교만을 게거하고 영혼을 겸손케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비참함을 많이 생각하라. 동시에 하나님의 위대함을 깊이 묵상하라.

 

- 자신의 지식이 미천함을 묵상하라

하나님에 대한 당신의 지식이 미천하다는 사실을 많이 생각하라. 이와 같은 성찰을 함으로써 교만한 마음을 낮추기 위해 노력하라. 당신은 그 분의 영광스런 존재의 빛을 감당할 수 없다.

바울은 율법의 영광에 비교해서 복음의 빛의 영광을 높이 칭송하고, 지금 어두움을 일으켰던 수건이 사라져 우리가 주님의 영광을 “수건을 벗은 얼굴”로 바라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우리가 “거울을 보는 것같이 희미하게” 그 분을 본다고 말했다(고후3:18). 거울은 사물을 뚜렷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기능이 없다. 거울이 있다고 하더라도 부족한 지식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바울은 ‘부분적으로’ 즉 천국의 실체에 대해 오직 뒷부분만을 보았다고 진술한다.

 

- 하나님의 무한하신 속성을 묵상하라

성경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속성에 대해 말한다.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딤전6:16). 하나님께 접근하여 그 분을 볼 수 있는 피조물은 아무도 없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볼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둠이 조금도 없는 하나님의 빛은 피조물의 접근을 허용치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존재와 관련해서 다른 사람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지식을 갖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마음속에서 우리의 이해에 걸맞은 존재로 하나님을 형상화하는 것은 나무와 돌로 하나님을 만드는 것과 진배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생각할 때 최선책은 그 분의 존재에 대해 우리가 아무런 생각도 가질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믿고 경배하는 것뿐이다. 단지 가르친 바대로 하나님이 무한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한 분이심을 고백할 따름인 것이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무소부재하심, 광대하심, 무한하심, 그리고 그 분의 영원성에 대해 토론할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말과 개념들을 가지고 이야기할 뿐이며 우리가 실제로 그것들은 아는 것은 아니다. 실로 우리가 보는 것은 영원함과 무한함의 뒷모습에 불과하다.

같은 본질 속에서 세 개의 다른 인격이 존재하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우리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가? 성자 하나님의 나심, 성령의 나오심, 그리고 그 둘 간의 차이를 누가 정확히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있는 상상할 수 없는 무한한 괴리감으로 인해 우리는 어둠 속에 놓여 있기 때문에 그 분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그 분의 온전한 속성을 명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방식은 그 분의 존재 상태를 통해서가 아니라 그 분의 행위를 통해서이다. 그런 지식도 욥이 말한 것처럼 매우 보잘 것 없다!

 

- 믿음으로 하나님을 알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을 통한 길밖에는 없다. 하나님과 그 분의 경륜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뿐이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고후5:7). 이 믿음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다.

믿음은 주님에 대한 증거의 말씀을 통해 생겨난다. 이 믿음의 성격은 그 증거에 동의하겠다는 표시이다. 믿음은 거울처럼 희미하게 보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이런 믿음을 통해 우리가 갖는 자식은 여전히 어둡고 매우 작은 것이다.

그러나 이 어두움과 연약함이 우리의 태만과 불순종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에 대한 지식을 알게 하신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즉, 그 분을 사랑하고 섬기며, 믿고 순종하면서, 죄를 용서하는 창조자 하나님께 마땅히 드려야 하는 영광과 존귀를 돌리도록 하는 데 있었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지식만큼 하나님의 형상의 모습으로 철저하게 변화되지 않았음을 스스로 자각해야 한다.

다른 것과 비교해서 우리가 복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알게 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영광스럽고 매우 특출한 것이다. 복음 안에서 하나님의 뜻이 그 어떤 다른 방법보다 더 명쾌하게 선포되었다.

신지식과 관련해서 성도와 불신자의 차이는 무엇을 안다는 것보다 아는 방법에서 극명히 나타난다. 불신자들의 지식은 올바른 방법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구원받기 위해 그런 지식을 소유하지 않는다. 또한 거룩한 천사의 빛 속에서 그런 지식을 갖는 것도 아니다. 성도의 탁월한 위치는 그가 많은 진리를 알고 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짧은 이해지만 그 진리를 구원의 빛 즉 하나님의 영의 빛 속에서 바라본다는 데 있다. 그래서 그것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게 되고 더 이상 호기심 어린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과 성령을 통해 자신에 속한 영혼들에게 아버지로서의 하나님, 언약의 하나님,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계시하시고, 모든 필요한 방법을 동원해 이 세상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순종해야 할지를 가르치신다. 그리하여 우리를 하나님의 품 안으로 인도하고 나중에 천국에서 하나님을 기뻐하며 영원까지 살 수 있게 하신다.

하지만 여전히 다음과 같은 한계가 있다.

첫째, 복음의 모든 계시의 의도는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을 드러내고 하나님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데 있지 않다. 복음의 계시는 단순히 믿음, 사랑, 순종,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은총을 얻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계시하는 데 그 목적이 있다.

둘째, 우리의 마음은 우둔하고 더뎌서 계시된 말씀 안에 있는 실체들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도록 만드시고, 그분의 말씀으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결론으로 이제 지금까지 논의한 내용의 목적과 그 유용성을 생각해보자. 확실히 하나님의 형용할 수 없는 위대하심과 그 분과 우리 사이에 있는 엄청난 괴리감을 우리가 제대로 인식한다면 우리의 영혼은 그 분에 대해 거룩하고 두려운 경외심으로 채워져 모든 정욕과 맞서 싸울 수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무소부재하심에 대해 경외하는 마음을 항상 잃지 말라. 그러면 우리의 영혼은 모든 불경스런 행동을 경계하게 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을 묵상하라. 실로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당신의 비천함을 알고 당신의 천성이 그 분의 본질적인 영광을 이해하기에는 너무나 왜소하다는 사실을 항상 자각하라.

 

방법9 죄 앞에서 스스로에게 평안하다고 말하지 말라

 

하나님이 당신에게 죄와 그 뿌리에 대해 찔림을 주고 죄가 분출될 때마다 당신으로 하여금 불안하게 만들 때, 하나님이 말씀하기 전에 당신이 스스로에게 평안하다고 말하려는 유혹을 경계하라. 대신 하나님이 당신의 영혼에게 하시는 말씀에 귀 기울이라. 이와 같은 경청의 자세가 없다면 당신의 마음은 죄의 속임수에 노출되고 말 것이다.

 

- 하나님의 은혜는 그 분의 위대한 특권이자 주권이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는 분’으로서 자신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부르시고 그들을 성화시키신다.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름을 받고 의롭다 함을 얻어 구원받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평화를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성도들을 대할 때 하나님은 본질적으로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이러한 위로는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들에게 주시는 선한 은혜 증에 하나이다. 이 은혜를 하나님은 또한 자신의 뜻에 따라 베푸신다. 은혜의 상태에 있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이 특별한 은총인 평화와 기쁨을 주실 때도 우리가 예측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자신의 특별 은총을 베푸시는 것이다.

 

- 평화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예수님의 특권이기도 하다.

성부 하나님이 자신의 뜻에 따라 평화를 창조할 수 있는 것처럼, 성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도 성도들의 마음속에 평화를 말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라오디게아교회가 스스로 자신의 상처들을 거짓되게 치료하고, 자신들에게 평화를 말할 때 주님은 그들에게 “나는 아멘이여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다”(계3:14)라고 말씀하셨다.

당신이 두 가지 점을 주목했다면 이제 나는 우리의 평화가 스스로 지어낸 평화인지 아니면 하나님이 주신 평화인지를 분별해 주는 몇 가지 규칙들을 소개하겠다.

 

- 평화를 분별하는 몇 가지 규칙

 

* 규칙1. 자신의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코 참된 평화는 오지 않는다.

확실히 사람들은 스스로에게 평화를 말한다. 그렇게 하여 자신의 죄를 가증히 여기지도 않고 그렇게 하는 자신들을 혐오하지도 않는다. 죄를 증오하지 않는다면, 결국 하나님에 의해 치유받기보다는 스스로를 치료하는 셈이 된다. 이에 반해 치유와 평화를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주님을 찔렀다는 사실을 알고 애통하게 된다(슥12:10). 심지어 그분을 위해 애통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분에게 상처를 준 자신들의 죄를 증오하게 된다.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를 접하고 그 분과 교제할 때 우리는 거기서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모습, 거룩함, 능력, 그리고 사랑의 모습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믿음을 통해 치유와 평화를 구할 때 우리는 특별히 언약의 피, 즉 그 분의 고난을 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 분의 채찍 맞음을 통해 우리가 나음을 입었고 “그분이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입었기 때문이다.

치유와 평화를 얻기 위해 성령의 힘과 하나님의 마음으로 주님을 바라보는 사람은 자신의 죄를 증오하게 된다. 확실히 치유와 평화를 갈구하는 사람은 진정한 치유자를 찾아가서 올바른 방법으로 치유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언약의 약속 위에서 마음의 안정을 추구해야 한다. 한편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고 할 때 자신을 괴롭히고 상처를 준 죄를 증오하고 혐오하지 않는다면 그 평화는 하나님이 주신 평화가 아니라 스스로 만든 평화이다. 따라서 상쳐의 허물만 벗겼을 뿐 그 내부는 그대로 있는 셈이 되어 상처는 더욱 곪고 부패해져 나중에 더 큰 위험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죄의 고통만 느낄 뿐 죄와 동반되는 불결함과 타락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않는 자세를 우리는 피해야 한다. 신앙을 공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평화의 뿌리에는 속임수가 자리잡고 있다. 때문에 진정한 평화가 없다. 그들은 온 힘을 다해 자비와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외형상으로 하나님과 놀라운 교제의 삶을 살기도 한다. 심지어 그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자신의 죄와 어리석음을 슬퍼하기도 한다. 그런 행동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죄에서 완전히 떠났다고 착각한다. 또한 한시적으로 마음에 마족을 주는 평화를 누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들의 마음을 좀 더 철저히 해부하면 그들 속에는 아직도 어리석음이 은밀히 도사리고 있다. 적어도 그들은 마땅히 해야 할 만큼 자신의 죄를 혐오하지 않는다. 그 결과 그들이 누리는 평화는 연약해져서 썩게 된다.

 

* 규칙2. 자신의 신념과 원리에 근거해서 스스로에게 평화를 선언한다면 그것은 거짓 평화이다.

그것은 오래 지속될 수 없다. 죄로 인해 상처를 받은 사람이 있다. 그는 그 죄 때문에 마음에 가책을 느낀다. 복음에 합당하게 올바로 살지 않았다는 자책 때문이다. 그때 그는 빛 속에서 자신이 어떤 길을 가야할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약속들만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는 약임을 알고 그는 그 약속들을 의지하며 좇아간다. 하나님의 약속을 자신의 상태에 적용하고 평화를 얻는다. 하지만 이것은 공허한 신기룰 좇는 행위이다. 이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시는 성령의 사역이 아니라, 지적이고 이성적인 영혼의 단순한 활동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사람들 중에는 단순히 이성을 가진 자연인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깨달음 속에서 마음에 죄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있고, 더 나아가 진실로 거듭난 성도들도 있다. 중생한 사람은 두 유형의 모습을 모두 공유한다. 그 결과 그는 때때로 이성적 원리에서 개달음을 가지고 행동한다. 하지만 그의 진정한 영적 삶은 감정의 원리에 지배를 받지 않는다. 앞에서 말한 사람은 단순히 죄의식과 깨달음의 원리에서 행동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을 통해 자신의 천성적인 능력을 함양시킬 수는 있지만 결코 그에게는 성령의 물결이 일어나지 않는다.

 

*첫번째 질문: 우리가 상처를 치유하고 마음의 평화를 추구할 때,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인지 아니면 성령이 함께 하는 것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당신이 여전히 거짓된 평화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런 당신에게 신속한 깨우침을 주실 것이다. “온유한 자를 공의로 지도하심이여 온유한 자에게 그 도를 가르치시리로다”(시25:9). 하나님은 당신의 실수를 계속 좌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째, 이런 사람이 스스로에게 평화를 말할 때 그는 보통 기다리지 않고 말한다. 하지만 기다림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는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믿음의 행동을 보여주지 못한다. 때때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을 떠난 자녀들이 돌아올 때 잠시 문 앞에서 기다리게 하고 바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하신다.

셋째, 이렇게 해서 자신들의 양심, 생각, 이성 그리고 영혼을 안정시킬 수 있다 할지라도 그들의 마음은 진정한 안식과 은혜의 만족으로 소생되지 못한다.

넷째, 더욱이 스스로 평안을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삶을 바로잡을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평강의 말씀을 들은 영혼은 더 이상 완악한 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를 소유하게 된다. 또한 그 의지만큼 그의 영혼은 감미로움을 맛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하게 된다.

 

* 규칙3. 자신에게 평안을 말하는 것은 경박한 행동이다.

단순히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자비의 말씀을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말씀이 믿음 안으로 융화되어야 한다. 그 때 비로소 그 말씀은 영혼에게 유익을 끼칠 수 있다.

 

* 규칙4. 죄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사람의 평화는 거짓 평화이다.

우리의 영혼이 올바르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모든 명령들을 똑같이 지켜야 한다. 하나님은 죄에 있는 우리를 의롭게 만드는 분이시면서 동시에 우리 속에 있는 극히 작은 죄라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는 분이시다. 하나님의 눈은 매우 정결해서 그 앞에서는 부정이 설 수가 없다.

 

*규칙5. 교만한 양심에 찾아오는 평화는 거짓 평화이다.

양심에게 스스로 평강을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시는 겸손함을 좀처럼 갖지 못한다. 하나님의 평강은 다윗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며 낮아지게 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좇아 나를 긍휼히 여기시며 주의 많은 자비를 좇아 내 죄과를 도말하소서”(시51:1). 하지만 스스로 평강을 외치는 사람은 다윗이 나단의 말을 듣고 취했던 그런 깊은 겸손함을 결코 보여주지 못한다.

 

두 번째 질문: 우리의 상처와 관련해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통해 위안을 삼으려고 할 때 그 시기는 언제가 적당한가?

일반적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하는 평강은 빨리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다. 그 말씀은 저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으로 임하기 때문에 영혼은 그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세 번째 질문: 하나님이 평강하라고 말씀하실 때를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첫째,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 하나님의 목소리를 분별할 수 있는 것은 믿음 안에 있는 비밀스런 본능이다. 동정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갔을 때 엘리사벳의 뱃속에서 아이가 뛰었던 것처럼 마음속에 있는 믿음은 그리스도가 가까이 오실 때 그것을 알고 뛰게 된다.

다음과 같은 기준을 항상 명심하라. 즉, 주님이 말씀하실 때 그 분은 결코 사람의 방식으로 말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주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있다. 당신의 마음은 속에서 뜨거움을 느끼게 된다. 주님은 자신의 손을 문틈으로 내미는 것처럼 말씀하신다(아5:4). 그리고 그분의 영으로 당신을 사로잡기 위해 당신의 마음속으로 들어가신다.

항상 자신의 감각을 훈련시키고 선과 악을 분별하며 그리스도가 말씀하시는 방식, 성령의 역사, 그리고 그것이 가져다주는 효과들을 끊임없이 관찰하면서 판단력과 경험을 쌓아가는 사람은 확실히 주님이 말씀하시는 때를 잘 분별한다.

둘째, 또한 주님은 자신의 말씀이 시기적으로 당신의 영혼에게 유익함이 된다고 판단될 때 말씀하신다. 주님은 말씀을 통해 당신이 겸손해질 수 있고, 정결해지며, 순종과 함께 자신을 비울 수 있다고 여겨질 때, 그 때를 놓치지 않고 말씀하시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