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 성령론

로이드 존스, 「성령론」(3)

새벽지기1 2016. 5. 24. 21:41


3 장 성령이 우리를 각성케 하심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왜 술 취하는 것과 비교해서 성령의 충만을 말했을까?

1) 새 생명과 옛 생명의 완전한 대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2) 유사점이 있기 때문.

2:12-17에 성령에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을 술에 취해 있다고 생각했다.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술에 취한술에 흠뻑 취한것을 말한다.

술 취하는 것이 방탕으로 이끌어 주어 방탕에 빠진다는 것을 진술한 것이다.

방탕은 탕자의 비유에서 허랑방탕과 동의어다. ‘절약의 반대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과 자유분방과 낭비와 결국에는 파멸로 인도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의 뜻이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제하는 생활이요 질서있는 생활이다.


과음은 무엇보다 이해력을 상실케 하고 품위를 일게 하고 판단력과 균형을 잃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술은 각성제가 아니라 마비제이다.

술을 맨 처음으로 뇌 가운데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고등 중추기관들을 마비시킨다.

그 중추기관들은 사람에게 자율, 자제력, 이해력, 판별력, 판단력, 균형 등

모든 일을 가늠하는 힘을 제공한다.

음주는 갑작스레 조정능력을 제거해 간다.

근신하는 마음”(딤후1:7).

 

2.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낭비하는 생활이 아닌 생산적인 생활이다.


술 취함은 방탕으로 빠져들게 한다. 또한 허랑방탕과 자유분방과 파멸로 이끌어간다.

시간을 허비하고 그의 정력을 허비한다. 순결과 정조마저 내 팽개친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값어치 있는 선물들 중 사고능력과 이성과 계산 능력, 이해력을 상실해 버린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위대한 특징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고 세우고 거기에 더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얻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

구약성경은 경건한 생활은 부를 이루는 생활이라고 한다. 모든 면에서 부요함,

즉 경건한 생활은 실로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부로 인도한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청지기라고 한다. 돈의 청지기요 그 밖의 모든 일의 청지기이다.

다른 모든 감화는 우리들을 고갈시킨다.

그 반면에 성령은 우리들 속에 능력을 불어 넣는다.

전도대회 후의 허탈증(the Postj Campaign Exhaustion)"- 성령의 공작같고 언뜻 보기에 성령의 감화같이 보이는 다른 영향이 피곤에 지치게 했고 고갈하게 만들었다.

성령은 지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속에 능력을 주입시킨다.

성령은 지치게 하지 않으나 사람에 의해 산출되고 써버린 에너지는 지치게 한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9).

우리는 세우고 있는가? 자라고 발전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계신지 아닌지를 탐색하는 가장 좋은 지표이다.

본성적이고 죄 있는 삶은 고갈되어 아무것도 우리에게 남겨 두지 않는다.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자제하는 삶이요 규모있는 삶이요 생산적인 삶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단순히 부정적인 생활에 불과하다. 그것은 금지의 생활이며

언제나 질서와 절제와 훈련과 조심과 그와 유사한 것들만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니다. 천만 번이라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겐 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할만한 일이 있다.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이것은 소극적인 삶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장 큰 원수는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기독교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은

100여년간에 걸쳐 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설교하지 않고 도덕률이나 윤리를 전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다.

 

4. 기독교란 고무적인 것이며 힘을 북돋우어 주는 가슴 벅찬 것이다.


술이란 각성제가 아니고 진정제이다. 뇌에 있어서 보다 더 하등한 요소들이 일어나 주도권을 잡는다.

보다 본능적이고 본태적인 요소를 풀어 놓게 한다. 더 동물적이 되고 자제력을 감소된다.

성령은 진정으로 각성시켜 준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진정한 각성제이다.

우리의 모든 기능을 일으켜 세운다. 마음과 지성을 고무시킨다.

 

역사는 영적부흥과 각성 뒤에 교육열이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령처럼 심정의 가장 깊은 곳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령은 의지를 움직이고 고무시킨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이 확장되고 그의 심정이 자라나고 커지는 사람이다.

그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고 무언가 공헌하고 싶어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도 그것을 누리길 원한다.

그것은 전인 즉 지성과 정서와 의지에 감화를 준다. 얼마나 고무적인가?

 

5.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복한 삶이다.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흥미진진하고 행복하고 기쁨이 가득한 삶이다.

구약은 주를 기뻐함이 너희의 강력이라.”고 한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리 기뻐하라.”(4:4)고 한다.

환난과 시험가운데서도 행복하고 즐거워질 수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실험으로 인하여 감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1:6).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5)

시편 4,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내가 너희에게 내 기쁨을 주노라. 아무도 너희로부터 내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하나님께 감사하자.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주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6.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명랑한 삶이다.

성령에 충만할 때 서로 사랑을 느끼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긍휼을 가지고 돕고 싶어하고,

주를 찬양하는 영광스럽고 위대하며 쾌활한 정신으로 함께 모이고, 서로 노래로 화답하게 된다.

나는 행복하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령의 각성이요 주의 기쁨이다.

그것은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기쁨이다.

우리는 기독교는 비참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나, 억지로 기독교란 기쁨과 명랑함과 바쁨 그리고 육신적인 것에 불과한 자기의 과대표현을 하는 사람을 동시에 혐오하고 비난하고 질책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