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최근에 전해진 뉴스 가운데 보기 드문, 아니 듣기 드문 미담이 있었습니다. 세계 최고의 부자인 빌 게이츠(Bill Gates) 마이크로 소프트(Microsoft) 사 회장에 관한 기사입니다. 그는 2008년 7월부터 마이크로소프트 사에서의 업무에서 거의 손을 떼고, 자신과 아내의 이름을 따서 지은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the Bill and Melinda Gates Foundation)의 활동에 전념하여, 세계의 건강과 교육 문제에 대해 헌신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이 재단의 현재 기금은 290억달러입니다. 웬만한 나라의 1년 예산보다 많은 돈입니다. 빌 게이츠가 자신의 수입에서 헌납하여 만든 재단입니다. 그는 “부에는 언제나 책임도 따르게 되어 있다”고 말한 다음, 자신에게 주어진 부를 사용하여 어려운 이웃을 돕겠다고 팔을 걷어 부쳤습니다. 물론, 이 재단의 최근 활동에 대해 이런 저런 비판적인 목소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 소식은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 줍니다.
“그만한 돈이 있으면 나도 그렇게 하겠다”고 말할 분이 계실지 모르지만, 돈이 많다고 해서 다 그렇게 하는 것은 아닙니다. 뉴저지에 사는 동안, 저는 세계 최고의 금융 회사 사장으로 일하면서 번 엄청난 돈으로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존 코자인(Jon Corzine)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는 뉴저지의 상원 의원(Senator)로 선출되어 일하다가 이제는 뉴저지의 주지사(Governor)로 일하고 있습니다. 그는 상원 위원 선거와 주지사 선거에서, 모금을 하지 않고, 100% 자신의 돈으로 선거를 치루겠다는 충격적인 선언을 했습니다. 정치 헌금을 받지 않고 당선되면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소신껏 일할 수 있을 것이라는 논리로 유권자들을 설득했고, 그 설득이 먹혔는지, 돈의 힘이 작용했는지, 그는 결국 두 번의 선거에서 모두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부를 권력 쟁취의 방편으로 삼고 있는 사람에 비해, 빌 게이츠는 훨씬 좋아 보입니다. 끝까지 좋아 보였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추구하는 것이 자선가로서의 명성이 아니라, 진실로 인류의 행복을 위한 헌신이 되기를 비는 마음입니다.
2.
‘가난’의 문제는 신앙의 본질에 속합니다. 가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세계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월드 비전(World Vision)이 있습니다. 한국 전쟁 당시에 고아들과 미망인들을 돕기 위해 미국인 목사 밥 피어스(Bob Piers)가 시작한 구호 단체(relief organization)입니다. 얼마 전, 현재 이 구호 단체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있는 풀러 신학교 교수 로베르타 헤스테스(Roberta Hestes)의 감동적인 설교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설교에서 로베르타 헤스테스는 이렇게 역설했습니다. “가난의 문제를 도외시하는 한, 그 어떤 영성 운동도, 그 어떤 기독교 운동도 왜곡된(distorted) 것이며, 결여된(defective) 것이며, 속이는(deceiving)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모델을 따라 영성 생활을 하려 한다면, 가난의 문제는 우리의 관심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실로, 그렇습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통독해 본 사람이라면, 가난의 문제가 성경 안에서 얼마나 자주 언급되고 있는지를 알 것입니다. 가령,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을 보면,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세심하게 배려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오늘 읽은 신명기 15장은 7년마다 지키는 안식년(sabbatical year)에 대한 말씀인데, 매 칠년째가 되면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진 빚을 모두 면제해 주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당신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십시오.”(4절) 이것이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7절에서 말씀합니다. “가난한 동족에게 베풀지 않으려고 당신들의 손을 움켜 쥐지 마십시오.” 11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손을 뻗어, 당신들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 주십시오.” 이러한 관심과 명령은 특별히 예언자들의 말씀 속에서 그리고 시편에서 자주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은 영적으로,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다니시며, 위로하시고 치료하시고 함께 있어 주셨습니다. 그분은 실로 가난한 사람들의 친구였습니다. 그분은 공생애를 시작하실 즈음에 나사렛 회당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설교해 달라는 초청을 받으시고는 이사야 61장을 읽으셨습니다. 그 성경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주님의 영이 내게 내리셨다. 주님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셔서, 가난한 사람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게 하셨다”(눅 4:18). 이 성경을 읽으시고는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서 오늘 이루어졌다”(21절)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성령의 기름을 부어 주셔서, 그 능력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가 기쁜 소식을 전해 줄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그 선언에서 말한대로, 가난하고 헐벗고 소외 당하고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친구가 되어 주시고, 먹이시고 입히시며, 치료하시고 위로하셨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보게 하시고, 그분 안에서 희망을 갖게 하시고, 새로운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셨습니다.
3.
오늘 우리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부은 이야기를 다시 읽었습니다. 마리아의 행동을 보고, 가룟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즉 3만 달러)에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고, 왜 이렇게 낭비하는가?”라고 비판합니다. 지난 주에도 말씀드렸지만, 유다의 비판에는 납득되는 점이 있습니다. 아마도 다른 제자들도 그런 생각을 했을지 모릅니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이 비판의 화살촉은 마리아가 아니라 예수님에게 향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숨겨져 있는 말의 뜻은 이런 것이었을 것입니다. “주님, 당신은 지금 모순을 범하고 있습니다. 그렇게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하신다는 분이 그 값비싼 대접을 마다하지 않으십니까? 다른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사람을 도우라고 말씀하시더니, 정작 주님은 이 엄청난 허비를 그대로 보고만 계십니까? 마리아의 행동을 막았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요한복음 저자는 6절에서 마리아와 예수님을 비판한 갸룟 유다의 진심을 밝혀줍니다. 그가 그런 말을 한 이유는, 진실로 가난한 사람들을 배려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의 금전 출납을 맡았던 가룟 유다는 ‘마리아가 그 향유를 나에게 주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아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한 번에 3만 달러의 헌금이 들어온다면, 회계를 맡은 사람으로서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게다가, 표시나지 않게 공금에서 돈을 빼내 사사로이 사용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던 사람에게는, 얼마나 더 아까웠겠습니까? 유다는 속으로는 부정한 욕심에 이끌리면서 겉으로는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7절과 8절입니다.
그대로 두어라. 그는 나의 장사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쓴 것이다.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마리아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 두라고 하십니다. 그 향유를 3만 달러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 것도 좋은 일이지만, 지금은 다른 일을 위해 그 향유를 써야 할 때라는 뜻입니다. 그러면서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 하나를 덧붙이십니다. 즉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
2천년의 기독교 역사 속에서, 이 말씀을 오역하여 ‘가난한 사람들의 문제는 영원히 해결될 수 없으므로, 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할 필요가 없다’고 결론을 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가난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으로 풀었던 것입니다. 이 말씀에 숨긴 예수님의 의도를 알려면,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이라는 말씀이 오늘 함께 읽은 신명기 15장 11절에서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 말씀을 다시 읽어 보겠습니다.
당신들은 반드시 손을 뻗어, 당신들의 땅에서 사는 가난하고 궁핍한 동족을 도와 주십시오. 그렇다고 하여, 당신들이 사는 땅에서 가난한 사람이 없어지지는 않겠지만, 이것은 내가 당신들에게 내리는 명령입니다.
우리가 손을 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다고 해서 가난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낙망하지 말고 , 지속적으로, 꾸준히, 중단 없이, 힘 닿는대로, 할 수 있는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어, 가난의 문제가 줄어들도록 힘쓰라는 것입니다. 불가능한 일이니 포기하라는 뜻이 아니라, 불가능하지만 할 수 있는대로 힘쓰라는 명령입니다. 얼마 전, 제프리 삭스(Jeffrey Sachs)가 The End of Poverty(<가난의 종말>)이라는 책을 통해 2025년까지 가난을 종식시킬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만, 그 책을 읽고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런 일이 일어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가난의 문제는 인류 역사가 지속되는한 언제나 존재할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의 문제는 인류가 항상 붙들고 씨름해야 하는 영원한 숙제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님께서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가난의 문제는 해결할 수 없으니 포기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난의 문제를 붙들고 씨름한다고 해서 가난의 문제가 뿌리뽑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 해도, 힘 닿는 데까지 그 문제를 붙들고 씨름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4.
그렇다면, 가난의 문제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이라면, 마리아가 3만 달러나 되는 향유를 자신의 발에 쏟아 부으려고 할 때, 펄쩍 뛰면서 “왜 쓸 데 없이 허비하려고 하느냐? 그 향유를 팔아 빵을 사면 얼마나 많은 사람을 먹일 수 있는지 모르느냐?”고 말씀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마리아가 하는대로 그냥 두셨습니다. 가룟 유다가 문제를 제기하자, “그대로 놔 두라”고 대답하십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은, 예수님이 앞뒤가 맞지 않게 행동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분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분은 “가난한 사람들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지만”이라고 말씀하신 다음, “나는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이 말씀을, “내가 얼마 있으면 죽을테니, 그 때까지 다른 것을 다 접어두고 나를 대접하는 일에 전념하라”는 뜻으로 풀면, 예수님의 뜻을 완전히 뒤집어 엎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은 항상 말씀하신 것처럼,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오셨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바치는 지나친 대접을 기뻐 받으실 분이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이 지금 하고자 하는 말씀은 이런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항상 너희 곁에 있을 것이니, 그 사람들을 돕고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말아라. 하지만 가난만이 문제의 전부라고 생각하지 말아라. 때론, 그것보다 더 급하고 더 중요한 문제도 있는 법이다. 지금 마리아는 3만 달러를 값지게 사용하고 있다. 그냥 두어라.”
결국, 예수님은 우리에게, 현실 상황을 정확히 보고 그에 따라 행동할 것을 요청하십니다. 인간이 처한 곤경을 정확히 보기를 원하십니다. 실로, 가난의 문제는 심각합니다. 가난의 문제는 인간의 기본적인 존엄성(human dignity)에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세계 식량기구(World Food Programme)의 사무총장이 보고한 바에 따르면, 지금 지구 상에 있는 식량을 골고루 나누면 60억의 인구가 다 먹고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지구 한 곳에서는 7초마다 한 명씩 굶어죽고 있고, 다른 한 편에서는 비만이 국가적 재앙이 되고 있습니다. 세계 인구를 1백 명으로 축소시키면, 50명은 영양 부족, 20명은 영양 실조, 1명은 죽기 직전인데, 15명은 비만이라고 합니다. 결국, 비만에 드는 15명이 나머지 71명이 먹을 것을 움켜쥐고 있다는 뜻입니다. 비만의 나라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회개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문제의 전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가난의 문제가 문제의 전부인 것처럼 생각하면, 우리는 어느새 유물론자(materialist)로 전락하고 맙니다. 먹고 마시는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해서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정신적인 동물이며 또한 영적인 동물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차원의 필요도 충족되어야 합니다. 인간의 정신적 욕구와 영적인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한 노력이 함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그런 필요를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돈을 써야 할 때도 있습니다. 3만 달러로 빵을 사서 가난한 사람들을 먹이는 것만이 옳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때로는 3만 달러를 다른 용도에 사용하여 인간의 다른 필요를 채울 수도 있어야 합니다.
5.
얼마 전, LA기독교 윤리실천운동본부에서 마련한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행동 지침에 관한 기사를 보았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따라야 할 지침들을 나열해 놓았는데, 대부분 동의했으나,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몇 군데 있었습니다. 그 중 하나가 교회의 강단 꽃꽂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지침에 따르면, 교회들은 강단에 꽃꽂이를 하지 말고, 그 돈을 아프리카에 있는 가난한 사람들의 구호금으로 보내라고 합니다. 이러한 제안이 나오게 된 배경을 저는 이해합니다. 실제로 강단 장식을 위해 지나치게 소비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떤 형태의 꽃꽂이도 반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 강단 장식팀에게 감사하는 것 중 하나는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아주 예술적인 꽃꽂이를 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분들이 주일에만 이 꽃꽂이를 보시겠지만, 저는 매일 새벽마다 이 꽃꽂이를 보며 기도하고 묵상합니다. 그리고 예배당 곳곳에, 꽃 몇 송이로 눈길을 사로잡는 배치를 해 두시는 것에 대해서도 감사드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영성과 감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지 모릅니다. 50달러의 음식보다 50달러의 꽃꽂이가 훨씬 더 가치있을 때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강단을 장식하면서 꽃 한 다발을 따로 마련해 두었다가 워싱턴 DC에서 고아들을 위해 사역하는 김동식 집사님에게 보냅니다. 그분은 고아들과 무숙자(homeless)들을 위해 사역하시는데, 몇 년 전, 무숙자들에게도 꽃을 보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부탁하셔서, 매 주일 그 꽃을 보내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도 모르게, 매 주일, 교회로부터 그분들이 사시는 곳까지 꽃을 배달해 주시는 분이 우리 교회에 계십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김동식 집사님께서 왜 빵이 아니라 꽃을 보내달라고 하셨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빵도 필요하지만, 꽃도 필요합니다. 물도 필요하지만, 사랑도 필요합니다. 옷도 필요하지만, 음악도 필요합니다. 집도 필요하지만, 뛰어 놀 동산도 필요합니다. 굶주린 배도 채워야 하지만, 공허한 영혼도 채워야 합니다. 병든 육신도 치료해야 하지만, 병든 정신과 영혼도 치료해야 합니다. 학교도 필요하지만, 교회도 필요합니다. 의사도 필요하지만, 목사도 필요합니다. 인간은 세포 덩어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된 복합체이기 때문에 인간의 욕구는 다양하고, 따라서 어느 한 면에만 치중하면 안 됩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다양한 필요를 정확히 보고, 기울거나 치우침이 없이, 그 때 그 때의 필요를 위해 봉사하기를 원하십니다. 한 손에는 빵을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말씀을 들고, 이웃에게 다가가 봉사하기를 원하십니다. 진실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제자라면 이렇게 정확히 현실을 보고, 이렇게 책임있고 균형잡힌 응답을 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힘써야 합니다. 진실로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라면, 우리의 선교와 사역이 이렇게 되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교회의 네 번째 장기 계획에서 말하고 있는 “균형잡힌 선교”입니다.
6.
오늘은 한국 전쟁 56년째 되는 주일입니다. 이 특별한 주일을 기념하기 위해, 오늘 우리는 장학 헌금을 드리고, 또한 월드 비전을 초청하여 가난을 치유하는 작은 일에 참여할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드리는 장학 헌금은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는 신학생들을 지원하여 능력있는 사역자가 되도록 도울 것입니다. 월드 비전에서는 한 달에 30 달러를 나눔으로 가난한 나라에 사는 어린이 하나를 돕는 일에 여러분을 초청할 것입니다. 한 달에 30 달러를 나누는 것이 어떤 분들에게는 짐이 될 것입니다만, 짐이 될 정도로 나누는 것이 진정한 나눔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 달에 30 달러 정도는 아무런 지장이 되지 않는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런 분들은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을 나눔의 출발로 생각하시고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한 달에 30 달러를 나누면서 마치 큰 선행이나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영적으로 큰 피해를 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더 큰 은혜를 주셔서 더 많이 나눌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겸손하게 기도하는 것이 옳습니다.
그런다고 해서 가난이 이 땅에서 사라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핑게삼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가 한 사람 도와 봐야, 그게 무슨 소용이냐?’며 책임을 회피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럴수록 더욱 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더욱 더, 우리는 힘 닿는 데까지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아니, 하나님께서 더 큰 힘을 주셔서 나누고 돌보고 함께 복되게 살아가는 일에 힘쓰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 우리는 그 일을 기쁘게 할 수 있고, 그 때에만이 진실로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국은 주는 곳이고, 지옥은 빼앗는 곳입니다. 천국은 나누는 곳이고, 지옥은 쌓아놓는 곳입니다. 천국은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다가 나까지 행복해지는 곳이고, 지옥은 나만 행복해 지려다가 모두 다 불행해지는 곳입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우리 모두가 천국을 우리 삶에 이루는 믿음과 삶에 이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가난한 자의 아픔과 절망을 가장 아파하시는 하나님,
그 마음을 품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사셨던 예수님,
저희에게도 그 마음을 주소서.
가난 뿐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인간의 모든 질병들을 가슴 아파하게 하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손을 펴서
나누게 하시고 돕게 하소서.
우리의 물질과 시간과 재능을 나누게 하소서.
우리의 평안과 기쁨과 구원도 나누게 하소서.
이 능력을 더욱 크게 하시어
우리가 가는 곳이면 어디나 천국이 되게 하소서.
나눔으로
언제나 천국에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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