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그러게 말입니다" (요한복음 12:1-8)

새벽지기1 2016. 7. 5. 07:48

 

1.

 

얼마 전, 어느 집사님께서 "이거 한 번 읽어 보시지요"라는 말과 함께 종이 몇 장을 건네 주셨습니다. 그것은 인터넷에 올라 있는 어느 문서를 프린트한 것이었는데, 초등학교 학생들이 시험 문제지에 쓴 황당한 답안들 만을 모아 놓은 것이었습니다. 많이 아시겠지만, 몇 가지만 소개하면 이렇습니다.

 

시험 문제가 이렇습니다. "옆집 아주머니께서 사과를 주셨습니다. 뭐라고 인사해야 할까요?" 이 질문에 대해 어느 아이가 이렇게 답안을 썼습니다. ", 이런 걸 다." 여러분이 선생님 이라면 이 답안을 맞다고 하겠습니까, 아니면 틀렸다고 하겠습니까? 또 이런 문제가 있었습니다. "만유 인력의 법칙을 발견해 낸 사람은?" 앞에서 답한 그 아이가 이번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죽었다!" 하도 어이가 없었는지, 선생님이 그 답 옆에 "교무실로 와라"라고 써 놓았습니다. 하나만 더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우리가 자주 잘못을 하는데도 불구하고 부모님은 우리를 왜 사랑하실까요?"라는 질문이 있었습니다. 실은, 꽤 어려운 질문입니다. 앞에서 답을 한 그 천재같은 아이가 이번에는 이렇게 답을 합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저는 이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미리 싸인(autograph)을 받아놓아야 할 비범한 인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러게 말입니다"라는 대답은 보통 대답이 아닙니다. 부모님의 사랑의 신비를 정확하게 표현해낸 모범 답안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 같으면 뭐라고 대답을 하겠습니까? "피는 물보다 진하니까"라고 답하겠습니까? "그래도 예쁜 구석이 있으니까"라고 답하겠습니까? 도대체 무슨 답을 기대하고 그런 문제를 냈는지 모르겠지만, "그러게 말입니다"라는 답보다 더 정확한 답은 없을 것 같습니다.

 

사랑은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 수 없는 것이 사랑입니다.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순수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결혼을 준비하고 있는 신랑 신부에게 자주 묻습니다. "어떻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까?" 그러면 두 사람은, 서로에게 자신의 사랑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여러 가지 이유를 늘어놓습니다. 하지만 진실한 사랑은 어떤 이유 때문에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것입니다. 어떤 이유를 발견하고 나서 "그러니까 이제부터 저 사람을 사랑하자"고 시작한 것이라면, 참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참된 사랑에 빠진 사람이라면 "어떻게 서로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까?"라는 질문에 대해 "그러게 말입니다"라고 답해야 옳습니다.

 

2.

 

오늘 읽은 본문은 또 하나의 이유 없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기로 결심하자 예수님과 그 일행은 광야 가까운 곳으로 잠시 피했다가, 유월절을 코 앞에 두고 다시 베다니로 오십니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있어서는 마지막 예루살렘 여행이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시작된 유월절 축제 기간 중에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십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죽음을 무릅쓰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해 가시는 중에, 늘 그러셨던 것처럼,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 들르셨습니다.

 

나사로와 마르다와 마리아는 정성껏 예수님의 일행을 대접했습니다. 대접을 하면서도 얼마나 즐거웠겠습니까? 무덤에 있다가 살아난 나사로는 더 말할 것도 없고, 마르다와 마리아도 그랬을 것입니다. 무덤과 같았던 자신들의 삶을 잔치집으로 바꾸어 주신 예수님이 얼마나 고마웠겠습니까? 그 이전에도 그들은 예수님을 끔직하게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나사로를 살려낸 후에 그 사랑은 더욱 강렬해졌습니다. 그들은 이 번 방문이 마지막이 될 줄도 몰랐습니다. 그저 마음에서 끌리는 대로 최선을 다해 대접했습니다.

 

한창 잔치가 무르익고 있을 때, 마리아가 진지한 표정으로 예수님 앞으로 나옵니다. 그의 손에는 향유병이 들려 있었습니다. 흥에 겨워 있던 손님들은 마리아의 표정과 행동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는, 하던 일을 멈추고 일제히 그를 지켜봅니다. 마리아는 살며시 예수님에게 다가가 향유병의 뚜껑을 열고 예수님의 발에 붓습니다. 그리고는 삼단채같은 머리를 풀어 헤칩니다. 그는 자신의 머리칼을 수건으로 삼아 예수님의 발에 부은 향유를 적셔서 골고루 문질러 닦았습니다. 그러자 그 집 안에 향유 냄새가 가득 찼습니다. 모두들 그 매혹적인 향내음에 젖었습니다. 마치, 진행되던 총천연색 영화가 일순간에 슬로우 모션으로 느려지고 아무 소리 없이 마리아의 움직임만을 비추어주는 듯한 분위기에 사로잡힙니다.

 

당시의 관례에 따르면, 손님이 어느 집에 들면, 가장 먼저 할 일이 발을 닦는 것이었습니다. 그 집에 노예가 있으면, 손님의 발을 닦아 주는 일은 노예의 몫이었습니다. 노예가 없는 경우에는 주인이 손님에게 발 닦을 물을 내어 주는 것이 예의였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주로 샌달(sandal)을 신었기 때문에, 밖에서 얼마 동안 활동하고 나면 발은 땀과 먼지로 덕지가 졌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발을 다른 사람에게 씻기도록 내놓는 것도 그리 마음 편한 일이 아니었고, 다른 사람의 발을 씻어주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그 더러운 발을, 마리아는,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재산 목록이었던 향유를 부어, 자신의 신체 중에서 가장 귀한 머리칼로 씻고 있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 중 하나였던 유다가 이렇게 말합니다.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5) 당시 화폐 단위 중 데나리온은 남성 성인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이 향유는 남성 성인 노동자가 1년 동안 일해 모아야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비싼 것입니다. 오늘날의 기준으로 한번 환산해 보십시다. 남성 성인 노동자의 평균 하루 임금을 100달러로 치면, 이 향유의 값은 3만 달러라는 계산이 나옵니다. 여러분,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3만 달러짜리 향유를 발 닦는 일에 한꺼번에 다 써 버렸다면, 여러분은 과연 유다같은 말을 하지 않겠습니까?

 

3.

 

그리고 마리아는 자신의 머리칼을 사용하여 예수님의 발을 씻고 있습니다. 손으로 문질러도 되고, 자신의 겉옷으로 해도 되고, 아니면 처음부터 수건을 준비해도 될 일이었습니다. 왜 머리칼을 풀어 그것으로 씻는단 말입니까? 거기에도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여성들에게 있어서 머리카락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유방암 3기 말로 판정을 받고 수술한 다음, 키모(chemo therapy)를 거쳐서 완치 판정을 받은 캐롤린(Carolyn)이라는 여인은 제가 뉴저지에서 섬기던 교회의 교인이었습니다. 키모 과정을 거치면서 이 여인이 가장 어려웠던 순간은 머리가 빠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아침, 샤워장에서 머리를 감는데 갑자기 손에 무엇이 쥐어지더라는 겁니다. 물을 끄고 손을 펴 보니, 머리카락이 한 움큼 쥐워져 있더라는 것입니다. 캐롤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통곡했습니다. 이 소리를 들은 남편이 황급히 달려와 사정을 확인하고는, ", 그런 것을 가지고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호통을 치고 나가더랍니다. , 무정하고 무심한 남자들이여! 여인에게 있어서 머리칼이 빠지는 것은 마치 자신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일인데, 남자들은 "그까짓 머리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마리아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풀어 예수님의 발을 씻은 것은 자신의 신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예수님에게 드리고 싶은 마음의 표현입니다. 결국, 마리아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 중에서 가장 값비싼 것을 예수님께 드렸고, 자신의 신체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예수님에게 내어 드린 것입니다. 사랑 때문입니다. 사랑에 이끌려 행동하다 보니, 사랑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납득되지 않는 행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쓸 데 없는 낭비를 하고, 쓸 데 없이 과장된 행동을 한다고 핀잔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일행이 모두 떠나가고 난 다음, 누군가가 마리아에게, "당신, 그 때 왜 그랬어? 왜 그 비싼 향유를 다 쏟아 부었어? 아깝지도 않았어? 그리고 왜 머리카락으로 발을 씻었어? 여자로서 부끄럽지도 않았어? 도대체 그렇게 지나치게 할 필요가 있었어? 왜 그랬어?"라고 물어보았다고 칩시다. 마리아가 뭐라고 답했을까요? 모르긴 몰라도, 이렇게 답했을 것입니다. "그러게 말입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뭘 계산하고 따져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사랑에 이끌리는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랬더니, 무의미한 허비처럼 보인 그 일이 예수님의 장례를 미리 준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마리아는 상상도 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저 사랑에 이끌려 행했을 뿐인데, 그 사랑의 행위를 하나님께서 받아 이런 신비로운 일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4.

 

이게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것에는 이유가 없습니다. 이유가 있고 계산이 있으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진실한 사랑은 저절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의 존재로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참된 인간이 될 때, 사랑은 저절로 생겨나게 됩니다. 우리 말의 뿌리를 찾아가 보면, 놀랄 때가 많습니다. 국어 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이라는 말과 사랑이라는 말과 이라는 말이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사람은 사랑하는 존재이고, 사랑할 때에 만이 우리는 참된 사람이 되고, 사랑하는 것이 곧 삶의 본질이라는 철학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이 철학은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본질과 일치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도록 지으셨고, 인간의 삶의 핵심은 사랑입니다. 사랑할 때 우리는 비로소 인간이 됩니다.

 

왜 부모가 자녀를 사랑합니까? 부모와 자녀가 진실하게 만날 때, 우리는 가장 인간다워집니다. 인간다움을 회복할 때, 사랑은 저절로 활동하게 됩니다. 한 여자와 남자가 만나 사랑을 느낍니다. 왜 그렇습니까? 남자와 여자가 만나 서로를 좋아하게 될 때, 인간은 가장 인간다워지기 때문입니다. 참된 신앙인이 되면 왜 사랑이 강해집니까? 참된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곧 인간다움을 회복한다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사랑의 능력, 사랑의 원천은 우리 내면에 잠재되어 있다는 뜻입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인간다움을 회복하면 사랑은 저절로 그 능력을 드러내게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참된 사랑은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내어주는 것입니다. 마리아가 예수님에게 값비싼 향유를 모두 쏟아 부었듯이, 그리고 자신의 몸의 가장 중요한 머리카락을 풀어 발을 씻었듯이, 참된 사랑은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값 없이, 조건 없이 내어주는 것입니다. 만일 행동에 앞서서 머리 속으로 손익 계산을 하고 있다면, 그 사랑은 참된 것이라 할 수 없습니다. 자녀를 사랑하는데 있어서나 배우자를 사랑하는데 있어서 혹은 부모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사랑을 모델로 삼아야 합니다. 끝까지, 조건 없이, 계산 없이, 자신에게 가장 귀한 것을 희생하기에 주저하지 않으신 그 사랑을 배워야 합니다. 사랑의 행동은 없이 가룟 유다처럼 팔장을 끼고 앉아 계산만 해서는 안 됩니다.

 

5.

 

오늘은 아버지의 날Father’s Day입니다. 모든 아버지들에게 주님의 은총이 충만하기를 기도합니다. 모든 아버지들에게 참된 사랑의 능력이 충만하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저를 포함하여 모든 아버지들이 마리아의 이 사랑을 배울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실로, 아버지들은 어머니들에 비해 사랑의 능력에 있어서 뒤떨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자녀들에게 영감의 근원이 되고 살아있는 모델이 되고 삶의 표준이 되어주는 아버지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반대로, 자녀들에게 상처를 입히는 아버지들, 자녀들의 마음을 일그러뜨리는 아버지들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상담 사례들을 보면, 자라는 과정에서 아버지와 겪은 갈등이 주된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혹시 여러분 중, 자라는 과정에서 이런 상처를 입고 아직까지 그 상처 때문에 어려움을 겪는 분이 계시다면, 이 시간, 주님의 은총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영원하시고 참된 하늘 아버지께서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면 어떤 상처든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우 중 한 분으로부터 감격스러운 간증을 들었습니다. 그분은 아버님과 대체적으로 좋은 관계를 가지고 사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언제 어디서 생겼는지 모르지만, 아버님을 생각하면 왠지 마음에 응어리가 느껴졌다고 합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 응어리를 견디며 살아왔는데, 어느 날, 예배 중에 설교를 듣는데, 갑자기 그 응어리가 눈 녹듯이 녹아버렸답니다. 그 순간에 옆에 앉아있는 분에게 그 사실을 알려줄 정도로 분명하게 응어리가 녹아지면서 아버님에 대한 감정이 말끔이 정리되었다고 합니다. 이제는 아버님에 대해 생각할때 마음이 개운하고 기쁘다고 합니다. 이와 동일한 은총이, 아버지로부터 받은 상처를 마음에 품고 사시는 분들 모두에게 임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그리고 저를 포함하여 모든 아버지들에게 권합니다. 우리 함께 사랑의 능력을 구하십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회복시키셔서, 참된 사랑을 알게 하시고, 참된 사랑을 행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시고 또한 노력하십시다. 참된 인간의 모습으로 자녀들을 만나는 시간을 더 많이 가집시다. 그런 만남의 시간을 가지게 되면, 우리 속에 내재된 참된 사랑이 터져 나올 것입니다. 그런 사랑만이 자녀에게 참된 위로를 주고 기쁨을 줍니다. 우리가 억지로 사랑이라고 이름짓는 것들로는 자녀들에게 상처만을 줄뿐입니다.

 

한 번은, 어느 몰(mall)에서 잠시누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 어느 어머니가 셀폰(cellular phone)으로 자녀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습니다. 의도적으로 들은 것이 아니라, 그 어머니가 하도 큰 목소리로 말해서 들린것입니다. 그 어머니는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에게 해야 할 일들을 조목 조목 나열하고 있었습니다. 내가 지금밖에 있어서 늦게 들어갈 것이니, 내가 돌아갈 때가지 지금 말한 것을 다 해 놓으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더니, "What?"이라고 묻습니다. 잠시 후에, "Okay, honey, I love you."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니까 아이가 뭐라고 반문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그 여인이 인상을 쓰면서 소리를 버럭 지릅니다. "Honey, I told you that I love you. Believe me, I love you. Is it enough? See you later!" 그리고는 셀폰을 깰듯한 몸짓으로 전화를 끊습니다.

 

이런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라고 이름 짓지만,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그 아이가 왜 "엄마는 나를 사랑하느냐?"고 재차 물었겠습니까? 엄마는 자신을 사랑한다고 윽박지르는데, 그 아이의 마음에서는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엄마가 자기 욕심대로 자신을 끌고 가고 있는데, 그것이 진실로 나를 사랑해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겁니다. 그 어머니도 씩씩 거리며 그 자리를 떳지만, 마음 속으로는 자신이 자식을 제대로 사랑하지 않고 있음을 외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여인이 화를 낸 이유는 참된 사랑을 할 수 없는 자신의 모습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6.

 

시인 김현승씨의 시 중에 아버지의 마음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이 될 수도 있지만 ......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

 

아버지 된 여러분, 우리는 과연 집에 돌아와 아버지가 됩니까?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집에 돌아옵니까? 집에 돌아와 어린 것들이 간직한 깨끗한 피로 우리의 때가 씻김을 받는 거룩한 순간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마리아처럼, 자신의 가장 귀한 것을 꺼내어 자신의 가장 귀한 신체의 일부분으로 자녀의 더러운 발을 어루만지는 거룩한 순간이 우리에게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심어두신 거룩한 사랑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그런 만남이 우리 가정에 있습니까?

 

저부터 회개합니다. 바쁨을 핑게 삼아, 시시 때때로 주어지는 거룩한 순간들을 무심코 흘려버린 잘못을 인정합니다. 아버지가 되어 집에 돌아오지 못한 날이 많았음을 인정합니다. 줄에 앉은 참새의 심정으로 아이들의 미래를 생각하고 기도하는 일에 게을렀던 잘못을 인정합니다. 제가 마시는 커피 잔에 제 자녀들을 위해 흘리는 눈물이 몇 방울 밖에 들어있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저의 소중한 것들을 내어 놓고 서로를 씻어주고 치유해주는 거룩한 순간들을 만드는 일에 소홀했던 잘못을 인정합니다. 제가 아이들에게 영감의 원천이 되고, 쉴 수 있는 품이 되어 주며, 삶의 표준이 되어주는 일에 부족했던 점을 인정합니다. 저는, 팔짱을 끼고 계산만하고 있던 가룟 유다처럼, 따지기는 잘했지만, 참으로 사랑에 무력한 아버지임을 인정합니다.

 

이 모든 허물을 인정하고 회개하며, 하나님의 은총과 도움을 구합니다. 더욱 아버지가 되게 해 달라고. 아버지로서 자녀들을 대하게 해 달라고. 자녀들에게 상처와 분노와 좌절감의 원인이 아니라, 치유와 용서와 사랑과 용기의 원천이 되게 해 달라고. 하루 하루 그렇게 살게 해 달라고. 다른 그 어떤 분야에서보다도 아버지로서의 삶에 성공하게 해 달라고. 그렇게 할 수 있도록, 제게 지혜와 영감과 용기와 힘을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간절한 회개와 기도가 오늘 모든 아버지들에게 있기를 또한 기도합니다. 김현승씨가 말했듯이, 자녀들이 우리의 나라이며 우리의 동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의 참되고 영원하신 아버지,

하늘 아버지의 역할을 대신 맡아 저희를 양육하신

육신의 아버지들을 축복하소서.

양육의 책임을 잘 이행하신 아버지들에게 뿐 아니라

그 일에 부족함을 느끼며 안타까워하는 아버지들에게도

은총과 평화와 기쁨을 허락하소서.

그 일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지 알기 때문입니다.

 

 

참되신 우리 아버지,

모든 아버지들에게 영감과 지혜와 용기와 힘을 허락하소서.

아버지가 되어 아버지로 사는 일에 능하게 하셔서

참된 사랑으로 자녀들에게 힘과 영감의 원천이 되게 하소서.

다른 것은 몰라도

아버지로서의 저희 부름에는 성공하게 도와 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