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시각교정이 덜 된 신자들(막8:22-25)

새벽지기1 2016. 2. 3. 21:23

“벳새다에 이르매 사람들이 소경 하나를 데리고 예수께 나아와 손대시기를 구하거늘 예수께서 소경의 손을 붙드시고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사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무엇이 보이느냐 물으시니 우러러 보며 가로되 사람들이 보이나이다 나무 같은 것들의 걸어가는 것을 보이나이다 하거늘 이에 그 눈에 다시 안수하시매 저가 주목하여 보더니 나아서 만물을 밝히 보는지라.”(막8:22-25)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던 버질이란 사람이 아마 그 정도가 약했던지 수술로 시력을 회복했습니다. 그러나 처음에는 “물체의 움직임이나 색깔은 분별할 수 있었지만 영상을 전체적으로 종합해 판단할 수는 없었습니다”라고 실토했습니다. 그러다 오랜 기간의 훈련을 거쳐서 정상 시력으로 회복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한 맹인을 치유해 주시는 장면에서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사람 같은 물체가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알 정도였습니다. 사람을 나무 같은 것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눈앞에 나무들만 있는데 가만히 서 있는 나무와 움직이는 나무로만 겨우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다시 안수하자 상황을 전체적으로 종합해 판단할 수 있어서 만물을 밝히 보게 되었습니다.


모든 신자는 사실 예수 믿기 전에는 나면서 모두가 소경이었습니다. 만물을 보기는 분명히 보되 그 보는 것이 실체와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물리학적으로 시각이 형성되는 바탕인 빛의 움직임과 그 작용에 대해서 무지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이 봉사처럼 서 있는 나무와 걸어가는 나무인 인간을 구별하지 못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 세상을 정말로 단순히 물리학적으로 그 표상만 보았지 전체적으로 종합해 판단하지 못했습니다.


우주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운행을 섭리하시며 특별히 인간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신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습니다. 세상과 인간을 주관하시는 이가 따로 있는데도 그분의 운행원리는 아예 생각지도 않고 돌아가는 현상만 보고 판단한 것입니다.


예컨대 자동차 엔진의 어떤 부분에서 갑자기 뜨거운 김이 새어 나왔습니다. 그런데도 자동차가 작동되는 원리인 매뉴얼을 보고 그 원인과 해결책이 무엇인지는 알아볼 생각은 전혀 않고 무조건 테이프로 김이 새는 곳만 막으려 드는 것과 같습니다. 엔진이 폭발 안 하는 것만도 다행입니다. 독감에 걸려 열이 펄펄 나는 데도 일단 열만 내리려고 옷을 다 벗고 바깥 찬 공기를 마시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지 않습니까?


예수를 알기 전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 전부이자 실체로 믿고 살았던 모습이 그랬습니다. 생물학적 소경은 아니었지만 영적인 소경이었습니다. 아무리 자기 딴에는 똑똑하게 살았다고 자부해도 사실은 항상 허공을 치는 듯하고 향방 없는 달음질이었습니다. 생수의 근원되는 하나님을 버리고 스스로 웅덩이를 팠으니 물이 저축되지 않는 터진 웅덩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생을 위에 든 두 가지 예처럼 살아가는데 올바로 될 리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처음 예수를 믿어 하나님을 알게 된 신자의 경우도 바로 이 소경과 같습니다. 영적인 세계에 대해 분명히 눈은 떠졌습니다. 그러나 아직은 어렴풋하게 보입니다. 움직이는 것과 색깔은 보이는데 전체 상황을 종합해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말하자면 보이는 것이 실체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고 어떤 신비한 힘이 나라는 존재를 붙들고 있다는 것은 압니다. 또 그 힘이 명확하게는 알 수 없는 어떤 방향으로 내 인생을 이끌고 있다는 것만은 압니다.


그러나 아직은 자기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분간이 서지 않습니다. 단지 나를 이끌고 있는 그분에게 거역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는 압니다. 또 그분이 어떤 특정한 방향으로 나를 이끌고 있다는 것은 알겠는데 정확하게는 몰라 단지 그분의 손만 붙들고 있습니다. 여전히 안개가 낀 숲속을 걸어가는지라 단지 그분의 손을 혹시라도 놓칠까만 걱정입니다. 내 쪽에서 적극적으로 능동적으로 그 방향대로 할 일을 찾아서 나갈 정도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때는 예수 믿고 나니까 더 힘들 때가 많은 것 같이 생각됩니다. 이전에는 별로 고민할 것이 없었습니다. 보이는 대로만 단순하게 판단하면 되었습니다. 내가 가는 방향도 오직 돈을 모아서 사람들 앞에 자기를 세우는 것뿐이었습니다. 모든 것을 그 방향에 맞추어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가장 돈을 많이 버는지 그 효율성(productivity)만 따져 보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고 나니 이 수지타산이 틀릴 때가 더 많으니까 심지어 믿은 것이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신앙이란 예수를 믿어 모든 죄에서 사함을 얻어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에서 면제된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그렇다면 죽기 직전에 회심만 하면 됩니다. 구태여 미리 믿어서 수지타산에 손해 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영적으로 눈이 떠이고 난 후에도 전체를 종합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시각 교정 훈련이 필요합니다. 그것도 평생에 걸쳐서 말입니다. 자기가 받은 구원의 의미가 과연 무엇인지, 구원 이후에 앞으로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 방향을 확실하게 잡아야 합니다. 그분의 손에 잡히어 끌려가기만 해선 괴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여전히 봉사가 지팡이나 개에 의지해야만 살 수 있는 삶과 동일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그 시각교정 훈련을 대부분의 신자들이 너무나 지식적 교리적 차원에서만 하고 있습니다. 말씀, 기도, 전도, 선교, 큐티, 등 신앙의 여러 측면에 대해 어떻게 하든 많은 내용을 습득하려고만 합니다. 갓 수술해서 시력이 어느 정도밖에 회복 못한 환자가 주위의 모든 사물을 어떻게 하든 많이 보려 노력한다고 해서 정확히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문의 봉사는 어떻게 했습니까? “주목(注目)”해서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서 있는 나무와 움직이는 나무 둘 뿐이었는데 움직이는 것은 나무일리 없으니까 그 나무만 주목해 보았더니 걸어가는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인 시각을 교정하려면 가짜는 진짜 같이 보이고 진짜는 가짜 같이 보일 때에 정말 정신을 똑 바로 차려서 골라내는 훈련을 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수지 타산이 헷갈릴 때에 어느 쪽이 바른 계산인가 헤아릴 줄 알아야 합니다. 효율성이 훨씬 높아 보일 때에 조심하라는 것입니다. 신자라고 무조건 손해 보아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뭔가 손쉽게 한 건할 수 있을 것 같을 때에, 교회 일에서도 마찬가지로, 과연 그 일에 주님이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하실 것인가, 나아가 진정으로 기뻐하실지 곰곰이 따져 보아야 합니다.


또 그러기 위해선 세상에 나가서 열심히 살며 많은 사람들과 부닥쳐 보아야 합니다. 교회에서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고 있으면 가짜가 옆에 없어 실제적인 훈련 효과가 나지 않습니다. 자동차 엔진을 한 번도 분해 조립해 보지 않고 매뉴얼만 열심히 외우는 것에 불과합니다. 물론 매뉴얼에 관해 많이 알면 알수록 좋고 또 많이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그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영적 훈련은 온갖 사이비 중에 진짜로 진짜인 하나만 골라내는 능력을 키우는 것입니다. 따라서 영적 시력이 좋아진 증거를 찾으려면 가장 사이비가 많을 때입니다. 믿음이란 효율성에 차이가 많이 나서 자꾸 옛날 방식으로 따라가고 싶을 때에 참아 내고 또 진짜 방식을 골라 따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기 이름을 세상에 내세우려 하지 않을 때에만 능률이 뒷전이 됩니다. 또 능률이 뒷전이 될 때만 진짜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을 찾아 따르는 고집과 성실성이 생깁니다. 능률보다 방향을 바로 잡는 것이 신앙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사실은 예수를 믿고 난 이후 모든 신자가 걸어가야 할 인생길은 이미 확고하고도 분명하게 정해져 있습니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골고다 언덕을 그분과 똑 같은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고 가는 길입니다.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분의 사랑을 증거하는 모습으로 살면 됩니다. 예수님께만 주목하면 만물을 종합해서 판단하고 밝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시력이 회복되지 않은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는 이왕 예수님을 증거 하되 골고다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이 없는지 찾아보려 하기 때문입니다. 아니 예수님이 간 길이 가장 효율적인 길이 아니고 또 다른 무슨 길이 있다는 말입니까? 바로 이 부분에서부터 깨이는 것이 영적시각교정훈련의 첫 걸음이자 전부입니다.     


시력회복 수술을 받은 예의 버질이 한참 후에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고 어중간하게 보일 때가 오히려 안 보일 때보다 더 두려웠습니다.” 두 개의 상이 겹쳐 보이는 모습만 보면서 인생을 살 수 없습니다. 바로 신자가 되어서도 시각 교정을 받지 못한 우리 자신들의 모습 아닙니까? 믿었는데도 뭔지 모르게 불안한 우리의 삶이 아닙니까?


그것을 고치고 신앙으로 승리하는 길은 오직 하나뿐입니다.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우리의 역할 모델(Role Model)로 삼아 주목하는 것입니다. 돈에 주목하여 사는 것이 불신자라면  골고다 십자가만 주목하는 자가 신자입니다. 지금 당신은 무엇을 주목하며 살고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