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바울을 닮은 사람
21세기를 바라보는 한국 교회 목회자들의 사표가 될 만한 교회사의 인물은 없을까? 순간 우리는 바울의 음성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11:1)를 떠올리게 된다. 역사적 인물을 우리가 따라가야할 구체적 표상으로 삼는 일은 참으로 귀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무엇보다도 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 힘이 있어지기때문이다. 여기에서 필자는 감히 미국 대각성운동의 기수였던 18세기의 에드워즈를 소개하고 싶다.
칼빈(John Calvin,1509-64)처럼 55세의 생애를 산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58)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 칼빈주의자, 가슴의 신앙을 가르치는 사람, 열정과 능력의 복음 설교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J.I.Packer)이며, 또한 교회사에 있어서 가장 많은 점에서 사도 바울을 닮은 사람으로도 그려지고 있다(D.M.Lloyd-Jones). 아무튼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드물게 몇 안 되는 인물중 한 사람이며,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탁월한 지성이며, 보물과 같은 미국의 철학자로서 평가되기도 하는 에드워즈는 1703년 10월 5일 코네티컷(Connecticut) 주에 위치한 윈저(Windsor)에서 목사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디모데 에드워즈(Timothy Edwards)는 그 곳에서 약 60년 동안 목회를 하신 목사로서 독자 요나단이 1758년 3월 세상을 뜨기 직전 다행스럽게도 앞서서 1758년 1월에 89세의 나이로 소천하였다. 아버지의 신앙은 매우 경건하였으며, 실천적이었다. 어머니 에스더(Esther Stoddard)는 노쓰앰톤(Northampton)에서 죽기까지 목회를 하셨던 목사(Solomon Stoddard)의 딸로서 매우 영적인 분이었다. 이러한 가정의 영적이며, 지적 분위기 가운데서 요나단은 성장하였다. 요나단은 벌써 어린 7-8세의 나이에 친구들과 함께 기도모임과 경건모임을 가진 것으로 훗날 회상하기도 하였다. 요나단은 벌써 1716년 13살의 나이에 예일대학교(Yale University)에 들어가서 존 로크(J.Locke)와 뉴톤(Newton)의 사상을 알게 되었고, 1720년 17세 때 졸업하였다. 그 후 뉴 헤븐(New Haven)에서 2년간 더 신학을 공부한 후 1723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잠시 임시목사로 뉴욕에서 교회를 섬긴 그는 1724년 21살의 나이로 예일대학교의 강사로서 2년 동안 후진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에드워즈는 1727년 외할아버지가 목회하는 노쓰앰톤 교회의 부목사가 되어 교회를 섬기던 중 1729년 외조부의 사망과 함께 26세에 담임목사가 되어 1750년 까지 23년 동안 이루었던 목회를 쫓겨가듯 마감하여야만 하였다. 이유는 에드워즈가 세례 때에 세례 받는 자들의 공개적 신앙고백을 지금까지의 교회의 전통과는 다르게 강조한 점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이를 발단으로 교회는 목사 신임투표를 하게 되었는데, 에드워즈는 230:23으로 불신임을 받게되어 교회를 떠나게 되었다. 이러한 뜻밖의 결과를 바라보는 20세기 영국 교회의 그 유명한 로이드 존스 목사는 "이러한 일을 바라보며 목회에 있어서 그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놀랄 일이 아니다"라는 말을 동역자들에게 하며 용기를 주었다.
사실 에드워즈는 이 교회의 목회자로서 세계 교회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 '대각성운동'(The Great Awakening Movement)을 그 유명한 부흥설교자인 영국의 죠지 위필드(George Whitefield, 1714-1770)와 함께 이끌었던 것이다. 이 때에 행해진 그의 유명한 설교 "성난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죄인들"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이들의 마음에 감동을 주고 있기도 하다. 이 교회에서 행한 그의 마지막 설교(Farewell Sermon)는 1750년 7월 1일 고후1:14의 말씀 "너희가 대강 우리를 아는 것 같이 우리 주 예수의 날에 너희가 우리의 자랑이 되고 우리가 너희의 자랑이 되는 것이라"을 본문으로 선포됐다. 결코 변명하거나, 그 누구를 탓하지도 원망하지도 않았던 담대하고 떳떳한 에드워즈의 겸손과 사랑넘치는 인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 마지막 설교는 매우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훗날 역사는 그의 고별설교를 명설교로 평가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에드워즈 목사는 끝까지 틀림없는 설교를 성실히 하나님 앞에서 감당한 것이라 하겠다!
프린스턴 대학교의 총장
바람직한 목회란 목회의 처음과 끝이 일치하거나 아니 더 좋은 결과가 있어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더 좋은 결과란 무엇보다도 성도와 목회자 사이에 맺어진 신실한 그리스도적 인격적 관계를 확인하는 말이다. 진정한 목회자 에드워즈의 마지막 「고별 설교」를 접하게 될 때도 이러한 진한 감동을 더욱 가슴 뭉클하게 실감하게 된다. 노쓰햄톤 교회에서 그는 마지막 설교(Farewell Sermon)를 1750년 7월 1일 고린도후서 1장 14절을 본문으로 선포했다. 이 설교에서 그는 결코 변명하거나, 그 누구를 탓하지도 그리고 원망하지도 않았다. 에드워즈의 겸손과 사랑넘치는 인격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그러면서도 엄숙한 분위기를 보여주는 그 마지막 설교의 한 부분을 소개하면 더욱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제가 이 교회와 여러 성도들의 목회자로서 주의 사역에 몸담은지도 벌써 23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 본인은 여러분들의 영원한 축복을 위하여 사역에 최선을 다했고 제 인생의 가장 귀한 황금의 기간을 여기에 투자했습니다. 제가 최선을 다한 일에 여러분은 저의 증인이 되십니다. ... 저는 목회 사역을 위해서 제 자신을 바친 것입니다. 이를 위해 밤과 낮으로 일했으며, 이른 아침 일찍 일어났고, 그리스도께서 부족한 저를 부르시고 지명하신 거대한 사업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 하나님께서 참으로 신실한 주의 종을 여러분들을 위해 보내주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바로 알며, 철저하게 죄를 경고하며, 신앙을 고백하는 성도들을 지혜롭고 사려 깊게 주시하여 영원한 축복의 길로 여러분들을 인도하기를 바랍니다. ...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는 기억하십시다. 주의 그 거대한 날에 이루어질 미래의 그 거룩한 우리의 만남을 결코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 날은 공의로운 심판이 이루어지는 날이며, 영원하고 불변의 심판이 행해지는 날입니다. 아멘."
이제 에드워즈는 정들었던 교회를 떠나야만 했다. 사실 다른 대책이 없이 많은 식구들과 함께 그 어디엔가로 가야만 했다. 이러한 소식을 들은 저 멀리 스코틀랜드의 친구들은 대서양을 건너와서 함께 동역을 해줄 것을 원했다. 그러나 낯선 땅에서의 사역은 그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를 사양한 그는 1750년 12월 초 노쓰햄톤에서 약 60Km 정도 떨어져 있는 스탁브리지(Stockbridge)의 인디언들을 위한 작은 한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았다. 1751년 8월 초 비로소 모든 가족이 노쓰햄톤을 떠나 이 곳 스탁브리지에 도착했다. 이러한 상황을 주시하며 턴벌(Ralph G. Turnbull)은 "모든 교회가 그들 최고의 지성을 잔인하게 광야로 추방했고, 그 우울한 날들은 개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라고 썼다.
스탁브리지의 교회는 에드워즈에게 최소한의 일을 맡겼고, 보다 많은 시간을 이제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그리고 연구와 저술활동에 몰두할 수 있게 되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상황가운데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스탁브리지에서 인디안 선교와 저술활동에 정열을 쏟고 있던 에드워즈는 1757년 뜻밖에도 지금의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으로 부름을 받아 1758년 1월 취임을 하였다. 물론 그는 처음 총장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 자신의 여러 가지의 부족을 내세워 영광스러운 초빙을 겸허히 거절하였다: "저는 매우 의심스러운 것이, 이러한 일을 떠맡게 되든 그렇지 못하든 간에, 저를 지목하셨다는 게 분수에 지나친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에드워즈는 계속해서 연구와 저술에 박차를 가하고 싶었다. 이제 에드워즈는 영광스러운 프린스턴대학교의 총장에 취임하었다. 그의 취임설교는 그리스도의 불변성에 관하여 2시간 동안 행해졌으나 그 어느 누구도 지루해하지 않았으며 대단한 집중력으로 경청하였다. 하나님의 임재를 만끽하면서 에드워즈는 자신의 마지막 시간들을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런데 천연두 예방접종의 부작용으로 1758년 3월 22일 55세의 아직 한참 일할 성숙한 나이로 3개월간의 총장재직을 뒤로하고 아깝게도 일생을 마감해야만 하였다. 에드워즈에게 인생의 황혼이 너무 빨리 찾아온 뜻을 우리는 아직 이해할 수 없으나, 여기에 분명 하나님의 뜻은 있었을 것이다(97.7.1.Seo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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