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고를 희생양으로 삼아 16강 간다." 최근에 어느 신문에서 본 헤드라인입니다. 이제 막 시작된 독일 월드컵에 출전한 우리 한국팀에 관한 기사입니다. 4년 전에 기적같은 경험을 한 바 있기 때문에, 한국만이 아니라 이곳 이민 사회도 벌써 들썩 들썩합니다.
우리 나라와 프랑스가 경기를 하는 6월 18일은 주일인데, 그 날 경기가 오후 3시에 시작됩니다. 그런데 많은 이민 교회들이 2시에 예배를 시작합니다. 그 주일에 많은 분들의 믿음이 시험 대에 오를 것 같습니다. 집에서 경기를 볼 것이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것이냐? 아니면, 교회에서 예배 대신 경기를 볼 것이냐? 우리 교회 4부 예배도 오후 2시에 시작하는데, 이 예배에 모이는 사람들이 대부분 청년들입니다. 그래서 "그 날 4부 예배가 되겠는가?"하고 질문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두고 볼 일입니다. 저에게는 프랑스와의 경기 결과보다 그날 4부 예배가 어찌될지가 더 흥미롭습니다.
"토고를 희생양으로 삼아 16강 간다"라는 말에 담겨 있는 '희생양'이라는 말은 아주 흔하게 쓰이는 말입니다. 억울하게 손해를 보게 되면 우리는 자주 "내가 희생양이냐?"고 묻습니다. 역사책을 보면 이 말이 특히 자주 나옵니다. 히틀러 치하의 나찌 정권이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고도 하고, 일본의 관동 지방에서 지진이 일어났을 때 흉흉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한인 교포들을 희생양으로 삼아 학살했다고도 합니다. '희생양'이라는 말은 이렇듯 다른 누구의 이익을 위해 무고하게 희생 당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됩니다. 이제는 아주 보편적인 용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말이 성경에서 나온 말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별로 없습니다.
레위기 16장에 보면, 대속죄일에 대한 규정이 나옵니다. 대속죄일 즉 '욤 키푸르'(Yom Kippur)는 일 년에 한 번씩 지키는 유대 절기로서,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든 죄를 용서받도록 마련된 날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이 절기를 지키는데, 대략 9월에서 10월 사이에 옵니다.
레위기 16장을 보면, 이 날에 대제사장은 두 마리의 염소를 제물로 사용하는데, 제비를 뽑아서, 한 마리는 죽여서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산 채로 광야로 내보내게 되어 있습니다. 산 채로 광야로 내보낼 염소에 대해 레위기 16장 21-22절은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살아 있는 그 숫염소의 머리 위에 [대제사장은] 두 손을 얹고, 이스라엘 자손이 저지른 온갖 죄를 다 자백하고 나서, 그 모든 죄를 그 숫염소의 머리에 씌운다. 그런 다음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의 손에 맡겨, 그 숫염소를 빈 들로 내보내야 한다. 그 숫염소는 이스라엘 자손의 온갖 죄를 짊어지고 황무지로 나간다. 이렇게 아론[대제사장]은 그 숫염소를 빈들로 내보낸다.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홀로 광야에 버려져 짐승에게 잡아먹히게 되어 있는 이 숫염소-이 염소를 가리켜 '희생양' 혹은 'scapegoat'라고 부릅니다. 우리 말로는 '희생 염소'라고 번역해야 하는데, 왜 '희생양'이라고 번역했는지 모르겠습니다.
2.
저는 이 이야기를 읽고 이 이미지를 생각해 볼 때마다, 마음에 석연치 않음을 느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에 홀로 내버려져 오갈 데를 모르고 서성이다가 굶주린 야수에게 일순간에 잡아 먹히는 그 불쌍한 염소의 운명을 생각해 봅니다. 유대인들의 관습에 의하면, 이 염소를 끌고 나갔던 사람은 그 염소가 어떻게 되는지 멀리서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그 염소가 사람들이 사는 지역으로 돌아오면 죄가 없어지지 않는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든지 아니면 야수에게 잡아먹히는 것을 확인한 다음에야 비로소 성전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 사람이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백성들에게 "우리의 죄를 짊어진 염소가 희생 당했다"고 말하면,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도 함께 사라졌다고 믿고 기뻐하면서 축제를 행합니다. 한 편에서는 무고한 짐승이 애꿎게 죽음을 당했는데, 다른 한 편에서는 그 죽음을 두고 감사와 찬양을 올립니다.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사람들의 편에서 보면 참 좋은 일이지만, 희생 당한 짐승의 시각에서는 참 억울한 일입니다.
희생양의 논리가 항상 그렇습니다. 독재 정권의 정치 선전(propaganda)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자란 저같은 사람들은 대(the majority)를 위해서 소(the minority)가 희생당해야 한다는 논리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였습니다. 아니, 때로는 '나도 조국과 민족을 위해 목숨을 바치리라'고 다짐한 적도 많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서 국기 하강식을 위해 울리는 애국가가 들려 오면, 아무도 보지 않는 골목길에서조차도 그 자리에 부동 자세로 서서, 가슴을 한껏 앞으로 내밀고, "나는 자랑스러운 태극기 앞에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다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하곤 했습니다. 그럴 때면 마음에 감동의 물결이 밀려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곤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아무도 보지 않는 골목길에서 애국가 연주가 끝날 때까지 부동 자세로 서서 조국과 민족을 위해 인생을 바칠 것을 다짐하는 그 순수한 마음을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더 이상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세뇌 공작에 속은 것이라고 느껴졌습니다. 누군가가 아주 교묘하게 나같은 사람들을 속여 희생양으로 삼고, 그 희생을 밑거름으로 하여 그들은 권력을 연장하고 엄청난 재산을 모으고 우리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생활을 하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내 한 몸 바치겠다고 다짐했지만, 그것이 실은 몇 사람의 부와 권력과 영광을 위한 것일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3.
오늘의 요한복음의 이야기를 보면, 예수님이 돌아가신 것도 권력자들이 그분을 희생양으로 선택함으로 인해 생긴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각종의 병을 고칠 뿐 아니라, 눈 먼 사람의 눈도 뜨게 하고, 심지어는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한다는 소문이 유대 사람들에게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이 일로 인해서 유대인들의 자치 의회요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 의회가 소집되었습니다. 71명의 귀족들로 구성된 이 의회는 예수님에 대한 처리 방법을 놓고 의논했습니다. 논의 중에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 사람이 표징을 많이 행하고 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 사람을 그대로 두면 모두 그를 믿게 될 것이요, 그렇게 되면 로마 사람들이 와서 우리의 땅과 민족을 약탈할 것입니다. (47-48절)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과 로마 정부의 관계를 잘 알지 못하면 이 말의 뜻을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그렇듯이, 무력으로 길들이기 아주 어려운 민족이었습니다. 로마 정부가 수 많은 민족들을 정복하고 다스리고 있었지만, 유대 민족처럼 어려운 민족은 또 없었습니다. 아무리 무참하게 짓밟아도 얼마 있다가 또 일어나 혁명을 일으키곤 했습니다. 유대인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기록을 보면, 한 때는 유대인들의 반역을 진압하고 본때를 보이기 위해, 하루에 평균 2천명의 폭도들을 십자가에 매달았다고 합니다. 그래도 얼마 있다가 또 들고 일어나는 것이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래서 로마 정부는 긴장한 가운데서 반란의 기운이 없는지를 늘 살피고 있었고, 약간의 낌새만 있어도 잔인하게 진압했습니다.
반면, 로마 정부의 비호를 받으며 기득권을 지키고 평안히 살려는 귀족들도 역시 반란을 두려워했습니다. 무고한 사람들이 희생되는 것은 더 말할 것도 없고, 로마군의 진압이 끝나고 나면 자신들에게도 불이익이 왔기 때문이었습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생명을 내걸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렇듯 로마 정부와 함께 혁명의 기운을 걱정하는 사람들도 유대인들 중에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의원들은 대부분 귀족들이고 권력자들이었기 때문에 혼란을 두려워했습니다. 어찌보면 반란의 움직임에 대해 로마 정부보다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이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산헤드린 의원들은, 예수님을 추종하는 사람들의 수가 점점 많아지게 되면, 로마 정부가 그 움직임을 반란의 징조로 볼 가능성이 있고, 그렇게 되면 피비릿내 나는 진압 작전이 시작되어 수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게 되고, 나라는 다시 어려움에 빠질 것을 걱정했습니다. 이 걱정의 배후에는 자신들의 기득권에 혹시 손해라도 생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있습니다만, 그들의 추측만큼은 아주 정확했습니다. 예수님을 추종하는 무리의 수가 더 많아지면, 로마 정부는 그것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산헤드린 의원들 사이에 이런 걱정이 오가자, 산헤드린 의회의 의장 역할을 하게 되어 있던 대제사장 가야바가 일어나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아무것도 모르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민족 전체가 망하지 않는 것이, 당신들에게 유익하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소. (50절)
대제사장 가야바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바로 '희생양'의 논리입니다. 그는 과거의 어느 독재자처럼 "대를 위해 소를 희생시켜야 하지 않겠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로마 정부가 손을 쓰기 전에 예수님을 제거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53절을 보면, 가야바의 이 논리가 모든 의원들에게 통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그 날로부터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과 그 일행은 더 이상 드러내 놓고 유대 지역을 다닐 수 없었습니다.
4.
이 때, 예수님은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도망할 수 있었습니다. 54절을 보면, 예수님은 잠시 동안 위험을 피하여 광야 가까운 지방 에브라임으로 물러가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도망이 아니라, 잠시 피한 것입니다. 얼마 후, 예수님은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다시 예루살렘에 나타나시고, 결국 죽음을 당하십니다. 그분은 유대인 권력자들이 당신을 희생양으로 택한 줄 아셨습니다. 그들이 부정한 이익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죽음에 넘겨주려 했다는 것도 아셨습니다. 자신의 죽음이 그들의 욕심을 채워주는 일이 될 것도 아셨습니다. 어찌 보면 아주 뜻없는 죽음이 될 수 있음도 아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억울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희생을 적극적으로 끌어 안으셨습니다. 그분은 희생양으로 선택되어 죽는 자신의 죽음을, 많은 사람들의 죄값을 대신 치루고 죽는 희생을 받아들였습니다. 온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고 광야로 나가 굶주린 야수에게 잡혀먹히는 그 희생 염소처럼, 그분은 스스로 모든 백성의 죄를 짊어지고 권력자들이 파 놓은 죽음의 함정에 스스로 걸어들어갔습니다. 가야바는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예수님을 희생시키자고 제안했지만, 예수님은 자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치면 하나님은 그 희생을 통해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길을 만드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가야바는 전혀 다른 의도로 말했지만, 그 말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저자는 다음과 같은 해석을 덧붙입니다.
이 말은, 가야바가 자기 생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그 해의 대제사장으로서, 예수가 민족을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니, 민족을 위할 뿐만 아니라, 흩어져 있는 하나님의 자녀를 한데 모아서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예언한 것이다.
5.
예수님은 진정한 의미의 희생양이십니다. 참된 희생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삶으로 보여주신 분입니다. 그렇게 희생의 길을 걸으심으로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레위기 16장의 규정을 보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많습니다. 어떻게 한 마리의 염소가 온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짊어질 수 있습니까? 온 백성의 죄를 대신 짊어지기에 한 마리의 염소는 너무 값싼 것 아닙니까? 또한, 대제사장이 그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백성들의 죄를 짊어지운다고 해서 그대로 됩니까? 그 염소가 광야로 나가 야수에게 잡아 먹혔다고 해서 그 염소에게 전가된 죄가 모두 사라집니까? 모두가 어불성설같아 보이지 않습니까? 도대체, 그럴 듯해 보이는 요소가 하나라도 있어야 믿지 않습니까?
그러나 여러분, 이것은 자연 원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배려요 약속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자연 원리로야 그럴 수가 없습니다. 대제사장이 염소의 머리에 손을 얹고 "온 백성의 죄를 네 위에 지운다"고 말했을 때, 자연 원리에 따르면, 자동으로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자연 원리가 그렇다면, 그건 따로 규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콩을 땅에 심으면 콩이 납니다. 그것이 자연 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콩을 심으면 콩이 나게 되리라'는 규정을 누구도 만들지 않았습니다.
대속죄일의 희생 염소에 대해 이렇게 세밀하게 규정한 이유는, 자연 원리는 그렇지 않지만, 그 규정만 지키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나님이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규정을 읽고는, 아무 염소나 붙들고 "내 죄를 네 위에 지운다. 내 대신 죽어 내 죄를 없애라"고 말했다고 합시다. 그것은 아무 효력도 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규정을 정확히 지켜야 효력이 발생합니다. 이 규정이 효력을 발생하는 이유는 약속하신 하나님께서 그 약속대로 지키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참된 희생양으로 돌아가신 예수님의 죽음이 어떻게 나의 죄를 해결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2천 년 전에 유대 땅에서 십자가에서 달려 죽은 한 청년의 죽음이 오늘 내가 지은 죄를 대신 속죄해 준다는 말은 도대체 이해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저에게도 이것이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교리중 하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자연 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자연의 원리상 예수님에게 뭔가 특별한 것이 있어서, 그분의 죽음이 자동적으로 내 죄를 해결해 준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께 당신의 생명을 바치셨고,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받으셔서 모든 사람의 대속 제물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마련하신 그 배려와 약속를 믿고 받아들이면, 그것이 효력을 발휘한다는 뜻입니다.
15년의 징역을 살면 살인을 저지른 죄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는 법 규정은 자연 원리가 아닙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죽인 잘못은 그 무슨 댓가를 치루더라도 다 해결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쩌다가 그런 잘못을 범한 사람들이 평생 그 올무에 구속되어 살아가는 것이 불쌍해서, 15년의 징역만 살면 그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법으로 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법을 지킨 사람에게는 그 효력이 미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아, 나는 그거 믿을 수 없어. 어떻게 15년의 징역을 살면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있단 말인가? 내 잘못의 책임은 영원히 벗어날 수 없어. 나에게는 희망이 없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감옥에 있기를 선택했다고 칩시다. 그 사람은 과연 현명한 사람입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을 믿으면 우리의 모든 죄가 해결받을 수 있다는 것은 자연 원리가 아닙니다. 자동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죄의 세력에 사로잡혀 죄책감의 무거운 짐에 눌려 살아가는 우리가 불쌍하여,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믿고 의지하면 우리의 죄를 해결해 주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니 그 약속을 믿고 우리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 무슨 죄든 용서함을 받습니다. 자연 원리로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권위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대속죄일에 희생 염소가 사라진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감사하고 찬양했던 것처럼, 우리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공로에 의지하여 회개하고 믿으면 하나님의 용서를 경험하고 찬양할 수 있습니다. 만일 누군가가 "아, 나는 그거 믿을 수 없어. 어떻게 그렇게 쉽게 내 죄를 벗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내 죄는 영원히 내 문제야. 이것을 해결할 방도란 없어. 그냥 그렇게 살다가 죽는 거야. 죽고 나서 책임을 져야 한다면 지지 뭐!"라고 말한다면, 그분은 과연 현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러니 십자가를 다시 바라 보십시다. 십자가는 정치범들을 위해 마련되었던 가장 잔인한 형틀이었습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십자가에 달려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혹은 십자가에 걸려 있는 시신의 일부를 보면서 치를 떨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이라면 웬만해서는 반역을 꿈에도 꾸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로마 정부가 기대했던 것입니다. 유대 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일 희생양으로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억울하고 무고한 죽음을 적극적으로 끌어 안았습니다. 당신의 생명을 하나님께 바쳐서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는 대속 제물이 되게 하셨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십자가를 가장 혐오스러운 형틀이 아니라, 가장 귀한 사랑의 상징으로 변화시키셨습니다. 과거에는 십자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참혹한 죽음을 생각했지만, 예수님이 거기에 달려 돌아가신 이후에는, 십자가를 생각하는 사람은 참된 생명을 생각하고, 영원한 나라를 생각하고, 하나님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두 팔을 벌려 당신의 생명을 바침으로써 하나님께 이르는 길을 여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십자가를 묵상하며 시인 루이스 체니(Lois A. Cheney)는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서 I stand before the cross
놀란다. And wonder.
십자가 앞에 서서 I stand before the cross
두려워 떤다. And fear.
십자가 앞에 무릎꿇고 I kneel before the cross
통곡한다. And weep.
십자가 앞에 기도하며 I pray before the cross
기뻐한다. And rejoice.
십자가를 앎으로 To know the cross
그리스도를 안다. Is to know Christ.
십자가를 느낌으로 To feel the cross
그리스도를 느낀다. Is to feel Christ.
십자가를 바라볼 때 To gaze at the cross
십자가를 바라볼 때 To gaze at the cross
십자가를 짐으로 To carry the cross
그리스도인이 된다. Is to be a Christian.
오직 그 때에만. And not until then.
하나님, 우리를 용서하소서. God, forgive us.
자, 우리도 십자가를 바라 보십시다. 그곳에서 사랑을 보십시다. 그곳에서 용서를 보십시다. 그곳에서 참된 생명을 보십시다. 그곳에서 영원한 나라를 보십시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보십시다. 그곳에서 우리 자신을 보십시다.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아난 새로운 우리, 모든 죄로부터 용서받고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살아난 우리, 하나님의 형상으로 새로 지어져가는 우리, 아직 죄를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성령의 능력으로 점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 가는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서 보십시다. 십자가 안에 그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약속이라고!
사랑의 주님,
십자가를 바라보는 저희 마음을
주님의 성령으로 만져 주소서.
저희 영혼의 눈을 떠서
그곳에서 팔을 벌리고 저희를 맞아 주시는 주님을 보게 하시고
저희 영혼의 귀를 열어
그곳에서 저희를 향해 부르시는 사랑의 음성을 듣게 하소서.
십자가가 저희의 희망이요 생명임을
마음으로 깨닫게 하옵소서.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저희 마음이 주님의 영으로 채워지게 하시고
저희 삶이 더욱 주님 닮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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