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쉐퍼의 변증설교 [1] / 성인경목사(한국 라브리 총무)

새벽지기1 2016. 3. 20. 20:48


프란시스 쉐퍼(Francis A. Schaeffer)는 변증설교를 즐겼지만 그렇다고 변증설교만을 한 사람은 아닙니다. 쉐퍼의 어린이 설교를 읽어보면 변증설교라기 보다는 강해설교 내지 이야기설교와 같은 것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남아있는 그의 육성테이프 중에 로마서, 창세기, 출애굽기, 요한계시록 등을 언뜻 들으면 성경공부같지만 라브리(L'Abri)라고 하는 특수한 공동체에 모여든 청중들을 위한 변증설교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그것들은 모두 그가 만났던 청중들을 위한 특수 설교였습니다. 본 강의에서는 한국교회와 설교자들에게 다소 도움이 될까 하여 쉐퍼의 변증설교의 몇 가지 기본적인 원리를 찾는 것에 집중하겠습니다.

1. 쉐퍼가 추구한 변증학과 변증설교의 목적

변증학(Apologetics)과 변증설교(Apologetic Preaching)는 한 그루의 '나무'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만약 변증학이 나무 뿌리라면 변증설교는 나무 가지와 같습니다. 뿌리가 없는 나무 가지가 없듯이 변증학이 없는 변증설교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변증설교는 변증학의 이론적 뿌리 위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복음 전도의 방법 중에 하나입니다. 여기에서는 지난 시대에 탁월한 변증가로 알려진 쉐퍼의 변증학과 변증설교의 목적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쉐퍼는 "변증학의 첫째 목적은 방어(defense)이며 둘째 목적은 어떤 특정한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기독교를 전달(communication)하는 것이다"고 했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쉐퍼는 변증학의 이 두 가지 목적을 그의 변증설교에 적용했으며, 그 결과는 그가 기대했던 것보다 더 많은 열매를 얻었습니다.

첫째, 세상의 도전으로부터 복음을 방어하는 것입니다. 쉐퍼는 변증학의 '방어와 전달'이란 두 가지 목적 중에, '방어'를 변증학의 소극적 측면이라고 했고 '전달'은 변증학의 적극적인 측면이라 했습니다. 방어와 전달은 변증학이란 수레의 두 바퀴와 같으며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 보다 덜 중요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쉐퍼는 거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습니다.
"방어는 반드시 필요하며 또한 사태를 대비하는데 적합한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적 기독교는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공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방어는 반대 의견을 가진 사람들에 대한 대답이다. 이러한 대답은 나의 인격적 영적 지적 생활의 통일을 위해서 먼저 나에게 필요하며 그 다음에는 내가 책임을 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필요하다. 우리 세대 사람들이 가하는 반론과 애매 모호한 의미가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에 대한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도 기독교를 짊어지고 갈 다음 세대들에게 역사적 기독교의 입장을 계속해서 파수하도록 기대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시대에 상관없이, 복음을 방어하고 파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업무입니다. 많은 변증가들이 나타나서 기독교를 변호한 것은 이 첫 번째 의미에 속합니다. 역사적으로 다음과 같은 사람들이 그 일을 효과적으로 감당한 사람들입니다. 순교자 저스틴(Justin Martyr)의 '변명(Apology)'은 유대인에 대한 기독교 신앙을 변호했습니다. 오리겐(Origen)의 '반 셀수스(Contra Celsus)'는 무신론자에 대한 답변이며, 어거스틴(Augustine)의 글들은 펠라기안주의(Pelagianism)에 대한 방어이며 기독교가 사회와 국가를 반대하는 종교가 아니라는 변호입니다. 그러나 계몽주의에 영향을 입은 회의주의, 세속철학, 과학주의, 자유주의가 풍미하기 시작하면서 '최고의 방어는 공격'이라고 생각한 칼빈(John Calvin)의 '기독교 강요(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천주교의 교리적 오염에 대해, 버틀러(Bishop Joseph Butler, 1692-1752)의 '유추적 종교(Analogy of religion)'는 회의주의적인 무신론 사조에 맞서 유신론증으로 싸웠던 증거들입니다. 그리고 카이퍼(A.Kuyper), 메첸(Gresham Machen), 반틸(Cornelius Van Til) 등은 신학적 자유주의를 향한 적극적인 방어를 펼쳤습니다. 이처럼 변증학은 역사적으로 기독교를 변호하기도 하고 신학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습니다. 


성경도 우리가 적극적으로 복음을 방어하라고 말씀합니다. 베드로전서 3:15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서 변증학과 관련하여 생각해 볼 것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복음에 대한 도전은 언제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즉 복음에 대한 질문이나 신앙의 이유를 묻는 도전은 어느 때나 상존하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2)사람들의 질문에 "대답(απολογιαν, a defence)"을 준비해야 합니다. 여기의 "대답"이란 말은 법정적인 용어인데, 재판관 앞에서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말로 자신의 입장을 변호 내지 방어하라는 것입니다. 3)대답하는 기본 태도는 온유(πραυτητοσ, gentleness)와 존경(φοβου, respect)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난폭하게 질문을 하더라도 그리고 아무리 우리가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들을 무시하는 태도로 접근하면 안됩니다. 강단에서 설교를 통해 현대사상의 도전으로부터 복음을 방어하는 것이 변증설교이며 그 중에 복음을 방어하는 것이 변증설교의 일차적 업무입니다.

둘째,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도록 복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변증학을 방어적인 목적에만 머물게 하고 복음을 전달하는 데에 적극적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면 변증학의 가치를 반감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무슨 변증 방법을 사용하든지 복음을 전도할 목적으로, 특히 불신자에게 접근할 수 있는 실제적인 전달 도구가 되도록 하는 것이 바로 변증학의 장점이며 당연히 그것이 변증설교의 주요 임무가 되어야 합니다.
쉐퍼는 변증학의 전달의 목적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기독교 변증학은 도개교(적의 공격을 막기 위해 판 성 둘레의 물을 건너기 위해 성벽에 매단 다리)가 있는 성 안에 살면서, 가끔씩 성벽 밖으로 돌을 던지는 것과 같은 일을 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변증학은 성 안에 틀어박혀 허리를 벽에 기대고 앉아서 적을 향해 '너희 놈들은 이 안까지 못 와!'하고 고함 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이 이론으로나 실천에 있어서 이와 같은 태도를 취할 것 같으면 그는 20세기 사상을 받아들인 사람들과의 접촉을 잃어버린다... 도리어 자기와 같은 세대의 사람들이 제기하는 문제의 현실과 끊임없이 부딪치고 있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그러므로 변증학의 적극적인 측면은 오늘의 세대가 이해할 수 있는 용어를 사용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증설교는 세상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복음을 설득하고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럴 경우에, 변증설교는 우선 기독인 자신을 위해 유익합니다. 왜냐하면 최상의 방어는 공격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악하다고 해서 참호로 둘러싸인 방공호 속에 언제까지나 숨어 있을 수 없으므로 공격을 해야 승리가 보장되고 문제를 극복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오늘날과 같은 상대주의적이고 종교다원주의적인 세상에서 기독교인들이 대학교를 다니거나, 철학 서적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있는데 적극적인 변증이 없는 설교는 그들을 방치하는 것입니다. 오늘날과 같은 영적 전쟁 시대를 살면서 성도들을 무장 해재시켜놓는 것은 일종의 도피적인 '범죄'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세속 사상과 반기독교적인 적군에게 둘러싸여 포로가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예를 들어, 잘못된 영성에 사로잡힌 바 있는 골로새서 교회에 주신 하나님의 교훈은 전달적인 변증을 잘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골로새서4:6에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크게 3 가지를 상기시킵니다. 1)마땅히 변증해야 할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특히 "각 사람"이란 말을 사용했는데, 사람마다 각자의 질문이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질문에 주의해야 할 때에 살고 있습니다. 2)대답하고 변증하는 것(αποκρινεσθαι, to reply)은 교회의 사명 중에 하나라는 것입니다. 본래 "대답한다"는 말은 법정에서나 사무적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3)변증하는 태도는 은혜스럽고(χαριτι, with grace)와 소금을 친 것처럼(υλατι ηρτυμενοσ, with salt seasoned) 하라고 변증할 때 온유와 존경하는 태도와 함께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은 은혜스럽고 꼭 필요한 만큼만 말하는 것입니다. 

(문화와 설교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