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우리 하나님은 예수님 같다" (요한복음 10:22-42)

새벽지기1 2016. 6. 17. 10:53


 

1.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분이 위대한 성현 중 한 분이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지만, 신적인 존재로까지 추켜 올리는 데에는 동의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인간으로서 신이 될 수 없다고, 혹은 신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올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것은 신화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지,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도 그것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습니다. 이 신앙 고백을 잘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반복하겠습니다저는 인간으로서 신이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습니다. 신이 인간이 될 수 있다고도 믿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2천년 전에 유대 땅에 사셨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믿습니다.

 

어떻습니까? 제가 앞뒤가 닿지 않는 모순을 말하고 있다고 느끼시지 않습니까? "인간이 신이 되거나 신이 인간이 되는 가능성을 믿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을 수 있다는 말이냐?"라고 반문하고 싶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오늘 말씀드리려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을 들을 때 무엇을 생각합니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것처럼, 신과 인간이 결합하어 탄생된 '반신반인'(half-god and half-human)을 생각하지 않습니까? 아니면, 겉으로는 인간인데 실제는 신(), 그런 존재를 생각하지 않습니까? 해부학 실험실에서 예수님의 시신과 보통 사람들의 시신을 비교해 보면, 예수님의 몸에서 뭔가 다른 점이, 뭔가 특별한 점이 발견될 것이라고, 우리 기독교인들이 믿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는 말은 그분의 몸에 뭔가 신적인 형질(形質, gene)이 있다고 믿는 것이라고 오해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반신반인이셨다고 믿는다면, 혹은 그분이 겉으로만 인간의 모습을 했을뿐 실은 신이었다고 믿는다면, 혹은 그분의 세포 속에 보통 인간과 다른 신적인 형질이 담겨 있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정통 기독교가 지난 2천년 동안 붙들어온 교리를 스스로 부인하는 것입니다. 정통 기독교가 오랜 동안의 교리 논쟁을 통과해 오면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영원한 진리로 천명한 것이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요 완전한 인간이시다"(Jesus is the true God and true human)라는 진리입니다. 여기서 '완전한 인간'이라는 말은 '완성된 인간'이라는 뜻이 아니라,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이 전혀 없는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해부학 실험실에 그분의 몸과 저의 몸을 비교해 보면, 인간의 본성이라는 점에서 조금도 차이가 없을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반신반인이었다거나 겉으로만 인간이고 실은 신이었다는 믿음은 좋은 믿음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사이비 신앙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이런 것을 알기에 저는 사람들과 기독교 신앙에 대해 대화를 하면서 딱하게 느낄 때가 많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인간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냐?"라고 반문하는데, 막상 "그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으면, 대개 위에서 제가 말씀드린 것 같은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전혀 대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뭔지도 모르고 무조건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반대로, "나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굳게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도 그런 오해를 가지고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음이 좋다는 사람에게 그게 무슨 뜻이냐고 따져 물어 보십시오. 아마 대부분은 말문이 막혀 화를 내면서, "왜 나한테 그래? 목사나 신학자에게 물어봐!"라고 응답할 것입니다.

 

제가 큰 영향을 받은 신약학자 중에 톰 라잇(N. T. Wright)이라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이 어느 책에선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분이 영국의 옥스퍼드(Oxford) 대학교에서 가르치고 있는데, 신입생들에게 기독교 신학을 가르치면서 첫 시간에 묻곤 한답니다. "여러분이 기독교 신앙 가운데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물으면, 대개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교리가 가장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라고 답한답니다. 그러면 이 교수님은 "그래요? 그러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게 설명해 보시겠습니까?"라고 되묻는답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의기양양하여 자기들의 생각을 늘어놓는다는 것이죠. 톰 라잇 교수님은 다 듣고 난 후, "대답해 주어 고맙습니다. 그런데요, 저도 그런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저도 예수님을 그렇게 믿고 있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한답니다. 그러면 학생들은 대부분 깜짝 놀라게 되는데, 그 후에야 그 교수님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설명해 준다고 합니다.

 

사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내가 부정하는 것이 무엇을 부정하는 것인지도 모르고 부정하고, 내가 믿는다고 고백하는 것이 무엇을 믿는 것인지를 정확히 모른채로 고백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분들은 참된 사랑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그렇게 말합니다. 참된 사랑이 무엇인지 조금이라도 맛보고 나면 아마 말씀이 달라질 것입니다. "나는 영생을 믿지 않는다"라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그분들은 영생을 '목숨의 무한한 연장'쯤으로 생각합니다. 영생이 목숨과는 질적으로 다른 참된 생명임을 조금이나마 경험한다면, 달리 말씀하실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니까, "나는 믿지 못하겠다"라고 말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믿으려는 대상이 거짓이기 때문이 아니라, 믿으려는 대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습니다. "나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할 때, 그게 무슨 뜻인지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 말씀을 통해 전하고자 했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사정이 전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말을 제대로 귀담아 들을 생각도 하지 않고는, 자기 멋대로 해석하여, "나는 그런 말을 믿을 수가 없다"고 단정해 버립니다.

 

3.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속에도 같은 상황이 벌어집니다. 때는 오늘날 하누카(Hanukah)라고 불리는 '성전 봉헌절'이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기 약 150년 전경, 마카비라는 유대인의 영웅이 나타나 헬라인들에게 점령 당했던 성전과 예루살렘을 회복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가 하누카입니다. 그 때, 유대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24절입니다.

 

'당신은 언제까지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하시렵니까? 당신이 그리스도면 그렇다고 분명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25절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가 믿지 않는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하는 그 일들이 곧 나를 증언해 준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30)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을 듣고 유대인들이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무엇 때문에 내게 돌을 던지려 하느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그들이 대답합니다. 33절입니다.

 

'우리가 당신을 돌로 치려고 하는 것은, 선한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였소'.

 

, 예수님이 어떻게 응답하시는지를 자세히 보시기 바랍니다. 34절부터 36절에 이르는 말씀입니다.

 

'너희의 율법에, '내가 너희를 신들이라고 하였다'하는 말이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신이라고 하셨다. 또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 그런데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여 세상에 보내신 사람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을 가지고, 너희는 그가 하나님을 모독한다 하느냐? '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떤 의미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렀는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너희의 율법'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시편 82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시편을 율법서에 속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시편 82편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들을 향하여 "너희는 모두 신들이요 가장 높으신 분의 아들들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어떤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신성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명 때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십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셔서 세상에 보내셨으므로, 그런 특별한 관계와 사명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분을 그냥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지 않고, '독생자' 혹은 '외아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나누었던 관계는 다른 어느 인간이 가지고 있던 관계와도 비교될 수 없을 정도로 특별한 것이었다는 뜻입니다. 이어지는 말씀 속에서 예수님은 그 뜻을 더 분명히 하십니다. 37절부터 38절에 이르는 말씀입니다.

 

'내가 내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아니하거든, 나를 믿지 말아라.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면, 나를 믿지는 아니할지라도, 그 일은 믿어라. 그리하면 너희는,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당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통해 말씀하시고 일하시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온통 하나가 되어, 그분이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었고, 그분의 말씀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고, 그분의 성품이 곧 하나님의 성품이었다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당신 자신을 환히 드러내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제자 빌립에게 "나를 본 사람은 아버지를 보았다" (14:9)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얼굴 모양이 아니라 표정을 통해, 그분의 음성이 아니라 말씀을 통해, 그분의 외모가 아니라 존재(ethos)를 통해, 그분의 기질이 아니라 성품을 통해, 하나님을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 대화 속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또 하나의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려면, 그분의 말씀을 주의깊게 듣고 그분의 삶을 면밀히 관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정체에 대해 질문하는 유대인들에게 당신이 하는 일을 보고 믿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당신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그분이 하시는 일을 주의깊게 관찰하면 그분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예수님 안에서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그렇게 되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게 된다는뜻입니다.

 

물론, 길가에 핀 이름모를 꽃에서도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갓 태어난 어린아이의 모습 속에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허름하고 냄새나는 노숙자 (the homeless)에게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나는 하나님의 모습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선명하고 뚜렷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말씀과 그분의 삶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는 말은 가장 먼저 그분의 말씀과 삶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라는 뜻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철학자 엘튼 트루블러드(Elton Trueblood) 가 말한 것처럼,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 것은 "참된 하나님은 예수님과 같다"(The true God is like Jesus)라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외모나 음성이나 기질이나 형질이 신성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과 행적과 삶과 죽음과 죽음 이후의 활동을 통해 참된 하나님이 더할 수 없이 분명하게 드러나셨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라는 요청은 그분 속에서 자신을 드러내신 하나님을 만나라는 요청입니다. 물론, 다른 의미도 그 안에 담겨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본문에서 확인하는 의미는 바로 이것입니다.

 

4.

 

얼마 전, '생명의 길' 클래스에서 우리 교회의 정재성 장로님께서 간증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이야기 중에서 오늘의 말씀과 닿는 부분이 있어서, 허락을 받아, 그 일부를 여러분과 나눕니다.

 

20년 전, 미국에 와서 막 인턴, 레지턴트 과정을 마치고 개업을 시작할 즈음의 일입니다. 초기에, 그분은 낮에는 자신의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종합병원 야간 당직으로 일하면서 어렵게 정착 과정을 밟아가고 있었습니다. 어려움은 가정에도 있었는데, 아내인 홍성애 권사님과의 신앙적인 마찰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아내의 신앙 생활로 인해, 장로님은 마치 아내를 교회에게 혹은 예수에게 빼앗긴 듯한 상실감을 느꼈고, 그것 때문에 아내의 신앙 생활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로는 감정적으로 격해져서, 남편으로서는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러던 중,

장로님은 감정적인 반대와 박해만으로는 아내를 교회로부터 건져낼 길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명석한 두뇌를 이용하여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해 내면, 아내가 예수 믿기를 포기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부하는 일에는 언제나 자신이 있던 그분은 기필코 그 일을 해 내고 말겠다고 다짐했고, 능히 할 수 있다고 자신했습니다.

 

어느 날, 드디어 기회를 잡았습니다. 하루는 종합 병원에서 야간 당직을 맡았는데, 환자가 별로 없었습니다. 그분은, 늘 찬송을 부르며 다니는 흑인 남자 간호사에게, 예수님에 대해 알아보고 싶은데, 가장 좋은 책이 무어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요한복음을 읽어 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장로님은 아무도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서 신약성경의 요한복음을 펴서 한 절 한 절 읽어가기 시작했습니다. 기필코 예수쟁이들의 허점을 발견해 내고야 말리라는 결의로, 비판의 칼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읽어 내려갔습니다.

 

요한복음의 1, 2장을 거쳐 읽어 내려가는데, 별로 걸리는 게 없더랍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건수가 잡히겠지"하는 마음으로 계속하여 읽어 내려갔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래? 그럴 수도 있겠네. 어디, 조금 더 보자"라는 심정이 들더랍니다. 그렇게 읽어가다가 146절에 이르렀습니다. 거기에는 가끔 들어본 유명한 말씀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거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갈 사람이 없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에 이르자,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순간, 마음을 짓누르고 억압했던 응어리가 눈 녹듯이 녹으면서, 그 동안 맛보지 못했던 자유와 기쁨이 마음을 압도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 맞는구나. 예수님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셨구나!"라는 믿음이 마음을 파고들었습니다. 그분은 그때로부터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병원 진료실을 선교처로 삼아 섬기고 전도하는 일을 지속하고 계십니다.

 

장로님의 이 체험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분은 엘리트 과정을 거친 수재답게 아무거나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기독교 신앙은 그분의 지성에 위배되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대체 있을 수 없는, 신화같은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기독교를 믿지못했던 것이고, 아내의 신앙을 박해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허점을 찾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직접 접하는 동안, 그분은 그 말씀과 행적을 통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던 것입니다. 그 결과, 이성으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던 그 신화같은 믿음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믿으려는 의도로든 , 반대하려는 의도로든, 예수님을 진지하게 대면한 사람으로서 하나님과의 대면을 피할 방법은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나면, 예수님을 향해 도마가 고백했던 것처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라고 부르짖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체험이 일어났던 날 아침, 장로님은 집으로 돌아와, 문을 열고 맞아주는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I don't need you anymore. I have Jesus!" 이게, 회심을 하고 나서 아내에게 할만한 말입니까? 그때까지 박해를 참아가면서 남편이 예수님을 믿게 되기만을 기도한 아내에게, "내게 예수가 있으니, 당신은 이제 내게 필요없어!"라구요? 간밤에 만난 것은 예수님이 아니라 악마가 아니었을까요?

 

그 말을 들은 아내의 심정이 어땟을까 싶어 홍권사님께 물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기억이 나지 않는답니다. 다만, 그렇게 오랫동안 짜증과 미움과 화로 일글어졌던 남편의 얼굴에서 그 모든 것이 사라지고 해처럼 빛나는 얼굴로 웃고 서 있는 모습만이 기억에 남아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후, 장로님은 신앙 생활을 반대하며 아내를 박해한 것 때문에 3년 동안이나 기도할 때마다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그러니 "I don't need you anymore"라는 외침은 아내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5.

 

어떻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교리에 대해 가지고 있던 의문들이 어느 정도 풀리셨습니까?

 

이 말씀으로 인해 풀린 의문도 있지만, 새로운 의문이 고개를 드는 것을 느끼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신앙의 길은 끝없는 질문의 길입니다. 가령, 이런 질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다"라는 말이 그분이 하나님과 가지고 있던 특별한 관계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누구든 영적 생활에 전심을 다하여 예수님과 같은 정도로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에 이른다면, 예수님과 같아질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예수님은, 마치 석가모니처럼, 영적 생활을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길을 가르치신 스승이라 할 수 있으며, 따라서 예수님은 한 분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류 역사 속에서 얼마든지 다시 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이 생각은 아주 그럴듯한데, 한 가지의 중요한 점을 잊고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은 인간 편에서 구도정진(seek the truth wholeheartedly)함으로 어떤 목적지를 향해 다가가려는 노력이 아닙니다. 영적 생활을 통해 이루려는 것은 해탈(nirvana)에 이를 수 있는 어떤 영적 수준에 이르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격적인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불교의 사상입니다. 이에 반해, 기독교 신앙은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가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떻게 행동하시느냐도 중요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관계 속에서 결정됩니다. 우리의 노력만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도하시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2천년 전에 살았던 유대 청년 나사렛 예수를 거룩하게 하여 그분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기로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아무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지만, 기독교는 모든 사람이 예수가 될 수 있다고 믿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닮아 살아가는 제자가 될 수 있을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은 그분을 보고 하나님을 만나라는 것입니다. 실상, 예수님에 대해 뭐라고 이름을 붙이는가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말을 다 해명하는 것도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실상, 이 심오한 진리를 다 해명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저는 본문을 붙잡고 할 수 있는대로 힘써 보았을뿐입니다. 이 모든 노력을 통해 손에 잡히는 결론은, 그 옛날 히브리서 저자가 호소했듯, "예수를 깊이 생각합시다"(3:1)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직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으로 믿기에 어려움이 있으십니까? 이제 두 주일 남은 이 사순절 기간에 진지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만나고 알기 위해 더 힘써 보지 않겠습니까? 복음서를 하나 택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무릎꿇고 읽으면서 그분 안에서 자신을 환히 드러내시는 하나님을 만나 보시지 않겠습니까? 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통해 수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했듯, "맞아, 참된 하나님은 바로 예수님과 같아!"라고 고백하는데까지 이르러 보시지 않겠습니까?

 

이미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굳게 믿으시는 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 믿음에 이르렀습니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믿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제대로 알고 믿으셨습니까? 여러분이라고 해서 믿지 않는 분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더욱 더 예수님을 배우고 알아가는 일에 힘쓰십시다. 교리만 받아들이는 것으로 참된 믿음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 교리의 진실을 직접 확인하고 체험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직 기도로, 말씀 연구로, 거룩한 교제로, 예배로, 사랑의 봉사로 주님을 추구해 나가는 일관된 삶을 통해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입니다.

 

참된 하나님은 우리 예수님과 같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당신을 선명하고 뚜렸하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그분의 말씀, 그분의 행적, 그분의 죽음, 그분의 부활, 그분의 영적 활동은 우리에게 참된 하나님을 만나게 해 줍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이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 기독교는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요 완전한 신이다"라는 교리를 고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계절에 예수님을 더욱 깊이 생각하십시다. 마음을 다하여 그분을 찾으십시다. 하나님이 더욱 환히 드러나실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신비로운 은총이 가득하기를 기원합니다.

 

 

예수님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신 하나님,

하나님을 선명하게 드러내 보여주신 예수님,

그 예수님을 지금도 만나게 하시는 성령님,

저희를 깨우소서.

저희를 자극하소서.

저희를 떼밀어 주소서

예수님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을 만날 때까지.

하나님을 만나 그분에게 사로잡힐 때까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