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 주, 저는, 빌 게이츠가 2008년 7월부터 자신이 세운 마이크로 소프스 사에서 거의 손을 떼고 자신이 만든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 운영에 전념하겠다는 미담을 나누었습니다. 바로 그 다음 날, 빌 게이츠의 뒤를 이어 세계 두 번째의 부자인 워런 버펫(Warren Buffett)이 자신의 전 재산을 사회로 돌려주겠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워런 버펫은 어떤 점에서 빌 게이츠보다 한 술 더 뜨는 면이 있습니다. 자기 재산의 80%를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헌납하겠다는 것입니다. 자기 자녀들이 운영하는 사회복지 재단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일부만 기증하고, 대부분을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헌납하겠다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빌 게이츠가 만든 재단의 기금은 290억달러(29 billion dollars)였는데, 워런 버펫이 기증하게 될 돈은 370억달러(37 billion dollars)에 이릅니다. 그 돈이면 ‘워런 버펫 재단’을 만들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아무 조건 없이 그 엄청난 돈을 빌 게이츠에게 맡길 거라는 겁니다
자녀들이 만든 재단도 있고, 자신의 독립 재단을 만들어도 되는데, 왜 빌 앤 멜린다 게이츠 재단에 기부하기로 결정했느냐고,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투자의 귀재(investment guru)로 알려진 워런 버펫은 "나는 지금까지 지켜온 투자의 원칙을 따를 뿐입니다. 투자의 제 1 원칙은 내 돈을 가장 잘 활용해서 그 가치를 가장 높여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 그에게 맡기는 것입니다. 나는 빌 게이츠야말로 내가 일생동안 모은 돈을 가장 잘 활용해 줄 사람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그에게 맡기는 것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확실히 거물다운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름을 내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돈이 잘 사용되어 가난의 문제를 치료할 수 있겠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기자 회견에서는 자녀들에 대한 유산 상속 문제도 나왔습니다. 워런 버펫은 자신의 자녀들이 좋은 환경에서 자라고 최고의 교육의 기회를 제공 받은 것으로 충분하다고 했습니다. 거기다가 재산까지 물려준다는 것은 옳지도 않고(not right) 합리적이지도 않다(nor rational)고 단언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선택 받은 몇몇 소수가 출발선에서부터 한참 앞서 달려 나가서는 안되며, 모든 사람이 동등하게 기회를 보장 받아야 한다고, 자신의 입장을 밝혔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같은 출발선에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정의로운 사회라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그는 의회에서 추진하고 있는 상속세 폐지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오랜만에 마음이 시원해지는 소식입니다. 빌 게이츠와 워런 버펫의 이 결단이 우리 세계를 얼마나 크게 변화시킬지, 기대가 큽니다. 벌써부터 다른 갑부들과 거대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이같은 운동에 참여할 태세를 갖추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2.
두 사람이 모델이 되어,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은 반길 일입니다. 저는, 소위 성공한 이민자들이 피땀 흘려 일군 재산을 자손들에게 물려주는 것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해 왔습니다. 물론, 자녀들이 경제적으로 자립하지 못하여 재정적인 도움이 필요할 경우에는 어느 정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일류 대학을 나와 엄청난 연봉을 받아 떵떵 거리며 사는 자녀에게, 왜 부모의 재산까지 물려주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부족함 없이 사는 자녀들도 왜 부모님의 재산을 물려받기를 기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 우리 한국 이민자들도 사후에 재산을 사회에 되돌려주는 전통을 만들어야 할 때입니다. 굳이 이름을 남기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이 땅에서 수십 년 간 은혜를 입었으면, 그 은혜를 갚기 위해 되돌려주고 가는 것이 옳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이런 움직임이 일어나는 것을 반기면서도, 제게는 염려되는 점이 있습니다. 세 가지 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돈 버는 것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게 되지 않을까 염려합니다. 우리의 노동의 목적은 돈 버는 것이 아닙니다. 버는 돈 즉 수입은 우리의 노동에 대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덤’입니다. 노동의 목적은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의 봉사를 통해 이웃이 기뻐하면 하나님께서도 기뻐합니다. 그것이 우리의 노동의 목적입니다. 만일 목사가 사례비를 위해 일한다고 하면, 모두 다 비판할 것입니다. 마땅히 비판받아 마땅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원리는 다른 모든 직업에도 적용되어야 합니다. 직업은 돈 벌이를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봉사하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이웃을 위해 정성스럽게 봉사했는데 덤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복입니다. 그러나 돈을 목적으로 삼아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벌었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복이 아니라 우리가 쟁취한 전리품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일해야 할 경우에도, 마음은 언제나 이웃을 위해 봉사하는 데 초점을 두어야 합니다.
둘째, 돈을 많이 모아서 한꺼번에 써야 되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싶어 염려합니다. 워런 버펫은 그동안 자선 활동에 거의 돈을 기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최대한 아껴 모아서 돈을 최대한으로 불려 한꺼번에 큰일을 위해 재산을 내놓았습니다. 참 잘 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돈을 잘 쓰는 유일한 방법도 아니고, 가장 좋은 방법도 아닙니다. 우리에게 여유 돈이 있을 때, 그 때 그 때 필요한 사람들을 도와가며 사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렇게 하면 이름을 남기지는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의 목적은 이름을 남기는 데 있지 않습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속담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속담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이름을 남기는 데 있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무명인으로 잊혀져도 하나님께 기억되면 그 사람은 성공한 생을 산 것입니다.
셋째, 돈을 버는 것이 목적이 되고, 큰돈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 되면, 우리는 아주 쉽게 불의와 타협하고 부정한 일에 유혹을 받게 되기 때문에 염려합니다. 목적이 이렇게 정해지면, 수단과 목적을 가리지 않고 돈만 벌면 된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중에 돈을 잘만 쓰면, 돈 버는 과정에서 범한 모든 잘못은 해소된다고 믿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가는 과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십니다. 정직하고 진실하고 신실하게 살아도 돈을 버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십니다. 부정한 방법으로 축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치 않는 일입니다. 나중에 잘 쓴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얼마 전, 약 4년 동안의 고단한 이민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간 분이 계십니다. 뉴저지에서 알고 지낸 분입니다. 4년 동안 여러 가지 험한 일을 다 해 본 그분은,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하여 제게 그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제가 여기 살면서, 교회에서, 선교니 뭐니 하면서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돈을 쓰는 분들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이 정작 자기 사업체에서는 신분이 불안한 직원들의 약점을 잡아 착취하는 경우를 보았습니다. 제발 그러지 말라고, 목사님이 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그게 무슨 선교냐구요? 돈 쓰는 재미로 다니는 거지!" 미국 와서야 예수를 믿기 시작한 이 분의 판단은 정확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루하루 얼마나 정직하고 진실하게 사느냐에 있지, 얼마나 많은 돈을 모아 얼마나 멋있게 사용하느냐에 있지 않습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저는 빌 게이츠와 워런 버펫이 만들어낸 이 감동스러운 이야기 앞에서 염려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영향력이 너무 커서, 능력 있는 사람들은 ‘할 수 있는대로 많은 돈을 모아, 나도 나중에 저렇게 멋지게 해 보자’는 생각을 할지 모르고, 능력이 부족한 분들은 ‘저렇게 못할 바에야 내 인생은 무슨 쓸모가 있나?’하는 자괴감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 다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3.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시는 장면을 읽었습니다. 보통 ‘종려주일’이라고 하는 날에 자주 읽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생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일어난 일입니다. 이 날을 ‘종려주일’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오늘 본문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문을 들어가실 때, 그 소식을 듣고 모인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예수님을 환영했기 때문입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종려나무 가지이고, 다른 하나는 어린 나귀입니다.
먼저, 종려나무 가지를 생각해 봅시다. 예수님 시대로부터 약 150여년 전, 유대인들은 반란을 일으켜 막강한 헬라인들을 물리치고 예루살렘 성과 성전을 되찾은 일이 있습니다. 이 일을 주도한 사람이 그 유명한 마카비 장군입니다. 우리에게 이순신 장군이 있다면, 유대인들에게는 마카비 장군이 있습니다. 그 장군이 개선할 때, 유대인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환호하며 맞았습니다. 마카비를 하나님께서 보내신 영원한 임금 메시야로 알고 환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얼마 후, 마카비는 다른 왕들처럼 죽음으로써 유대인들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는 자신의 용맹과 힘으로 왕이 될 수 있었지만, 메시야가 될 수는 없었습니다. 그 이후로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될 법한 인물이 나타나면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환영하며 그들의 열망을 표현했습니다.
그러므로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예수님을 맞은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회복하여 위대한 왕국을 세우고, 세상의 모든 나라를 점령하여, 영원히 다스리게 될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눈 먼 사람의 눈도 뜨게 하고, 죽은 사람을 살리기까지 했다면, 메시야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광경을 보고, 예수님을 죽이려 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절망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갔소."(19절)
주목해야 할 또 하나의 사물은 어린 나귀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갈 때, 어린 나귀를 타셨습니다. 여러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어른이 된 남자가 나귀를 타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게다가, 어린 나귀라면 어떻겠습니까? 마치 놀이터에 있는 어린이용 목마에 어른이 앉아 있는 것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전투를 위해 전진해 들어가는 장군의 모습이 아닙니다. 오히려 광대의 모습에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말(horse)이 없어서 새끼 나귀를 탄 것이 아닙니다. 의도적으로 새끼 나귀를 골라 타셨습니다. 스가랴 9장 9절의 예언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예언은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여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올려라.
네 왕이 네게로 오신다.
그는 공의로우신 왕,
구원을 베푸시는 왕이시다.
그는 온순하셔서,
나귀 곧 나귀 새끼인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
하나님은 예언자 스가랴를 통해, 구원의 왕이신 메시야가 예루살렘 성으로 올 때 어린 나귀를 타신다고 예언하십니다. 온갖 무기로 중무장을 하고 백마를 타고 병거를 이끌고 진군해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들어갈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폭력으로 적군을 제압해 위대한 이스라엘을 회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섬김으로 원수들을 감동시켜 진리의 나라를 일으키신다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예언을 생각하시고 어린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러니, 이 얼마나 우스운 일입니까?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모습만이 우스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죽을 각오를 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가고 있는데, 무리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들고 나와, 예수님께 진군하라고 열광합니다. 예수님은 죽으러 가는데, 무리들은 가서 원수들을 죽이라고 열광합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가는데, 무리들은 이제 그만 떨치고 일어나 원수들을 박멸하라고 부추깁니다. 예수님은 묵묵히 자신의 꿈과 소명을 위해 예루살렘으로 들어갔고, 무리들은 자신들의 꿈을 위해 열광했습니다. 예수님의 꿈이 그들의 꿈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을 때, 그 무리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습니다. "이제 다 틀렸소. 보시오. 온 세상이 그를 따라 갔소"라고 절망했던 바리새파 사람들은 너무 성급하게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닙니다. 다 각기 제 꿈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4.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생각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과 매우 달랐던 것을 발견합니다. 예수님은 성공에 대한 생각에 있어서 세상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무리들이 생각하는 성공은 싸워서 이기는 것이었습니다. 이기는 사람만이 정의입니다. 지면 죄인이 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겨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루 하루 살아가는 것을 성공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업적을 이루면 좋고, 아무런 업적을 이루지 못해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유명해져도 상관없고, 그렇지 않아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서 이겨도 상관없고, 져도 상관없었습니다. 그렇게 살아, 오래 살아도 좋고, 일찍 죽어도 상관없었습니다. 정직하게 이기면 좋겠지만, 부정하게 이기느니, 차라리 정직하게 지는 편을 택하겠다는 입장이었습니다. 의로운 삶을 살아 오래 살면 좋겠지만, 불의하게 살아남느니 죽더라도 의를 따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한 믿음이 없었다면, 그분은 십자가의 길을 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기 위해 유대 지방으로 가려 하실 때, 제자들이 말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선생님, 방금도 유대사람들이 선생님을 돌로 치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려고 하십니까?"(11:8)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낮은 열두 시간이나 되지 않느냐? 사람이 낮에 걸어 다니면, 햇빛이 있으므로 걸려서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밤에 걸어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으므로, 걸려서 넘어진다"(9절). 예수님이 하고자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중요한 것은 진리를 따라 행하느냐에 있다는 것입니다. 죽고 사는 것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정말 두려워할 것은 죽는 것이 아니라 밤에 사는 것입니다. 즉, 진리를 떠나 죄 가운데 살아가는 일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삶입니다. 그분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뜻을 찾았고, 진리만을 따라 살았습니다. 그분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데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분에게는 곧 자신을 실현하는 일이었습니다. 무리들은 자신의 욕심과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는 것을 자아실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 욕심과 야망을 이루려고 힘썼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속임수였습니다. 자신의 욕심과 야망을 잡고 있는 존재는 진정한 자신이 아니라 병든 자아였기 때문입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분이 자주 말씀하시듯, 그분은 하나님 안에 있었고, 하나님은 그분 안에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아직 어릴 적, 저는 아이들이 읽는 위인 전집을 보면서, "다른 위인과 비교할 때,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여기에 들어가셨나?"라는 질문을 한 적이 있습니다. 다른 위인들, 즉 세종대왕, 에디슨, 나폴레옹, 김구 같은 분들은 나름대로 이룬 업적이 있습니다. 그분들에 비해 예수님은 무엇을 이루었습니까? 갈릴리라는 촌에서 이름 없는 무리들을 이끌고 3년 동안 방랑하다가 정치범 누명을 쓰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분은 하루하루 하나님의 소명을 따라 신실하게 사시다가, 아무 것도 남겨놓은 것 없이 실패자처럼 돌아가셨습니다. 십자가는 그분이 이루신 업적이 아니라, 그분이 신실하게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사셨던 삶의 결정이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실패라고 했을 때, 하나님은 그분을 부활시키심으로 그분의 삶을 성공이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성공이라고 하시니 성공인 겁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삶을 성공이라고 하신 이유는 그분의 업적 때문이 아니라 죽음에 이르기까지 진실하고 신실하셨던 그분의 태도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위인의 반열에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업적 때문이 아니라 삶의 태도 때문입니다.
5.
다시, 서두에 꺼냈던 빌 게이츠와 워런 버펫의 이야기로 돌아가겠습니다. 이 두 사람의 미담은 성공이 무엇인지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해줍니다. 다른 부자들에 비해 칭찬 받을만한 훌륭한 일을 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행동이 모든 사람들이 꿈꾸어야 할 이상적인 삶의 목표는 아닙니다. 돈을 인생의 목적으로 삼는 것도, 한 번의 멋진 사용을 위해 돈을 꼭꼭 쌓아두는 것도,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정신에 어울리지는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많은 돈을 벌어 의미있고 멋지게 사용하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어린 나귀를 버리고 백마로 올라타는 것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제자는 무슨 일을 하든지 이웃을 섬기려는 하나의 마음으로 일하여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게 합니다. 어린 나귀를 타신 예수님의 제자는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며, 그 때 그 때 만나는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뻗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빌 게이츠나 워런 버펫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웃을 위해 유익하게 사용될만한 업적이나 재산을 이루셨습니까? 축하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것을 어떻게 유익하게 사용할 수 있을지, 기도 중에 물어야 할 때입니다.
혹시, 아직 젊어서, 빌 게이츠나 워런 버펫처럼 되어 보려는 꿈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것보다는, 하루 하루 정직하고 신실하게 사는 일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세상에 유명해지는 것 보다는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을 추구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지만, 하루 하루 벌어 먹고 사는 형편이지만, 정직하고 진실하게 살며, 불의한 수입을 바라지 않으며, 거래하는 손님들을 위해 정성을 다해서 일하고 사십니까? 많은 것을 나누지는 못하지만, 때때로 딱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지갑을 열어 도움을 주고 계십니까? 여러분이 빌 게이츠와 워런 버펫보다 못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인류 역사에는 여러분의 이름이 기록되지 않을지 몰라도, 하나님께는 여러분의 이름이 이미 알려졌습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시기 바랍니다. 부자들을 생각하며 "나는 언제나 저렇게 해 보나?"하고 힘을 잃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공은 최후의 결과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루 하루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공은 얼마나 많은 것을 쌓았느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신실하게 살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공은 얼마나 유명해졌느냐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게 살았느냐에 의해 결정됩니다. 성공은 이 세상에 이름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입니다. 성공은 백마를 탄 개선장군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린 나귀를 타고 낮은 사람들을 찾아가는 것입니다. 성공은 위대하고 큰 일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일 하나라도 정성껏 섬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주님께서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바라시는 일입니다.
어느 책에서 읽은 이야기 하나를 들려 드리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어떤 젊은이가 어느 날 아침에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저 멀리에서 누군가 백사장에서 춤을 추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 보입니다. 그 젊은이는 호기심을 갖고 천천히 걸어가 보았습니다. 가까이 보니, 노인 한 분이 백사장에서 무엇인가를 주워들고 물가로 가서 있는 힘껏 바다로 던져 넣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그 젊은이의 호기심은 더욱 커졌습니다. 그래서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 노인은 "파도 물살이 이 불가사리를 백사장까지 밀어 올려놓았습니다. 이것들은 여기에 그냥 있으면 햇빛 때문에 말라 죽습니다. 그래서 바다로 다시 던져 넣어주는 것입니다." 그 젊은이는 아연하여 다시 묻습니다. "아니, 어르신, 이 긴 백사장에 죽어가고 있는 불가사리가 수 천마리도 더 될 것입니다. 그러신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 노인은 젊은이의 말을 못 들은듯 허리를 구부려 불가사리를 한 마리 집어 들더니 바다 안으로 던져 넣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젊은이를 바라보고 말했습니다. "적어도 지금 던진 그 불가시리는 달라졌습니다."
오늘의 인류 사회를 위해 하나님께서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빌 게이츠나 워렌 버펫같은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이 노인처럼 작은 일에 정성을 다하여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을 더 보고 싶어하십니다. 어린 나귀를 타셨던 주님의 제자라면 이러한 삶에 기꺼이 만족하고 하루 하루를 기쁨으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능력입니다.
어린 나귀를 타셨던 주님,
세상적인 성공이 아니라 신실하게 사는 것에 마음을 두셨던 주님,
한 영혼을 섬김으로 온 인류를 섬기려 하셨던 주님,
저희에게도 이 마음을 주소서.
백마를 탄 개선 장군이 되고 싶어하는 저희 마음을 다스려 주소서.
이름을 남기고 업적을 남기려는 저희 욕심을 다스려 주소서.
오직 주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을 따라 하루 하루 정성을 다해 섬기게 하소서.
그것이 진정한 성공임을
마지막 순간까지 잊지 않게 하소서.
아멘.
'좋은 말씀 > 김영봉목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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