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한 목자'(The Good Shepherd)라는 말을 들으면 여러분은 어떤 이미지를 생각하십니까? 아마도 이 제목으로 가장 잘 알려진 그림이 워너 살만(Werner Sallman)의 이 작품일 것입니다.
이 그림을 보면 '선한 목자'의 이미지가 매우 목가적(pastoral)이고 평화적이며 아름답습니다. 그 어떤 어두움의 그림자도 없습니다. 목자도 행복해 보이고, 양들도 행복해 보입니다. 이 그림만 보고 있으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평화롭고 목가적이며 아름다울 것처럼 느껴집니다. 이 느낌이 과연 옳을까요? 예수님께서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신 메시지가 이런 것일까요?
오늘 읽은 요한복음 10장 11절에서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선한 목자'라고 소개하십니다. '선한 목자'의 반대는 12절에 나오는 '삯꾼 목자'(the hired shepherd)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읽어 보면, 선한 목자와 삯꾼 목자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차이점을 살펴 보면, 선한 목자의 비유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좀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선,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가장 자명한(self-evident) 차이점은 11절과 12절에 나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필요하다면 생명까지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반면, 삯꾼 목자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필요하다면 양들을 버려두고 달아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밤중에 야수가 나타나 양들을 해치려 할 때, 선한 목자는 위험을 무릅쓰고 양들을 지키지만, 삯꾼들은 위험을 피합니다. 삯꾼 목자는 손해보지 않을 만큼만 행동합니다. 그들의 목적은 돈이기 때문입니다. 돈을 벌기 위해 왔기 때문에 자기의 목숨까지 희생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반면, 선한 목자는 돈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양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무한 책임을 집니다.
실상, 예수님이 말씀하신 '양과 목자의 비유'는 구약성경 에스겔서 34장에 나오는 비유를 그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에스겔서 34장에 나오는 비유의 요점은 이겁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양들을 목자들에게 맡겼는데, 그 목자들이 자기들의 욕망을 위해 양들을 이용하고 착취하며 바짝 말라 죽도록 방치해 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목자들'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가리킵니다. 양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살피도록 지도자들을 세우셨는데, 지도자들은 그 백성들을 자기 욕심을 위해 착취했다는 뜻입니다.
에스겔 34장에서 이상하리만큼 자주 반복되는 어구가 하나 있습니다. "내 양 떼"라는 말입니다. 우리 번역으로만 보더라도 19회(6절, 8절에서 네 번, 10절에서 네 번, 11절, 12절에서 두 번, 13절, 15절에서 두 번, 17절, 19절, 22절, 31절)나 반복되어 나타납니다. 이상하리만큼 "내 양 떼"라는 말을 자주 반복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양떼의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소유인 모든 양들이 안전하고 평안한 가운데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 목자를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그 목자들이 양들을 자기 소유처럼 여기고 마음대로, 욕심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언자 에스겔을 통해 다음과 같이 예언하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내 양 떼를 구해 주어서, 그것들이 다시는 희생을 당하지 않도록 하겠다. 그리고 내가 양과 양 사이에서 심판하겠다. 내가 그들 위에 목자를 세워 그들을 먹이도록 하겠다. 그 목자는 내 종 다윗이다. 그가 목자가 될 것이다. 그 때에는 나 주가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내 종 다윗은 그들의 왕이 될 것이다. 나 주가 말한다. (겔 34:22-24)
이 말씀은 마지막에 참된 목자로 오실 메시야에 대한 예언입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실 메시야가 참된 목자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구하고 복되게 해 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일컬어 "나는 선한 목자다"라고 말씀하신 배경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당신 자신이 선한 목자로 오신 메시야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가장 큰 관심은 양떼에 대한 주인의 뜻 즉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양떼가 하나님께 속해 있음을 아셨고, 따라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방법으로 양떼를 돌보아야 한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것이 삯꾼과 선한 목자의 가장 큰 차이점입니다.
2.
삯꾼 목자와 선한 목자 사이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차이점은 양들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삯꾼 목자들은 양들에 대해 관심이 없었습니다. 13절을 보면,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삯꾼 목자와 양들 사이에 사랑의 관계가 형성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양들에 대해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않습니다. 삯꾼 목자는 돈을 위해, 이익을 위해 양들을 돌보기 때문에 그 양들에 대해 관심을 쏟지 않습니다. 주인에게 해고되지 않을 정도만큼만 양들을 돌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들에 대한 사랑이 없습니다. 양들을 직업적으로, 사무적으로 대할 뿐입니다.
반면, 선한 목자는 어떻습니까? 14절 이하를 보니, "나는 선한 목자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고 되어 있습니다. 히브리 말에서 '알다'라는 말은 서로 사귀어 아는 것을 가리킵니다. 선한 목자는 자기에게 맡겨진 양이 하나님의 사랑받는 양들임을 압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양들을 돌보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다 보니 양 한 마리 한 마리에 정성을 다합니다. 그렇게 관심을 두고 돌보다 보니, 하나 하나를 진실로 알게 되고, 그 결과로 양 하나 하나를 진실로 사랑하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이 닥쳐 왔을 때, 목숨을 내걸고 양들을 지킵니다.
예수님은 오늘의 비유 마지막 즈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무도 내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어버지께로 부터 받은 명령이다(18절).
여기서 헬라어 '티테미'를 '버리다'라고 번역한 것은 아주 아쉬운 일입니다. 이렇게 번역해 놓으니까, 마치 휴지를 버리듯, 쓰레기를 버리듯, 예수님이 목숨을 하찮게 여겨서 버리는 것처럼 오해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공동번역성서'가 이 단어를 제일 잘 번역해 놓았습니다.
누가 나에게서 목숨을 빼앗아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이다. 나에게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있고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여기서 예수님은 당신의 목숨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랑을 위해 '바치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명령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소명 의식은 분명했고 확고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을 구원하기 위해 당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바쳐 섬기라는 것이 예수님이 믿고 있던 자신의 소명이었습니다. 그분은 실로 이 소명을 이루기 위해 당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용하여 섬기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분은 스스로를 '선한 목자'라고 부를 자격이 있습니다.
16절에 보면 아주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이 나옵니다.
나에게는 이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이끌어 와야 한다. 그들도 내 목소리를 들을 것이며, 한 목자 아래에서 한 무리 양떼가 될 것이다.
여기서 '우리 안에 있는 양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은 아직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 속하지 않은 다른 양들까지도 이끌어 와서 모든 양들이 한 무리의 양떼가 되도록 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의 관심과 사랑은 교회 안에만 혹은 기독교인들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종교인이든, 어떤 인종이든, 어떤 형편에 있든, 사람이면 모두 하나님의 자녀이며, 따라서 모든 사람들이 살아계신 참된 하나님 앞에 돌아오게 하는 것을 위해 일하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일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3.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은 이렇게 사셨습니다. 그분이 이 땅에서 행하신 모든 일들과 가르침은 철저히 하나님의 뜻에 일치되어 있었습니다. 그분은 하나님의 뜻을 찾기 위해 부단히 기도했고, 그 밀도 있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깊은 인격적 교제를 유지하고 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 본문에서 하신 말씀처럼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이"(15절)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분은 어떤 결정을 할 때, 돈을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손해를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명분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체면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인기를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찾았고, 그 뜻대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았습니다. 그분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위해, 그들의 구원과 행복을 위해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것을 사용하여 섬기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뜻을 억지로, 마지 못해 따르지 않았습니다. 즐거이, 기쁘게 그 뜻을 따랐습니다. 자신을 부인하고 낮아져서 모든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섬기다 보니, 한 사람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셨습니다. 그분은 그 사랑을 위해 사셨습니다. 그 사랑이 이끄는 대로 사셨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이 지극한 사랑이 결국 그분을 십자가에서의 죽음으로 이끌어갔습니다. 그분은 그 비극적인 미래를 분명히 예감하셨습니다. 하지만 피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위해 목숨이 필요하다면 기꺼이 바칠 결의가 있었습니다. 그 결의를 가지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갔고, 그곳에서 결국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했습니다. 외면적으로 보면, 권력자들에게 잡혀 억울하게 죽은 젊은 사형수의 모습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오직 사랑을 위해 살라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당신의 목숨까지 내어주신, 선한 목자로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앞에서 우리가 본 워너 살만(Werner Sallman)의 그림이 너무 낭만적이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선한 목자는 십자가를 짊어 지고 고난의 길을 가는 사람입니다. 푸른 초장, 맑은 시냇가에서 양들과 함께 노니는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드려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선한 목자의 삶은 손해와 고난과 아픔과 외로움으로 엮여 있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데보라 리더(Deborah Reeder)가 그린 다음의 그림이 더 잘 표현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어깨에 걸려 있는 이 사람이 누구인지 아십니까? 바로 접니다. 바로 여러분입니다. 선한 목자로서 오신 주님은 저와 여러분을 구하시어 참되고 복된 삶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걸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어깨에 걸려 있는 것은 사람입니다만, 그것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의미합니다. 왜 예수님이 나무로된 십자가를 지셨습니까? 바로 나의 죄와 아픔과 고난과 절망과 죽음을 짊어지기 위해서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납니다! 예수님은 나를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길을 가셨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하여 나를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순절에 우리가 확인해야 할 주님의 은혜입니다. 불행하게도 이것은 논리로 설명될 수 없습니다. 지식은 논리의 틀로 담아낼 수 있지만, 진리는 논리로 담아낼 수 없습니다. 진리는 몸 전체로 깨달아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묵상을 하는 가운데, 불현듯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의 어깨에 걸려있는 그 사람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 주님!"이라고 부르면서 그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그렇게 십자가 아래 무너질 때, 우리는 비로소 새로 지어지게 됩니다. 이 신비로운 은총이 이 특별한 기간에 여러분 모두에게 임하게 되기를 기원합니다.
4.
선한 목자가 짊어진 십자가는 우리를 무너뜨리고 회복시킬뿐 아니라, 우리에게 참된 삶의 길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가 사는 이 자본주의 사회는 높아지는 길을 가르칩니다. 반면, 십자가는 낮아지는 길을 가르칩니다. 이 세상은 돈의 값을 제일로 따집니다. 반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뜻을 제일로 따집니다. 이 세상은 잘 먹고 잘 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반면, 십자가는 바로 사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 세상은 나를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반면, 십자가는 나를 희생하여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 세상은 강해지는 법을 가르칩니다. 반면, 십자가는 약해지는 법을 가르칩니다. 이 세상은 "더 많이, 더 빨리, 더 높이"를 가르칩니다. 반면, 십자가는 한 걸음 한 걸음 정성을 다해 낮아져가는 길을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의 천국인 이 땅에 사는 우리 믿는 사람들은 거대한 도전 앞에 맞서 있습니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이 세계의 정신이 너무도 강하고 매력적이기 때문에 우리는 십자가를 내려놓고 정반대의 길을 따라가려는 유혹에 빠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삯꾼 목자와 선한 목자의 이미지를 잘 기억하고 있으면, 우리는 십자가의 길에서 멀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삯꾼의 길은 타락한 자본주의의 길입니다. 선한 목자의 길은 십자가의 길입니다. 우리가 연봉을 따라 직장을 전전하고, 그 돈값의 차이에 따라 일희일비하고, 오직 돈을 많이 버는 일에만 집중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사례비를 위해 일한다면 그리고 그 사례비를 따라 교회를 전전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혹은 교회에서 일하면서 사람들의 칭찬이나 인정을 바라거나 혹은 권력이나 감투를 얻을 요량으로 일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들에게 대한 참된 배려 없이 나 자신의 욕구와 목적을 위해 다른 가족을 희생시키려 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민자로 생활하면서 국가에 대한 자신의 책임은 도외시한 채, 어떻게든 최대한의 이익을 긁어내려는 노력만 한다면, 우리는 삯꾼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나 자신의 행복을 최대화시키는 길처럼 보이지만, 결국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마침내 나 자신까지도 불행하게 만드는 악한 길입니다.
반면, 우리가 직장에서 일할 때,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최대한의 배려를 하고 자신이 하는 일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최선의 봉사를 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선한 목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 가족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깊은 배려를 보내고, 자신의 불편을 무릅쓰고 다른 가족의 참된 행복을 위해 보살피며 봉사한다면, 우리는 선한 목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일하면서 언제나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묻고 그 뜻만을 위해 헌신하고 조용히 물러날 줄 안다면, 우리는 선한 목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미국에서 이민자로 살면서 마땅히 누리고 얻어야 할 이익도 알지만, 동시에 국가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는 일에도 기꺼워한다면, 우리는 선한 목자의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다들 삯꾼처럼 살고 있는데 나 홀로 선한 목자로 살아가려는 노력이 때로는 부질없어 보일 수 있습니다. 혼자 손해보는 것 같습니다. 주변 사람들은 그 노력을 가상히 보기보다는 "뭐, 그렇게 유별나게 살려느냐?"며 빈정댑니다. 그렇기 때문에 선한 목자의 길을 가는 것,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고는 다른 사람과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행복하게 할 길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메시야로서의 어마어마한 능력을 억누르고 무력하게 십자가에서 죽음을 받아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참된 구원의 길은 사랑의 길, 낮아지는 길, 섬기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른 길로는 구원받을 길이 없습니다.
5.
오늘의 말씀을 대략 준비해 놓고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들과 대화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사를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도중, 아이가 혼잣말처럼 이렇게 물어봅니다. "왜, 선생님들이 모두 그처럼 살고 있을까?" 무슨 영문인가 물어보니, 그 날 첫 시간을 담당한 교사가 너무도 불성실하고 성의가 없이 행동하는 바람에 하루 종일 마음이 불쾌했다고 합니다. 다른 교사들도 별로 다를바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들에게 불친절하고 학업에 무성의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는데 성실하지 못하다는 점에서, 대부분의 교사들이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제 아이는, 그 교사가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 너무도 답답하여, 찾아가서 "Man, you know what? You need Jesus!"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저는 그 선생님들이 학교에서 그렇게 행동하게 된 이유를 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정성을 다하는 것이 예수님이 원하시는 일이니, 그렇게 살도록 힘쓰자고 권고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온갖 사회악의 뿌리가 무엇입니까? 타락한 자본주의 정신이 사회의 모든 영역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딜 가나, 삯꾼 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시민을 위해 봉사해야 하는 정부 기관에도 삯꾼들의 수가 압도적인 것처럼 보입니다. 진정으로 시민의 문제에 관심을 두고 해결해 주려는 선한 목자같은 관리를 찾기가 어렵습니다. 학교에도 삯꾼 교사가 점령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학생들을 향한 진정한 배려가 보이지 않는다고들 불만이 높습니다. 병원에도 삯꾼 의사들, 삯꾼 간호사들이 넘쳐나는 것 같습니다. 환자를 한 사람의 귀중한 영혼으로 대하는 선한 목자들이 눈을 씻고 찾아도 찾기 어렵습니다. 심지어 교회에서조차도 교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해 목회하는 선한 목자는 보기 어렵고, 삯꾼 목사들이 넘쳐납니다. 이 풍조는 가정에까지 침투해 있습니다. 진정한 관계와 진정한 사랑과 전적인 헌신이 가정에서 이미 증발해 버린지 오래입니다. 마치 삯을 받고 자녀들을 양육하듯 하는 부모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마치 삯을 받고 부모를 공양하듯 하는 자녀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울 사도는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 12:2)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의 풍조는 갈수록 교묘해지고 강해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도하고 더욱 깨어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이 사순절 기간에 더욱 깨어 기도하며 간구하십시다. 이제 절반이 남았습니다. 남은 기간 동안, 선한 목자이신 우리 주님의 삶을 더욱 깊이 묵상하십시다. 십자가의 길에 대해 더 많이 생각하십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직장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우리 모두가 삯꾼이 아니라 선한 목자로서 살 수 있도록, 더욱 기도하고 힘쓰십시다. 어디서 무슨 일을 하든, 우리 주님이 그러셨던 것처럼, 전심을 다해 한 영혼 한 영혼을 위해 섬기는 일에 충성하십시다. 삯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살아가십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진정한 이방인으로 살아가도록 힘쓰십시다. 그것이 진실로 십자가의 길을 걷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구원하십니다.
이 세상의 희망은 기꺼이 선한 목자로 살아가려는 우리, 기꺼이 십자가의 길을 가려는 우리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걸머 지는 일은 이 세상의 희망을 짊어지는 일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십니다. 이 고귀한 소명을 따라 하루 하루 진실하고 참되게 살아갈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여러분, 우리가 아니면 누가 이 부름에 대답하겠습니까?
선한 목자이신 주님,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길을 걸으심으로
참된 희망으로 가는 길을 여신 주님.
저희를 이끄시어
주님의 음성을 알아듣고 주님의 우리 안으로 들어가게 하소서.
주님이 열어놓으신 희망의 길을 걷게 하소서.
저희를 도우시어
주님처럼 선한 목자로 살아가게 하소서.
삯꾼만이 넘쳐나는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저희는 주님을 따라 선한 목자로서 살아가게 도우소서.
돈을 제일로 여기는 이 사회에서
주님의 뜻을 제일로 여기며
오직 사랑을 위해 살아가게 인도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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