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프란시스 쉐퍼

프랜시스 쉐퍼의 철학적 기여와 사상적 위치" / 이태하교수

새벽지기1 2016. 3. 18. 10:21


프랜시스 쉐퍼의 철학적 기여와 사상적 위치"
이 태 하 교수[서강대학교]

I. 들어가는 말

프랜시스 쉐퍼는 철학적 변증론의 불모지대라고 할 수 있는 20세기 개신교 교단에서 몇 안되는 주목받는 철학적 변증론자 중의 하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쉐퍼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주장하는 바처럼 쉐퍼는 전문적인 철학자라기 보다는 대중적인 기독교 사상가에 가깝기 때문에 그의 철학적 변증론을 평가함에 있어 전문적인 철학자의 경우처럼 그의 변증론의 세부적인 면을 논리적으로 검토해 보기보다는 전체적인 윤곽을 살펴보고 그것이 지니는 철학적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쉐퍼를 이해하고 평가하는 올바른 방법인 것 같다.
쉐퍼의 철학적 변증론을 구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 계시는 하나님』, 『이성에서의 도피』,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이라는 세 개의 주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앞의 두 저서에서는 주로 절망선을 넘어 진리에 대한 상대주의를 주장하는 한편 반이성주의로 인한 신앙의 비약을 주장하고 있는 철학의 문제점을 진단하고 있으며 마지막 저서에서는 현대의 무신론과 반지성주의에 대한 반박으로서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쉐퍼의 변증론이 전개되고 있다.
본고에서는 주로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에 나타난 쉐퍼의 변증론을 살펴보고 그것이 지니는 철학적 의미와 기독교 사상사에서 그것이 차지하고 있는 위치를 짚어 보고자 한다.

II. 쉐퍼의 변증학의 특징과 철학적 의미

쉐퍼는 『거기 계시며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서두를 "본서는 형이상학, 도덕 및 인식론의 영역에 속하는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침묵하시지 않는다는 철학적 필요성을 다룬다"는 말로 시작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이들 철학의 세 가지 핵심 분야를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변증할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철학이 왜 필요한 것인가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인간은 무엇이 존재하며(형이상학), 어떻게 살아야 하며(윤리학), 또한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알 것인가(인식론)에 대해 의문을 갖으며 이러한 의문은 종교와 철학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철학은 이러한 인간의 관심사에 대해 하나의 세계관(world-view)을 제공함으로써 답하고 있는데 바로 이점에 있어서 기독교도 동일한 방식으로 답하고 있다. 쉐퍼는 "기독교는 단순히 어떻게 인간들이 용서를 받게 되는지를 가르쳐 주는 종교가 아니다. 그것은 총체적인 세계관이요, 삶의 가치관인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쉐퍼의 말처럼 기독교가 하나의 세계관이라면 기독교는 세계관을 놓고 철학과 경쟁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관이란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적 견해'를 말한다. 쉐퍼에게 있어 세계관은 곧 '무엇이 존재하느냐'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이며, 이 답변은 곧 이어 나오는 도덕적 질문 즉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하는 문제와 인식론적인 질문인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연속적으로 답변을 가능하게 해준다.
쉐퍼에 따르면, 세계관과 관련하여 우리는 두 가지 답변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는 세계관에 대해 어떠한 논리적이며 합리적인 답변도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이 세계는 그저 혼돈되어 있을 뿐이고 모든 것은 우연의 산물이며 따라서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을 이론적으로 전개할 수는 있겠지만 이러한 생각에 따라 실제적인 삶을 영위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의 일상적인 삶뿐만이 아니라 모든 학문적인 삶 역시 세계의 질서를 전제로 하며 삶에 의미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관에 관한 또 하나의 답변은 그것에 대해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답변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우리는 세 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는데 첫째는 모든 것이 무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무가 절대무라면 우리는 그것에서 무엇인가가 생성되었다는 것을 전혀 납득할 수가 없다. 둘째는 현재 존재하는 모든 것이 비인격적 기원에서 유출되었다는 것이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해서, 모든 것이 질량, 에너지, 운동과 같은 비인격적인 것에 존재의 기원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비인격적 기원을 수용한다면 이 세계에는 역시 비인격적인 것만이 존재해야 할 것이라는 불합리한 결론을 받아들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모든 것이 인격적 기원을 갖는다는 것이다. 인격체로서의 인간의 실존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해결책은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가정하는 것뿐이다. 즉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는 인격적인 존재와 비인격적인 존재로 구성된 세계의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고 무한자인 하나님은 모든 존재를 유한자로 통일시킬 수 있는 통합점(integration point)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인격적인 존재를 가정할 때만 우리는 존재의 기원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며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전제조건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존재에 대한 무한한 인격적 기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이 세계에는 단순성과 복잡성에 이르는 정도의 문제 또는 규모의 문제만이 있을 뿐이고 거기에는 옳고 그름의 도덕적인 문제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이 세계에서 옳음과 그름의 최종적 의미 부여의 기준을 발견할 수가 없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윤리적인 문제를 혼란에 빠뜨리고 만다. 그러나 우리가 이론적으로는 도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지라도 실상 모든 사람들은 도덕적인 느낌과 긴장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음을 통하여 우리는 세계의 비인격적 기원을 수용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만일 도덕으로서의 도덕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할지라도, 도덕적 동기에 대한 느낌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심리학의 행동주의나, 결정론자는 없다. 이와 같이 완전한 우주적 소외로 이끌어 가는, 도덕적 동기에 대한 느낌을 가진 인간을 보게 되는 것은, 비인격적인 기원에서 시작할 경우 현상 그대로의 우주에는 도덕으로서의 도덕이 있을 곳이 없기 때문이다.

쉐퍼에 따르면, 인식론적인 문제 역시 인격적인 기원을 전제할 때 그 답을 발견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비인격적인 기원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자연체계의 제일성(uniformity)만을 주장할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러한 경우에 우리는 외계의 존재와 그러한 외계의 존재를 바라다보는 나의 존재 그리고 더 나아가서 이러한 존재에 대한 나의 지식이 환각이나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가 인격적 기원을 수용한다면 우리는 선한 하나님이 언어로 표현되고 명제적이며 사실적인 방식으로 인간과 의사소통을 하며 그가 의사소통하는 모든 영역에 있어 우리에게 참된 진리를 말할 것이라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언어 구사를 기초로 하는 의사소통자가 되도록 만드시고, 상호간에 명제적이며 사실적인 의사소통의 가능성을 주었다면, 그가 언어 구사 및 명제를 기초로 하여 우리들과 의사소통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해야 할 이유가 어디 있는가?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외부 세계나 내부 세계를 모두 알거나 혹은 그들을 전혀 모르는 것 중 하나를 택하지 말아야 한다. 나는 다른 사람을 완전히 알려고 기대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나는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아는 것이 서로 부합할 것을 기대할 수 있다. 왜냐하면 결국에 가서는 같은 분이 모두를 만드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화이트헤드나 오펜하이머가 말했듯이 현대 과학이 이성으로 우주의 질서를 발견할 수 있게 하는 이성적인 하나님이 존재하고 있다는 근거에서 생겨났다는 사실에 주목해야만 한다. 즉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선하심이 바로 우리의 세계에 대한 인식의 올바름을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선하신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수용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지식의 확실성에 이를 어떠한 길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우리의 지식이 불확실하다는 극단적인 회의론의 입장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우리는 물론 유한하기에 모든 것을 알 수는 없으나 많은 것을 알 수 있으며, 아는 것들 중 많은 것을 타인과 의사소통 할 수 있으며, 그것에 기초해 오늘날 고도의 문명을 건설해 놓았다. 

결국 쉐퍼는 존재하시며, 말씀하시는 무한하고 인격적이며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에 의해 존재와 도덕과 인식의 모든 문제가 해결의 실마리를 얻게 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쉐퍼의 변증학과 관련해 우리가 지적할 수 있는 쉐퍼 변증학의 특징은

1) 기독교의 신앙이란 한마디로 세계관이라고 볼 수 있으며,

2) 이 세계관은 우리의 실제적인 삶과의 일치 여부에 의해 그것의 정당성이 옹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는 것은 우리의 실재적인 삶이라고 주장하는 점에서 쉐퍼의 변증학은 결국 삶의 변증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우리는 쉐퍼가 기독교인의 삶이 최종적인 변증학(final apologetics)이라고 말했던 사실을 이해할 수 있다. 그가 존재, 가치, 인식에 관한 회의론을 일상적인 삶을 근거로 하여 반박하며 또한 그것을 토대로 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고자 하는 것을 보면 철학사적으로 볼 때 그는 분명 18세기 영국 스코틀랜드의 경험주의 철학자인 흄의 자연주의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흄의 자연주의는 우리의 신념들 중에는 이성적으로는 정당화 될 수 없지만 그것 없이는 일상적인 삶을 영위해 갈 수 없는 자연적인 신념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자연적 신념들로 흄은 외적인 세계의 존재, 자아의 존재, 인과율, 자연의 질서, 자연적 질서의 원인이 되는 지적 창조자로서의 신의 존재 등에 관한 신념을 들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바로 이러한 신념들이 이성적으로 정당화될 수 없지만 인생을 살아가는데 없어서는 안될 필수적인 신념임을 보여주는 흄의 논의가 이성적이며 합리적이라는 사실이다. 흄은 자연적 신념이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그것을 버리라고 주장(극단적 회의론)하거나 또는 무조건 받아들이라고 주장(세속적 상식론)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가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쉐퍼의 변증학 역시 이같은 자연주의로 이해될 수 있는 측면이 있다.
캘빈의 『기독교 강요』의 3장 "인간 정신 안에 본성적으로 심어진 신에 대한 인식"을 읽어보면 인간은 신에 대한 자연적인 인식능력을 지니고 있다.

인간의 정신 안에는 신에 대한 인식을 가능하게 하는 자연적인 본능이 있다. 이는 논란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무지를 핑계대지 못하게끔 신은 그의 주권에 대한 인식을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심어 놓았다. 따라서 기억을 살림으로써 그것을 더욱 새롭게 할 수 있으며, 그로 인해 사람들은 신이 존재하며 그가 창조자임을 인식하게 되고 또한 그를 경배하고 그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데 양심의 가책을 받는다. 신을 모른다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문명으로부터 가장 멀리 떨어진 가장 미개한 부족의 일원일 것이다. 그러나 이교도들이 말하는 것처럼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못할 만큼 무지한 민족도 어리석은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뿌리깊게 그리고 강력하게 자리잡고 있다. 따라서 태초부터 이 지구상에는 종교가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신에 관한 신념이 아로새겨져 있다는 암묵적인 고백이다. 솔직히 불신앙의 고집을 피우는 사람은 마음속으로는 신을 거부 할지 모르지만 신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은 신이 존재한다는 확신이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자연스럽게 내재하며 골수에 박힌 듯이 깊이 뿌리내려져 있다는 증거이다....이로부터 우리는 신에 대한 믿음이 학교에서 처음으로 배운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배운 것이며 자연은 우리로 하여금 이것을 잊지 못하게 한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여기서 캘빈이 말하는 신에 대한 믿음은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는 보편적인 자연적 신념에 해당된다. 그러나 캘빈은 인간이 자연의 아름다움이나 질서에 의해 촉발되는 신에 대한 자연적인 인식능력(sensu divinitatis)을 지니고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죄로 물들어 있어 성령과 성서의 도움을 받지 않는다면 세계의 창조자로서의 이신론적인 신에 대한 인식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서 이러한 신에 대한 인식은 온갖 종류의 다양한 유신론적 신념(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미신과 이단)의 근거가 될 뿐이라고 말한다.

경험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신은 모든 사람에게서 종교의 씨앗을 뿌려 놓았다.; 그러나 그것을 마음속에서 키워 시절을 좇아 열매를 맺게 하는 사람을 거의 찾아 볼 수 없다. 게다가 미신에 빠지거나 의도적으로 사악하게 되어 하나님을 버릴 만큼 하나님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멀어져 있다.

캘빈이 말하는 자연적 신념으로서의 신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이신론적인 신(deity)에 대한 믿음을 말한다. 캘빈은 여기서 성령과 성서의 개입을 주장한다. 캘빈에 따르면, 우리의 자연적인 신념인 이신론적인 신이 기독교의 신이라는 인식은 성령과 성서의 도움을 받을 때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쉐퍼의 변증학에는 이 두 단계가 교묘히 중첩되어 있다. 무신론이나 비인격적 근원을 논파하고 우리의 일상적인 삶과의 일치를 근거로 인격적 근원을 주장하는데 있어서는 철학적 자연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는데 반해 삼위일체적인 하나님을 논증하는데 있어서는 근본적으로 성경에 의존하는 신앙주의자의 면모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쉐퍼의 변증학을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여 불신자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하는 적극적 변증학(positive apologetics)이라고 보는데는 문제가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불신자의 경우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입증하는 쉐퍼의 변증학이 지닌 철학적 자연주의의 합리성과 설득력으로 인해 신의 존재를 믿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이 아니기에 하나님을 변증했다고 볼 수 없으며, 설사 쉐퍼의 변증학이 두 번째 단계로 성경의 도움을 받아 기독교의 사랑의 하나님을 논증했다고 할지라도 만약 그 불신자가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나님임을 이해하고 그것을 믿게 되었다면 거기에는 분명 성령의 역사가 개입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점에서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라는 바울의 고백처럼 참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가장 완벽한 변증론자는 하나님 자신뿐이며 우리는 그의 조력자에 불과 한 것이다. 바로 이것이 쉐퍼의 변증학이 지니고 있는 한계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적이 쉐퍼의 변증학이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쉐퍼의 변증학은 기존의 신앙인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공고히 하는데 이바지할 수 있으며, 신의 존재에 대한 신념이 불합리하다고 생각하기에 신앙을 갖기를 주저하는 불신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을 신앙으로 인도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신앙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놓여 있는 장애물을 제거하는데 도움이 되는 예비적인 복음전도(pre-evangelism)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물론 그의 변증학은 성경과 성서의 도움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신앙주의(fideism)의 틀을 벗어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은 종교적이거나 신학적 논의에 기초해 종교적 신념을 옹호하고자 하는 신학적 신앙주의(theological fideism) 뿐만이 아니라 철학적 논의에 기초해 종교적 신념을 옹호하는 철학적 신앙주의(philosophical fidesim)를 포용하고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쉐퍼의 변증학은 개신교의 문제점인 반지성주의의 틀을 깨고 신앙에 대한 지성적 논의의 장을 마련함으로서 종교나 인생의 문제와 관련하여 그것을 지적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현대인의 마음을 읽고 그들에게 다가갔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지니고 있다.

III. 맺는 말

불신자들의 세계관이 함축하는 비일관성을 들어내 보임으로써 불신자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한편 일상의 삶을 근거로 하여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를 논증하는 쉐퍼 변증학은 현존하는 철학적 사조에 대한 이해와 자신의 분명한 철학적 입장(철학적 자연주의)을 견지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쉐퍼의 변증학은 분명 철학적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쉐퍼가 이같은 철학적 성향을 보이는데는 "모든 문화적, 지적 혹은 철학적 내용(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일과 나누어져서는 안된다"는 그의 분명하고도 일관된 신념에서 비롯된 것이다. 쉐퍼에 따르면,

그리스도 인들은 철학이라는 말을 멸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복음적이며 정통적인 기독교의 약점이 되어 왔다. 우리들은 철학을 무시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겨 왔으며, 또 지성인들에 대한 멸시를 지나치게 자랑해 왔다. 우리의 신학교들은 철학과 신학을 연관시키는 일이 거의 없으며, 현대 철학과는 더욱 그러했다. 그러므로 신학생들은 기독교와 사회의 세계관을 연관시키는 법을 알지 못하고 신학교를 졸업했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신학교를 졸업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질문 자체를 알지 못하고 있다.

쉐퍼의 지적처럼 실상 오늘날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선에서 사역을 하는 목회자들이 대체로 반지성주의의 입장에서 신앙만을 강조해 왔음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제 목회자들은 뉴에이즘과 종교적 다원주의라는 다양한 세계관의 범람 가운데서 기독교의 정체성을 지켜내고, 과학이라는 합리성의 세례를 받은 이 땅의 젊은이들을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는 세상과 대화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대화란 일방적으로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대화를 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의 생각과 주장을 정확히 이해하려고 노력해야만 한다. 만약 상대방의 생각과 주장을 내가 먼저 이해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면 상대방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것이고 따라서 나는 나의 생각을 충분히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가 없다. 쉐퍼의 변증학은 바로 이같이 세상과 대화하려는 노력이며, 대화란 세상 사람들의 삶의 무대이며 그들의 세계관이 스며 있는 문화에 대한 이해에서 시작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쉐퍼는 자신의 변증학을 문화적 변증학(cultural apologetics)이라고 부른다. 


쉐퍼의 변증론이 지니는 무엇보다 큰 기독교 사상사적인 가치는 그것이 개신교 교계가 지니고 있는 반철학적 전통, 반지성주의적 전통이 지성주의의 문화 가운데서 살고 있는 불신자들과 대화하려는 자세를 결여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는데 있다. 바로 우리가 이러한 반지성주의의 전통을 버리고 대화하려는 전향적인 자세를 가질 때 이 땅의 복음화는 한결 더 빨라질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쉐퍼의 말처럼 "지금 (우리는) 문화적 변증학을 몸에 익힌 인재를 교회, 신학교, 선교지로 보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