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한 주일 동안, 저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서서 지냈습니다. 심명덕 권사님과 고수옥 권사님의 장례를 하루 사이로 치뤄야 했고, 갑작스러운 교통 사고로 인해 세 번의 대수술을 받고 중환자실에 누워있는 강준이 권사님과 함께 죽음의 세력과 투쟁을 해야 했습니다. 강준이 권사님의 상태가 아직 안정이 되지 않아, 여러분에게 지속적인 기도를 청합니다. 손상된 척추 신경이 이 며칠 사이에 회복되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진심으로 그분을 위해 기도할 때, 영혼의 깊은 골짜기에서 그분은 우리가 함께 있음을 확인하고 힘을 얻을 것입니다. 또한 사랑하는 아내를 잃고 허전해 하실 이효근 장로님과 전병구 장로님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말이지, 지금 살아있다고 해서 내일도 살아 있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생명이 내일 자동적으로 연장되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하루 하루,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을 선사받고 살아갑니다. 일본의 기독교 지도자 우찌무라 간조가 말했듯, 하루 하루 일생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의 인생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하나님 없이 살면서 영생을 맛보지 못하고 인생을 허비하면, 내일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진실로 참된 인생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하루 하루 일생을 살듯 진지하게 그리고 성심껏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통해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선물이 바로 이같은 삶입니다. ‘일일 일생’ 즉 하루에 천년을 살아가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하십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이 받아야 할 가장 귀한 선물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마치 초상집과 같습니다. 신기하게도, 유대인들의 초상 관습과 우리 한국 사람들의 초상 관습이 비슷한 점이 많습니다. 초상집에는 많은 사람들이 들끓어야 좋다는 생각도 그렇고, 곡성이 끊이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초상이 나면 전문적으로 곡하는 사람들을 고용했습니다. 그 사람들은 슬퍼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는데, 초상집의 분위기를 돋구기 위해 돈을 받고 곡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곡성이 그치면 안된다는 생각이 있어서, 상주들이 교대로 서서 눈물도 없이 "아이고, 아이고"하고 소리를 냅니다. 어릴 적에 이 모습이 제게 얼마나 이상하게 보이던지요. 어떤 때는 빙글 빙글 웃어가면서, 입으로는 "아이고, 아이고"라고 말합니다. 초상집은 상주들의 곡성과 걸인들의 구걸 소리와 방문객들의 웃음소리가 합쳐서, 시끌벅적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시끌벅적하고 부산하게 사람들이 움직이는 초상집에는 뭔가, 어딘가 비어 있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웃음도 공허하고, 울음도 공허하고, 싸움도 공허하고, 모든 것이 비어있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왜 그렇습니까?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그늘이 지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초상이 모두 끝나고 죽음의 그늘에서 완전히 벗어날 때까지, 그 공허함을 지울 길이 없습니다.
2.
하나님 없는 우리의 삶이 꼭 그렇습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즐거움이 없거나, 일이 잘 안 풀리거나, 보람과 의미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겉으로 볼 때, 하나님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이나 그렇지 않은 사람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 아니, 때로는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들이 더 잘 사는 것 같고, 더 잘 되는 것 같고, 더 행복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의 중심에는 뭔가 비어있는 공허감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 생긴 빈자리에서 오는 공허감입니다.
부산하고 시끌벅적하고 때로는 박장대소하며 웃지만, 돌아서고 나면 비어있는 자리를 발견합니다. 그 비어있는 자리가, 처음에는 무시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것이 채워지지 않고는 인생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고는 자신의 하루 하루의 인생이 꿈틀대는 짐승과 별로 다를바 없다고 느껴집니다. 그것이 채워지지 않고는 온갖 유흥이 피곤할뿐이며, 온갖 업적이 무의미할뿐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채우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그 빈 자리가 왜 생겼으며, 어떻게 채울 수 있는지를 모릅니다. 이것 저것 시도해 보지만, 어디에도 해답은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의문을 해결하지 못한 채 마음에 묻어두고 살아갑니다. 그것은 마치 무덤을 마음에 품고 살아가는 것과 같습니다. 그 삶이 초상집과 같은 삶이 되어 버립니다. 마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과 같습니다. 소란스럽고 분주하고 먹고 마시고 흥청거리지만, 그 방 안에서는 마르다와 마리아가 울고 있습니다. 그 누구도, 그 어떤 일로도 채울 수 없는 빈자리가 그 집에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겉으로는 모든 것이 잘 되어가고 있는 것 같지만, 내면의 방에서는 또 다른 내가 울고 있습니다. 구원을 찾아 갈망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해결책인지 모르지만, 뭔가 혹은 누군가 이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기대하며 울고 있습니다.
3.
그러므로 우리가 누구를 대하든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세 가지 있습니다. 그 사람이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도덕적으로 흠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아무리 반기독교적인 사람이라 하더라도, 다음의 세 가지 사실은 누구에게나 공통된 진실입니다.
첫째,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이 없이는 채워지지 않는 빈 자리를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을 겉으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도 내면에서는 그것을 느끼고 있습니다.
둘째, 사람들은 그 공허감이 하나님을 떠남으로써 생긴 것이라는 것을 잘 알지 못합니다.
셋째, 그 공허감이 채워지지 않고는 인생은 껍데기입니다. 이것은, 방황하고 번민하다가 하나님을 찾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 없는 삶은 허비요, 낭비요, 방황이요, 의미없는 몸부림이요, 향방 없는 질주임을, 하나님을 찾고 나서야 인정하게 됩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 이 세 가지의 사실을 진리로 인정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이유도,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이유도, 모두 여기에 있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내면의 상태는 다양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 관심을 보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무 관심을 보이지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배척합니다. 듣기도 싫어 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시시콜콜 따져 가면서 반박하여 복음을 전하려는 사람들의 말문을 막아 버립니다. 하지만 그들이 어떤 태도를 보이든지 상관없이, 그들 모두의 내면에서는 하나님과 분리됨으로 인해 생긴 공허감에 괴로움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 근본 조건을 아는 사람은 전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전도하자는 말은 교인의 수를 늘리자는 뜻이 아닙니다. 기독교의 세력을 확장시키자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을 치료하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질병, 인간이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우주적인 질병을 해결하자는 노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이 질병을 치료하자는 것입니다. 그분을 통해 참된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 빈 자리를 채우고, 거기서 오는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매일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그분의 성령에 이끌려 살아가는 삶을 말합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내면에 있던 그 빈 자리는 생명수의 샘물로 채워져, 우리의 삶을 늘 새롭게 해 줄 것입니다. 우리의 얼굴 표정이 달라질 것이고, 걸음 걸이가 달라질 것이며, 말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영성 생활입니다.
4.
우리는 과연 우리 내면에 성령의 샘물을 가지고 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과 연결되어, 그분으로부터 흘러들어오는 진리와 사랑과 은혜를 매일 경험하며 살고 있습니까? 이런 질문을 하면, "아니, 세상에 완전한 사람이 어디 있는가? 그렇게 따지자면, 전도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라고 질문할 분이 계실 것입니다. 제가 지금 묻고 있는 것은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을 살고 있는가?"가 아닙니다.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써 생긴 변화가 하나라도 있는가?"라는 질문입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말해줄 수 있는 이야기가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드류 대학교(Drew University)의 전도학 교수인 레너드 스윗(Leonard Sweet)이 지은 '나를 미치게 하는 예수'(Jesus Drives Me Crazy)라는 책에 나온 일화를 소개합니다. 어느 여인이 매 주일 교회 문밖 계단에 앉아 기다리며, 건물 안으로 우르르 들어갔다가 얼마 후 다시 나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자세히 관찰했다고 합니다. 몇 주일 후, 그 여인은 교회에 가지 않기로 결심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고 합니다.
나는 그들의 얼굴을 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불안과 자기 집착에 찌들어 있었다. 내 얼굴과 다를 바 없었다. 저 종교 활동의 결과로 뭔가 새 빛을 발하는 얼굴을 하나라도 찾을 수만 있었다면, 나는 당연히 신나게 교회당 안으로 뛰어들어가 제단 앞에 엎드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단 하나도 없었다. 씨앗이 자랐고 빛줄기가 비쳤고 음악이 들렸다는 단서조차 없었다(53쪽).
자, 이쯤 되었다면, 그 여인이 보았던 그 교인들은 예배당에 드나들기는 했지만, 실제로 예수를 믿지 않고 있었음에 분명합니다. 아니면, 믿기는 했지만, 그 믿음이 그들의 삶에 그 어떤 변화도 일으킬 수 없을 만큼, 영성 생활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 모습으로는 전도는 불가능합니다. 아니, 그들은 그들 자신들에게 먼저 전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나오고 있다고 해서 모두 참된 믿음에 살고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것이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 교회 예배당 입구에서 우리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얼굴빛과 우리들의 얼굴빛에서 뭔가 차이를 발견하고, "이게 무엇인가? 저들에게는 있는데 내게는 없는 이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마주하게 될까요? 아니면, 위에 인용한 그 여인의 말처럼, "저들이 나와 다를 바가 무엇인가?"라고 실망하게 될까요? 영원하신 하나님, 진리의 하나님, 참된 생명의 하나님과 연결되어 사는 사람들의 빛깔이 과연 우리에게 있습니까?
먼저, 우리 자신에게 전도하십시다. 우리의 믿음이 살아나게 하십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참된 하나님과 연결되어 우리 내면의 깊은 구멍에서 성령의 생수가 터져 나오게 되도록 하십시다. 그 일을 위해 영성 생활에 대해 진지하게 배우고 연습하십시다. 우리 안에 계시는 부활의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 현존의 증거를 드러내도록 삶을 구조 조정하십시다. 이번 주 수요일부터 시작되는 ‘특별기도학교’에 여러분을 다시 한 번 초청합니다. 밤에 나오지 못하는 분들은 수요일 오전에 모이는 ‘관상기도회’에 나오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삶이 초상집이 아니라 잔치집이 되도록 하십시다. 초상집과 잔치집은 겉으로 보아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하지만 내면을 보면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 차이가 우리의 삶에 있어야 합니다.
5.
이렇게 되고 나면,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의 딱한 사정을 볼 때, 그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는 열심이 우리에게 생겨납니다. 물론, 그 사람들이 겉으로는 우리보다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겉만 보지 말아야 합니다. 그 사람들의 내면을 보고 죽음의 냄새가 나는 깊은 구멍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의 웃음에 깃든 슬픔을 느껴야 합니다. 그들의 저항과 박해에 숨겨진 절규를 들어야 합니다. 그들의 무관심에 감추어진 말 없는 갈증을 느껴야 합니다. 내면의 그 깊은 구멍을 채우지 않고는 결코 행복할 수 없는 그분들의 진상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근원적인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 손을 뻗쳐야 합니다.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마르다가 무덤을 막고 있는 돌 마개를 여는 것 같은 수고를 요구합니다. 마치 의사의 치료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환자처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에게 때로 저항하고 반대하고 박해합니다. 때로는 그것이 몇 년 동안 지속될 때도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그만큼 강하기 때문입니다. 악의 세력이 그만큼 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나 잊지 말 것이 있습니다. 저항하는 것은 혹은 박해하는 것은 그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의 영혼을 영구히 지배하고 싶어하는 악한 세력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저항이 강해지고 박해가 심해질수록, 더 더욱 안타깝고 불쌍한 심정으로 인내해야 합니다. 그 사람을 위해 끊임 없이 기도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때가 왔을 때, 살아계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안내해야 합니다.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예수님은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내 말을 들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아버지께서는 언제나 내 말을 들어주신다는 것을 압니다" (41-42절). 그분은 이미 나사로를 죽음 가운데서 건져내기 위해 충분히 기도했다는 뜻입니다. 무덤 앞에서 "아버지, 나사로를 살려 주십시오"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죽은 것을 아는 순간부터 나흘동안 내내 기도했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제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신다는 믿음 위에 서서 이렇게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나사로를 살린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을 하나님께 인도하기 위해 우리가 할 일은 바로 이 ‘사랑의 기도’입니다. 그리고 때가 되었을 때, 우리가 이미 걸은 길, 우리가 이미 경험한 것을 나누면서 안내하면 됩니다. 그것이 전도입니다. 그것이 한 사람의 영혼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죽은 자의 땅에서 산 자의 땅으로, 초상집에서 잔치집으로 불러내는 일입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할 수 있는 일 중, 이보다 더 귀한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6.
저는 오늘, 우리 교우 중 이택수 집사님의 간증을 여러분과 나누려고 합니다. 그분이 얼마 전에 직장 관계로 한국에 출장을 가셨다가, 거래 문제로 가까와진 어떤 분을 주님께로 인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분의 영혼을 위해 오래도록 기도하다가 때가 되었을 때 온유하고 겸손하게 그분을 주님께 인도한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지를, 보시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가슴 벅찬, 하나님이 허락하셨던, 좋은 경험이었읍니다. 저의 직장 상사였던 정국장께서 저와 함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 "나는 지금 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영접합니다. 내 안에 들어오셔서 나를 주님이 원하시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옵소서, 아멘"
저의 한국 출장 마지막 날이었던 지난 3월9일, 그분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다니는 아이들 때문에 마음 고생이 너무도 심하다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분과의 만남에서는 자주 그러했듯이 저는 그날도 하나님 이야기를 또한 많이 하였습니다. 그날은 좀 무례한 말로 제가 시작하였습니다. "국장님이 변하셔야 됩니다." 그랬더니 "아니, 나보고 어떻게 더이상 변하란 말인가. 우리 같은 부모가 어디 있단 말인가?"고 약간 화를 내셨습니다. 제가 말을 이었습니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 해결책일 수 있습니다. 마음의 문을 여시고 예수님을 국장님 삶을 변화시킬 분으로 모셔 보십시요. 그러면 분명히 국장님 삶이 변화될 것입니다." 이 말에 그분은 반색하며 물었습니다. "그것은 내가 많이 들어 본 이야기이고, 또 잘 아는 이야기이지. 그런데, 내가 잘 모르겠는 것은, 과연 어떻게 마음을 열라는 것인지, 그 뜻을 모르겠단 말이야. 그 구체적인 방법을 좀 얘기해 봐."
기회가 왔다는 생각으로 제가 말했습니다. "국장님,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에 대하여 많은 성경 전문가들이 성경을 근거로하여 그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한 책을 보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정국장과 저는 인터넷에서 그 책을 찾아보기로 하고, 서둘러서 저녁 식사를 마친 다음 근처의 PC방으로 가서 CCC 웹페이지에 있는 "사영리"를 찾았습니다.
"자연계에 자연 법칙이 있듯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도 영적 원리가 있습니다"로 시작되는 사영리를 그분과 저는 함께 같이 읽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제1 원리: "하나님은 국장님을 사랑하시고 국장님을 위한 놀라운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를 읽은 그분의 얼굴이 반색하였습니다. 저는 성령님이 역사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제 2 원리와 제 3 원리를 다 읽은 다음, 제 4 원리에 이르렀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는 요한계시록 3장 20절 말씀에 이르렀을 때, 그분은 "그런데, 어떻게 문을 여는지가 아직도 분명하지 않잖아?"고 반문하였습니다.
"문을 열고 예수님을 영접한다는 것은 나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나의 삶을 바꾸기로 본인의 의지로 결정하는 것입니다" 라고 제가 이야기하면서 "이 결정은 마치 국장님이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직장을 갈까 고민하다가, 여러 선택 중에서 공무원이 되기로 결정한 것과 똑 같습니다. 국장님 마음을 여는 것은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로 국장님의 의지로 하는 결정입니다. 그렇게하면 하나님의 그 놀라운 계획과 사랑을 경험하실 것입니다"라고 덫붙였습니다. 그분은 "그래도 좀 불분명해"하고 말하였습니다. "아니죠. 아주 분명합니다. 두 길 중에 한 길을 선택하는 결정입니다. 그렇게 하기로 결정하십시오. 국장님 인생에 참으로 중요한 순간입니다." 그랬더니 "그럼 그렇게 결정을 하지" 라고 말씀하시더군요. 하나의 영혼이 주님의 생명을 얻는 순간이었습니다. 곧바로 그분은 앞에서 말씀드렸던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계속하여 감사 기도를 번갈아 함께 드렸습니다.
글쎄요, 저는 특별히 제 삶의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직장 속에서 하나님이 저에게 주신 이 생명이 시들지 않고 왕성하게 살아서 예수의 영향력이 있는 삶을 살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직장의 환경과 저의 본래의 모습은 이러한 삶을 사는데 그렇게 만만치 않습니다.
제가 7년 전 미국에 왔을 때 미국 살기가 너무 힘들어서 왜 이런 암흑 같은 곳에 나를 보내셨느냐고 불평하는 저에게, 주님께서는 "어두운 곳에 불빛이 필요하지 않겠니"라고 세미한 음성을 주셨습니다. 저에게는 삶 속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예수님을 이야기 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주어집니다. 때로는 같이 식사하면서 이야기하고, 때로는 같이 큐티하고, 때로는 같이 기도합니다. 새로운 환경에서도 새로운 방법으로 저의 삶 속에서 주님을 전하는 기회를 하락하시는 주님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저의 영혼 또한 새로워짐을 경험합니다.
이미 삶 속에서 전도를 실천하고 계시는 많은 여러분들과, 이러한 삶을 살고자 하는 거룩한 부담을 안고 계시는 여러분과 제가 다 함께 우리 교회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단와보세요 전도사역"을 따라서 우리 각자의 삶 속에서 더욱 풍성한 열매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7.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2천년 전, 초대 교인들이 성령에 사로잡혀, 예수 그리스도의 참 제자들이 되어, 전혀 새로운 공동체를 시작하고, 그 공동체를 거점으로 하여 인류 역사의 수레바퀴를 되돌려놓은 그 영적 사건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 특별한 주일을 기념하기 위해 우리 교회는 지난 해 ‘일단 와 보세요’ 전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경험한 생명과 평화와 기쁨을 이웃에게 나누자는 뜻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이 사역을 통해 지난 해에 많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이제 그 사역의 두 번째 해를 시작합니다.
지난 세월 동안 교회는 전도를, 교회를 키우기 위한 도구로 전락시켰습니다. 또한 많은 전도자들이 믿지 않는 사람들과 믿는 사람들의 이맛살을 찌뿌리게 만드는 잘못을 많이 범해 왔습니다. 그래서 생각있는 사람들은 ‘전도’라는 말만 들어도 고개를 돌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나만 잘 믿으면 됐지, 뭐 다른 사람을 괴롭히느냐?"고 말하는 분들도 계십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주님으로 모시고 살면서 인간의 근원적인 갈증을 해결받고 삶의 빗깔이 변한 사람이라면, "나만 잘 믿으면 됐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어쩌다가 비방을 발견하여 그 병을 치료받고 난 후, 동일한 질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보고는 시치미를 뚝 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는 안됩니다. 진실로 치료를 받았다면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전도하십시다. 먼저 우리 자신을 더욱 전도하십시다. 매일 매일 전도하십시다. 항상 성령의 능력 가운데 살아갈 수 있도록, 매일 아침 우리 자신에게 전도하십시다.
그리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도하십시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믿지 않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기도하고, 또한 전도할 때를 위해 준비하십시다.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도움 중 최고의 도움은 그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일입니다. 우리의 전도는 마르다가 무덤 문을 열고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도록 준비한 것과 같은 일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의 마음 문을 열어서 "나사로야, 나오너라"(43절)는 주님의 음성이 들리게 하는 일입니다. 그 음성이 들릴 때 죽었던 사람이 살아나는데, 우리가 무덤 문을 막고 서 있어서야 되겠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믿고, 돌아서서, 있는 힘을 다해 무덤 문을 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것이, 우리가 그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사랑의 수고임을 아십니까? 바로 이 사랑의 수고에, 주님께서는 여러분 모두를 초청하십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부활하신 주님,
저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인도해 주신 주님,
저희 생명이 더욱 충만하도록 도우소서.
주님을 믿는 믿음의 능력이
저희 일상 생활 속에 드러나게 하소서.
그리고 그 부활과 생명의 능력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타나도록
그들의 마음의 돌 문을 여는 일에
열심을 내게 하시고 능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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