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즈가 만난 인물 브레이너드
29세의 너무도 짧은 일기로 한 생을 마감해야했던 데이비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 1718-1747)는 에드워즈를 통해서 세상에 알려진 인물이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브레이너드는 일반 교회사에서는 단지 미국 식민지 시대의 한 인디언 선교사로서 기억되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굳이 그를 말하려고 하는 이유는 에드워즈가 편집을 하고 서문을 써서 출판해낸 그의 일기 『데이비드 브레이너드 생애와 일기』의 지속적이고 경건한 영향력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 저서는 한국어로도 번역되어 1984년 출판되어 신학생들의 경건훈련를 위한 중요한 필독서 중의 하나로 애독되어지고 있다.
딸의 약혼자였던 브레이너드를 가장 가까이에서 보았던 에드워즈의 평가는 자신의 가장 큰 관심이기도 했던 주제 곧, 냉철한 지성과 아울러 바른 신앙적 정서를 균형있게 조화시킨 인물이었다. 에드워즈는 브레이너드를 이 책의 서문에서 이 점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그는 통찰력을 지닌 인재였고, 명쾌한 사고력과 정확한 판단을 할줄 아는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 그는 바르고 경건한 신앙과 광신을 철두철미하게 분별했다. 어떤 사람이 감동을 받았다고 할 때 그것이 사리에 맞고 분명한 데 기초를 두고 이루어진 것인가, 성경적이고 합리적인가, 아니면 원기가 왕성한 나머지 해괴망측한 상상을 한 결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하는 문제에서 인간의 감정을 예리하게 파헤쳤다." 이러한 에드워즈의 브레이너드를 향한 넉넉한 평가는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자신의 저서 『신앙과 정서』가 거의 같은 시기인 1746년에 세상에 나온 것을 감안할 때 이 점에서 에드워즈가 어떠한 영향을 주고 받았는지를 주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에드워즈는 너무도 빨리 시들어버린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바라다보며 그의 결함아닌 "결함"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가 브레이너드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그의 결함을 찾아본다면, 그가 고생하는 면에서 너무 지나쳤다는 점이다. 그는 감당할 수 없는 수고를 한 것에 비하여 마땅히 돌보아야 했을 건강을 돌아보지 않았다. 사실 하나님의 부르심이 얼마나 촉급한지를 알고 있는 그에게 있어서 그의 건강에 과도한 관심을 기울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선교사역과 그가 처한 형편은 너무도 고생스럽고 피곤했지만, 피할래야 피할 수가 없었다."
당시 참으로 고생스러웠던 선교사들의 삶이 생생하게 부각되는 실감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브레이너드는 1718년 4월 20일 커넥티커트의 헤이담(Haddam/Connecticut)에서 5남 4녀중 3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나이 9살 때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목사의 딸이었던 어머니도 14살 때 세상을 떠나셨다. 그는 예일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였다. 어릴적 양친을 잃은 데이비드는 온순했지만, 우울해지는 경향이 있었는 데, 이러한 그의 모습은 성인이 되어서도 에드워즈의 눈에도 확인되고 있다: "그의 풍부한 감정은 우울증의 덕택이라고 생각한다 ... 그는 때로 우울(melancholy)과 경건한 슬픔(godly sorrow)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에 대해 대화를 하곤했다." 물론 우울증은 일기 가운데서도 보여지는 그의 특징적 내면성임을 우리는 또한 확인하게 된다. 우리는 진정한 성도라면 영적 우울증이 이 어두운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조금은 이해할 것이리라!
영국을 영적으로 새롭게 한 존 웨슬리는 모든 설교자들이 브레이너드의 일기를 읽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무엇보다도 브레이너드의 일기는 참되고 진정한 헌신과 바른 기도의 삶이 무엇인지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브레이너드를 향하여 "기도로 숨쉬었고, 기도로 움직였고, 기도로 선교하다가 기도가운데 숨을 거둔 사람"(김명혁)이라고 평가함은 적절하다 하겠다. (97.7.29.Seoul)
대각성 운동의 동역자 죠지 휫필드
미국의 뉴잉글랜드 지방에서 일어난 교회를 새롭게 하는 영적 『대각성 운동』은 에드워즈를 중심으로 2회에 걸쳐 계속되었는 데, 1차 대각성 운동은 1734-1735년에, 2차 대각성 운동은 1740-1741년에 일어났다. 나중에 일어난 2차 운동은 영국 출신으로서 웨슬리의 동역자이기도 한 당시 26세의 젊은 부흥사 죠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의 "천둥번개와 같은" 열정적 설교와 더불어 성령의 강력한 역사(役事)가 잠자는 교회를 깨워 뒤흔들며 새롭게하는 신앙부흥운동(Revivalism)이었다. 이러한 모습을 역사가 페리 밀러(Perry Miller)는 "에드워즈는 이미 도화선에 불을 붙이고 휫필드는 폭발시켰다"라고 적절히 묘사하였다. 에드워즈가 시무하던 노쓰햄톤의 영적 상황을 보며 휫필드는 도착날 쓴 자신의 일기에 감동적인 내용을 기록하였다(1740년 10월 17일):
"빛이 비치자 곧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년 전에 일어났던 하들리에까지 퍼져 나갔다. 최근 하나님의 백성들이 첫사랑을 상실해 가며 무감각한 상태에 있음을 한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그들의 영혼을 위해 앞서 미리 사역하신 점들을 들려주었을 때, 마른 장작에 불을 붙이는 것 같았다." 또한 계속되는 일기에서 우리는 노쓰햄톤 교회의 목회자 에드워즈 목사의 당시의 모습을 가정과 함께 그리는 대목도 만나게 된다: "그 곳의 목사는 바로 요나단 에드워즈이다. 그는 충실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현재 건강이 별로 좋지 못하다."
계속되는 휫필드의 일기를 보면, 휫필드와 에드워즈의 신앙적 교제를 우리는 피부로 느끼게 되고 에드워즈의 풍부한 감정도 만나게 된다: "에드워즈의 요청에 의해 그의 어린 자녀들에게 말씀을 전했을 때에 그들은 크게 감동을 받았다"(10월 18일). "오늘 아침에 설교하니 훌륭한 에드워즈는 예배 시간 내내 흐느꼈다. 다른 성도들도 감동을 받았으며, 오후에는 능력이 더 강하게 역사했다"(10월 19일, 주일). 우리는 이 일기 가운데서 휫필드의 에드워즈를 향한 각별함을 또한 보는 데, 다름아닌 에드워즈의 이름 앞에 붙이는 격조높은 존경의 표시인 형용사들인 "신실하고 훌륭한 그리스도인", "훌륭한 에드워즈"등을 주목할 때이다.
두 사람의 친분은 이미 1년전 1739년 11월에 뉴욕에 와 있던 휫필드의 편지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 편지에서 휫필드는 에드워즈의 『제1차 대각성운동』의 소식을 뉴욕의 상인 노블(Th. Noble)에게서 듣고 언급하며, 자신의 유럽에서의 활약도 소개하기를 잊지 않았다.
어떤 의미에서 휫필드는 에드워즈 목사와의 북미에서의 동역(同役)을 이 편지를 통하여 제의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께 향한 목사님과 노블씨의 신실한 사랑의 소식이 저로 하여금 이 편지를 당신께 드리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많은 영혼들을 위해 노쓰햄톤에서 행하신 위대한 일들을 인하여 기뻐합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면 저도 몇 달 만이라도 가서 그 일들을 보고 싶습니다. 신문을 편지와 함께 보냅니다. 당신은 유럽에서 하나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추수할 때입니다"(11월 16일). 이 편지가 제대로 에드워즈의 손에 전달되었는지는 확인되지 않지만, 에드워즈도 거의 같은 기대를 가지고 같은 해 영국의 휫필드에게 첫 편지를 보냈다: "목사님께서 계획하시고 있는 내년 여름 뉴잉글랜드 지방의 여행 중에 노쓰햄톤을 방문해 주시면 좋겠다는 것이 저의 요청입니다. 제가 이곳에서 당신을 만나보고 말씀을 들으려는 바램이 단순한 호기심이 아님을 알아 주십시오"(12월 12일). 1740년 이 두 사람의 역사적 만남은 교회사에 펼쳐질 『제2차 대각성 운동』을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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