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박진호컬럼

[스크랩] 자주하는 질문 - 1. 십일조의 참뜻은 무엇인가?

새벽지기1 2016. 1. 23. 08:11
 

자주하는 질문

 

 

1. 십일조의 참뜻은 무엇인가?


 

성경에 관하여 궁금한 것이 많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막상 성경 어디에 그러한 질문에 관한 답이 있는지 잘 알 수가 없다보니 의문을 뒤로 한 채 "그저 믿씁니다." 라고 하며 "습" 자를 "씁" 자로 발음을 해가며 남들이 내는 대로 따라 가게 된다.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에도 의문은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떠나지 않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 중 십일조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보기로 하자. 가장 큰 문제는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십일조에 관하여 어떻게, 왜 말씀하셨는지? 를 알기도 전에 먼저 행해보려고 하는데 있는 것이다.


물론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믿는다는 것은 따지는 것이 아니다." 라고 한다. 그리고 "무조건 믿습니다." 라고 해야 믿어진다고들 말한다.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그의 뜻에 따르고 순종도 할 것이 아닌가? 그의 뜻을 모르니 한동안 잘 하다가도 문득 "이것이 정말 옳은 것인가?" "십일조를 낼 때가 되면 왜 그리 돈을 써야 할 일이 많이 생기는지......" "정말 하나님께서 내가 내는 이 십일조를 받으실까?" 아니면 "혹시 목사나 다른 사람들이 다 쓰는 것은 아닌가?" 하며 의문에 의문이 꼬리를 물게 된다.


초신자일 때에는 왜 십일조를 내야하나? 마치 세금처럼......내가 낸 십일조를 누가, 무엇에 쓰고 있나? 십일조를 내면 정말 부자가 될까? 등등 의문이 많다. 그러다가 집사나 장로가 되면 체면 때문에라도 믿음이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하기에 속으로는 "세금을 제하고 난 나머지의 십일조인가? 아니면 세금 제하기 전의 십일조인가?" 하며 이리저리 생각을 하면서도 열심히 내게 된다.


그러다가 시간이 더 가면 마치 많이 내기 경주에 참가한 선수들처럼 더 많이, 많이 하려고 애를 쓴다. 그러다 보면 사회에서 지명도가 높은 사람은 교회에 와서도 자연히 존경을 받는 위치(?)에 앉게 되고 사회에서 낮은 사람은 왠지 주눅이 들어 교회에 와서도 모르는 사이에 그저 평신도나 잘해야 집사정도로 위안을 받고 다닌다.


속으로는 "사회나 교회나 다를 것이 없구나..." 하면서, 설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십일조 많이 내기 경쟁을 하는 이는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제 그만 혼미하자. 그리고 성경으로 돌아가자. 여러분의 의문들을 성경에서 그 해답을 찾아보자. 먼저 제일 문제가 되는 십일조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는지 상고해보기로 하자. 그리고 난 후 십일조를 내되 하나님의 뜻을 알고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 믿어지는 마음으로 하게 된다면 얼마나 하나님 앞에 아름답겠는가? 앞으로 십일조 뿐 만 아니라 그 외의 많은 것들에 관하여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하는지를 상고해 보기로 한다. (본 Blog를 통하여 게시하게 될 것이다)

 

 

 

1. 십일조의 참뜻은 무엇인가? 

 2. 방언을 말하는 것은 정말 구원받은 것일까? 

 3. 거창한 교회당 건축은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4. 가까운 장래에 일어날 엄청난 사건들 

 4. 예수그리스도께서 정말 다시 오실까? 

 6. 언제 예수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까? 

 7. 그리스도의 재림과 세상 끝날 

 8. 구원받은 것이 의심나는 이유는? 

 9. 예정론은 하나님의 뜻인가? 

 10. 무조건 선택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 

 11. 요한이 예수님께 침례를 줄때 이 세상 모든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었을까? 

 12.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소속은 어디인지? 

 13. 어떻게 하여야 죄를 씻을 수 있을까? 

 14. 누가 믿음이 큰 자일까? 

 15. 성경이 정말 3500년 전부터 기록되기 시작했을까? 

 16. Corea 아니면 Korea? 

 17. 죽음이란 무엇인가? 

 18. 오늘날 예루살렘의 속죄 절 풍경 

 19. 크리스마스가 예수님의 탄생일 일까? 

 20. 바로왕은 유기되기로 예정된 사람인가? 

 21. 불세례 

 22. 인간의 수명 

 23. 응답받는 기도 

 24. 가인은 아내를 어떻게 구했을까? 

 25. 다빈치코드 

 26. 예수님과 함께 걸어가면서 

 

 

 

1. 십일조의 참뜻은 무엇인가?

 

 

 

1) 십일조의 참뜻은 무엇인가? 

2) 율법과 십일조 

3) 십일조 권유와 강요 

4) 십일조와 부자가 되는것 

5) 십일조와 신앙생활 

6) 십일조와 목사봉급 

7) 결론 

 

 

 

1) 십일조의 참뜻은 무엇인가?

 

야곱과 십일조


창세기 28장을 보면, 야곱은 에서를 피하여 어머니 리브가의 고향인 밧단아람 ('field of Aram (아람의 들)'이라는 뜻으로 시리아에 있다.)으로 가는 도중, 광야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사다리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는 꿈을 꾸었다.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누운 땅을 그와 그의 자손에게 주고, 모든 족속이 그의 씨로 인하여 복을 받고, 그를 지키시며, 그에게 말씀하신 것을 다 이루시기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을 들었다. 이 말씀을 듣고 야곱은 다음과 같이 하나님께 서원하였다.

 

창세기 28:20-22 “야곱이 서원하여 가로되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 하였더라

 

 

 

지금 야곱은 앞으로 무슨 일을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험난하고 막막한 생애의 첫 여정에 나섰다. 

 

말씀을 통해서 보면, 야곱은 마음속에 길에서 생길지도 모를 일에 대한 두려움과 장래에 대한 불안함을 갖고, 잠을 청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런 야곱의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꿈을 통하여 '함께하여 주신다.'는 약속을 해주셨고,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야곱은 하나님께 '만일 (여기서 만일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함께하여 주시고 계시지만, 아직은 하나님께서 그 생애에 늘 함께하심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고, 지켜주시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시며, 무사히 이곳으로 돌아오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며, 하나님께서 주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습니다.'라고 서원하였다.


여기서 야곱이 하나님께 고하는 것을 들어보면, 십일조의 의미가 무엇인지 독자들도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현재 야곱은 가진 것이 없으나,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것을 채워주실 때에 그 채워주신 것의 십분의 일을 드리겠다고 한 것이다.


창세기 31장을 보면,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에게 '내가 이십 년간 외삼촌의 집에서 일을 하였으나 열 번이나 더 품삯을 변경하였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여 주지 아니하였다면 이 이십 년간 밤낮과 추위와 더위를 가리지 않고 일을 한 나를 빈손으로 보냈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내용이 있다. 비록 야곱은 사람을 위하여 수고를 넘치게 하였지만 사람은, 비록 자신의 외삼촌일지라도, 자신에게 품삯 주기를 싫어하여 여러 차례나 계약한 것을 어기며 거저 부려먹기만을 원했다는 것을, 이 이십 년간의 사람 섬기는 일들을 통해서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라반이 야곱에게 행한 모든 일을 알고 계시므로 라반이 야곱에게 '양떼 중 얼룩얼룩한 것이 품삯이 되리라' 하면 얼룩얼룩한 것을 많이 낳도록 하셨고, '아롱아롱한 것이 네 품삯이 되리라' 하면 아롱아롱한 것을 낳게 하셨다. 그래서 야곱은 라반에게서 받지 못한 품삯을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하게 받을 수 있었다.


유전 법칙에 의하면, 이런 얼룩얼룩하고 아롱진 것은 열성이기 때문에 열성들은 우성들보다 많이 태어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오랫동안 양을 길렀던 라반은 자기의 계교가 이루어져 야곱에게 품삯을 거의 주지 않고 부려먹을 수 있었을 것으로 생각을 했고, 그래서 이러한 계약을 야곱과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오랜 경험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유전 법칙을 뛰어넘으시는 놀라운 이적을 통해 라반의 계교를 물리치시고, 오히려 야곱과 함께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나는 벧엘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에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네가 거기서 나에게 서원을 하였으니 지금 일어나 이 땅을 떠나서 네 친족의 땅으로 돌아가라'라고 하셨다.


지팡이를 의지해서 아람으로 떠났던 야곱은 이제 하나님께서 은혜로 채워주신 자신의 풍성한 부에서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릴 수가 있게 되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해서, 십일조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드리는 감사와, 하나님께서 함께하셨음을 증명하는 표시로 드렸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아브라함과 십일조


창세기 14장을 보면, 아브라함이 엘람 왕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쳐부수고 돌아오는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이 아브라함에게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와 축복하며, 하나님께서 원수들을 쳐부수게 하신 것을 알려주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모든 것의 십일조를 멜기세덱에게 드렸다. 성경은 이때 처음으로 십일조에 관해서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14: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 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이 내용은 엘람 왕을 섬겼던 소돔과 고모라 왕이 십이 년간 엘람 왕을 섬기다가 배반하여, 엘람 왕과 연합한 왕들이 소돔과 고모라를 치러 온 것이다. 그때 그들이 소돔에 살고 있던 롯과 그곳에 있는 재물들도 함께 빼앗아 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은 훈련받은 종 318명과 그와 동맹한 마므레와 함께 엘람 왕의 연합군을 쳐부수고, 사로잡힌 자들과 자기 조카 롯과 그의 가족을 구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때 살렘 왕 멜기세덱이 그에게 와서 축복을 한 것이다.


이때 멜기세덱이 전하는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이 승리가 그의 능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시며 왕들을 물리쳐 주신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의 전리품 중에서 십분의 일을 살렘 왕 멜기세덱에게 드렸다.


히브리서 7장에서 멜기세덱은 영원한 대제사장인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있다. 결국 아브라함이나 야곱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주셨음을 깨닫고, 그들의 모든 소유에서 십일조를 드린 것이다. 


히브리서 7:4 “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2)  율법과 십일조

 

율법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레위 지파를 제외한 다른 지파들에게 분깃을 나누어 주셨고, 그들의 소유에서 십분의 일을 회중의 성막에서 봉사하는 레위 지파에게 주라고 하셨다. 그리고 레위 지파에게는 그들이 받은 십분의 일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셨다. 


민수기 18:26 “너는 레위인에게 고하여 그에게 이르라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취하여 너희에게 기업으로 준 십일조를 너희가 그들에게서 취할 때에 그 십일조의 십일조를 거제로 여호와께 드릴 것이라”

 

그런데 느헤미야 13장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바벨론에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후에, 느헤미야가 예루살렘에 있지 않는 동안에 백성이 레위 자손들에게 십일조를 주지 않아 레위인들이 자기들의 밭으로 도망간 일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느헤미야 13:10 “내가 또 알아본즉 레위 사람들의 받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으므로 그 직무를 행하는 레위 사람들과 노래하는 자들이 각각 그 전리로 도망하였기로”

 

이를 통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자기가 수고하여 얻은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자기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한없이 아깝게 느껴지고 온갖 이유와 핑계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아마 느헤미야 당시의 이스라엘 백성도 자기들의 소산에서 십분의 일을 레위에게 주는 것이 무척이나, 마치 빼앗기는 것처럼, 억울하게 생각되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았다면 레위인들이 견디다 못해 도망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공급해 주신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십일조를 드리게 되면, 하나님을 마치 십분의 일을 가져가는 세무 공무원 정도로 여기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게 낸 십일조가 하나님께 무슨 영광이 되겠는가? 아마 그 십일조를 받는 목사들이나 그 외 여러 사람은 칭찬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시지 않는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아브라함이나 야곱과 같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셨음을 깨닫고, 그 증거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3)  십일조 권유와 강요

 

이번에는 자주 인용되는 말라기 3장 말씀을 상고해 보기로 하자. 보통 목사들이 이 말씀을 인용하며 권유 반에 은근히 강요도 덧붙여서 '십일조를 내라'고 말을 한다. 물론 '선교의 명목과 교회 운영을 위해서'라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또한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라고도 한다.

 

우선 십일조 권유와 강요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말라기의 기록처럼 왜 하나님께서는 이렇게까지 '도둑질하였다'고 말씀 하시게 되었는지 그 배경을 먼저 살펴보기로 하자. 


말라기 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독자들도 아는 바와 같이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에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 말라기 1장 13절-14절을 읽어보면, 이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께 향한 마음의 여부가 어떠한지 알 수 있다. 


말라기 1:13-14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또 말하기를 이 일이 얼마나 번폐스러운고 하며 코웃음하고 토색한 물건과 저는 것, 병든 것을 가져 왔느니라 너희가 이같이 헌물을 가져 오니 내가 그것을 너희 손에서 받겠느냐 여호와의 말이니라 떼 가운데 수컷이 있거늘 그 서원하는 일에 흠 있는 것으로 사기하여 내게 드리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니 나는 큰 임금이요 내 이름은 열방 중에서 두려워하는 것이 됨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 속죄 제사를 드리고 유월절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이제는 '따분한 일'이라고 하면서 코웃음을 칠 만큼 이들의 마음은 교만으로 가득 찼다. 그리고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절고, 병든 것으로 가져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너의 총독에게 그것을 바쳐 보라 그러면 그가 받겠느냐?"라고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말라기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 상태는 이렇게 자기들의 죄를 속하는 속죄 제사마저 따분한 일로 여기고, 더럽고 병든 제물을 하나님께 드릴만큼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 있었다. 그 정도니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이야 그들의 마음에 무슨 가책이 되었겠는가? 이러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십일조와 예물을 도둑질하였다'고 하신 것이다.이런 마음 상태의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은혜들을 알 수 있을까?


아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자 하는 마음도 없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어떤 목사가 이런 말씀을 인용하여 십일조 낼 것을 권유하거나 강요한다는 것은, 결국 그곳에 모인 사람들을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과 같다고 간주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긴 어떤 교회는 주보에 '출타 중이라도 십일조는 본 교회에'라고 크게 광고를 하는 것도 보았다. 이 글을 읽고 그 속이 보여 여러 사람과 함께 얼마나 웃었는지 모른다. 이 말의 뜻을 쉽게 풀이하면, '당신은 오지 않을지라도 십일조 즉, 돈은 본 교회로 (혹 다른 곳에 보낼까봐) 보내라'는 뜻이 아닌가? 물론 여러 가지로 이유를 대겠지만 핵심은 그것이 아닌가?


아무리 미사여구를 동원할지라도 양심에서는 알 것이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렇게 출타 중에도 본 교회에 헌금하라고 십일조에 대하여 말씀하셨을까? 그리고 모두 자기 교회가 본 교회라고 하는데, 성경 어디에 그 교회가 본 교회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그리고 '누가 얼마만큼의 십일조와 헌금을 냈나?' 그 여부를 게시판이나 주보에 기재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성경에 그렇게 하라고 기록되어 있는가? 아마 성경을 상세히 살펴본 독자들은 알 것이다. 성경 어디에도 그런 말씀은 없다는 것을······.


이것이 돈만 바라는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다. 성경에는 '본 교회에 십일조를 보내라.'고 하거나 혹은 '누가 십일조를 얼마나 냈나?'를 광고 하라고 기록된 말씀은 하나도 없다. 오히려 돈을 좋아하는 바리새인들이 성전으로 맹세를 하면 아무것도 아니나, 성전의 금으로 맹세를 하면 빚진 자라고 하며 가르쳤다.


결국 이렇게 가르치는 이유는, 오로지 사람들에게서 물질을 취하려고 성경을 왜곡되게 푸는 것이다. 혹시 오늘날의 목사들도 이와 같지는 않을까? 예수님께서 이러한 자들에게는 화가 있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보라. 


마태복음 23:16-22 “화 있을찐저 소경 된 인도자여 너희가 말하되 누구든지 성전으로 맹세하면 아무일 없거니와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우맹이요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금이냐 금을 거룩하게 하는 성전이냐 너희가 또 이르되 누구든지 제단으로 맹세하면 아무 일 없거니와 그 위에 있는 예물로 맹세하면 지킬찌라 하는도다 소경들이여 어느 것이 크뇨 그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이냐 그러므로 제단으로 맹세하는 자는 제단과 그 위에 있는 모든 것으로 맹세함이요 또 성전으로 맹세하는 자는 성전과 그 안에 계신 이로 맹세함이요 또 하늘로 맹세하는 자는 하나님의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이로 맹세함이니라”

 

아무리 여러 가지 아름다운 말로 숨기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마음속을 알고 계신다. 결국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렇게 거짓으로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4)  십일조와 부자가 되는것

 

또 하나 살펴볼 것은, 목사들이 자주 쓰는 표현대로 과연 십일조를 내면 '하나님께서 부자가 되게 해주시는가?'이다. 자주 인용되는 말라기 말씀을 같이 읽어보자.

 

말라기 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이렇게 말씀하실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마음은 패역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떠나있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모든 소유와 소득이 자신들의 것이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마련하여 주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므로, 당연히 십일조도 내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이를 당연히 여겼는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스라엘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고자 십일조를 해보라고 권고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십일조를 하면 부자가 되게 해 주신다는 뜻이 아니다. 십일조를 통해서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모든 것을 후히 주시는 분이심을 이스라엘이 알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학개서에는 백성이 많은 것을 바랐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니 하늘은 이슬을 멈추었고 땅은 소산을 내지 않게 되었던 것이 기록되어 있다. 


학개 1:9-11 “너희가 많은 것을 바랐으나 도리어 적었고 너희가 그것을 집으로 가져갔으나 내가 불어 버렸느니라 나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것이 무슨 연고뇨 내 집은 황무하였으되 너희는 각각 자기의 집에 빨랐음이니라 그러므로 너희로 인하여 하늘은 이슬을 그쳤고 땅은 산물을 그쳤으며 내가 한재를 불러 이 땅에, 산에, 곡물에, 새 포도주에, 기름에, 땅의 모든 소산에, 사람에게, 육축에게, 손으로 수고하는 모든 일에 임하게 하였느니라”

 

요즈음도 참 많은 사람들이 말라기 말씀으로 하나님과 장사를 하려고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십일조를 내면 부자가 되게 해주신다는 말로 알아듣고는, 부자가 되기 위하여 십일조를 드리곤 한다. 이야말로 give and take(주고받기)가 아닌가? 아마 이 글을 읽는 독자들 중에도 그런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부자가 되지 않으면 그때 가서 하나님을 원망할 것이 아닌가?


이들 마음에 과연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가 있을 수 있을까? 이런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하나님께 온 것이지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정말 귀한 보배를 얻고자 온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은 하늘에 속한 영적인 복이다. 잘 살아야 육십 내지 칠십인 인생, 혹 강건할지라도 팔십인 인생이다. 바람과 같이 날아가고, 들의 풀과 꽃과 같고, 그 삶이 수고와 슬픔 가운데 살다가 죽음을 맞이할 인생에게 하나님께서 과연 무엇을 주시려고 하시겠는가 생각해 보라.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신 은혜가 무엇인지 에베소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에베소서 1: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사람들이 꿈꾸는 이 세상 복을 다 받아 누렸던 솔로몬이 너무 실망하여 '헛되고 헛되니'라고 외쳤던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모르는 사람의 미련한 간구에 불과하다.

 

전도서 2:11 “그 후에 본즉 내 손으로 한 모든 일과 수고한 모든 수고가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며 해 아래서 무익한 것이로다”

 

또한 여기서 이것을 한 번 생각해보자. 과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난 뒤에 부자로 호위 호식을 한 사람이 있었는가? 베드로? / 바울? / 요한? / 디모데?


주께서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라고 말씀하신 것처럼, 참으로 거듭난 주님의 사람들은 세상에서는 고난 받았던 것을 독자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바울이 고린도에 있는 교회들에게 쓴 편지를 보면, 그는 부자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주리고 헐벗고 매를 맞고 박해 받았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고린도전서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부자가 되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만일 부자가 된다면 그 돈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도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과연 부자가 되어 무엇을 할 것인가? 가난한 자를 돕기 위하여? 아니면 은혜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혹시 본심은 자기 자신과 자기 가족끼리 잘 먹고 잘 살고, 교만하여 사람을 무시하고, 죄를 짓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닐까?


많은 돈을 가진 사람이 가난한 이웃을 돕고 마음을 낮추어 겸손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나 생각해보자. 아마 그런 사람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큼 희귀할 것이다. 대부분 돈이 많아지면 저절로 땅이나 아파트 투기나 하고, 술과 여자를 찾게 되거나, 카지노 같은 데로 노름을 하러 가는 모습을 너무도 많이 본 여러분들이 아닌가? 또한 돈이 좀 있다고 얼마나 사람을 비웃고, 괴롭히고 마음을 상하게 하는지······.디모데전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된 것을 독자들도 기억할 것이다.

 

디모데전서 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독자들이 성경을 읽어본 대로, 주님의 사람들 중에 어느 누가 부자 되기를 구한 사람이 있었는가? 또는 유명해지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들 모두 하나님께 순종하며,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기의 목숨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정말 주님을 위하여 부자가 되고자 한다면, 부자가 되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순종 하는 것이 당연하다. 왜냐하면 주께서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분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해 주시리라"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무엇 때문에 부자가 되기를 구하겠는가?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구하는 부자가 되기보다는 주님의 신실한 종이 되기를 더 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누가복음 13장 24절에 다음과 같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이 세상 부자가 되려는 것이 과연 좁은 문일까? 요즘 '부자 되세요.'라는 말이 가장 좋은 덕담이라고 해서 아주 유행이다. 하지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들어가는 넓은 길이다.


성경을 보면, 부자였던 사람도 주님께로 오면 그가 갖고 있는 것에서 더 부자가 되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나누어 주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세리장 삭개오는 부자였으나, 주님께서 "오늘 너의 집에 유하겠다."고 하시는 말씀 하나로 그의 마음이 기뻐 주님을 영접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누가복음 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과연 이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 부자가 되기를 구했단 말인가? 


5)  십일조와 신앙생활

 

여기서 또 하나 상고해 볼 것은, 십일조를 냈다고 해서 그것으로 신앙생활을 다 한 것일까? 마태복음에는, 이 문제에 관하여 음식에 향료로 쓰는 것까지 십분의 일을 계산하여 낼 정도로 십일조를 열심히 정확하게 냈던 사람들에게 주님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 기록되어 있다.

  

마태복음 23:23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찌니라”

 

이들은 율법을 따라 열심히 십일조를 내고 있었으나, 막상 공의와 자비와 믿음의 더 중요한 부분은 빠뜨렸다. 이 말씀의 뜻은, 십일조를 아주 소량으로 쓰이는 향료까지 계산하여 내다보니, 그들은 스스로를 의로운 자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율법으로 흠이 없는 자로 착각을 하고 있었다.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 십일조를 철저하게 바친다면 다른 율법도 철저히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그들은 말만하고 행하지 않으며, 사람들에게 '랍비'라고 불리는 것이나 좋아하며, 과부들의 집을 빼앗으며, 성전의 금으로 맹세하면 그대로 지키라고 가르치며 (이 말은 성전의 금으로 맹세를 했으니 금을 가지고 오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잔과 접시는 깨끗하게 하나 막상 자기들의 마음속은 깨끗하게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는 의롭게 보이지만, 그들의 마음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였다.

 

마태복음 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이들의 상태가 이렇다 보니 아무리 종교적으로 열심을 낼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의는 생각도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의를 나타내기에만 열심인 것이다. 로마서에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로마서 10:2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

 

주님이 이들을 위선자라고 부르셨다는 것을 독자들이 잊지 않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십일조를 다 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주님 앞에 할 바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인 것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구원을 받은 이방인들에게 어떤 사람들이 가서 모세의 율례를 따라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가르쳤을 때, 사도들이 함께 모여 성령의 가르침을 받아 다음과 같이 이방인 형제들에게 서신을 보냈다. 


사도행전 15:28-31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이때 사도들이 이방인으로 구원을 받은 형제들에게 과연 '십일조를 꼬박꼬박 내라'고 가르쳤는가? 생각을 좀 해보길 바란다. 혹 이렇게도 말하는 목사들도 있다. '교인들이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어떻게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유지하며 봉급을 줄 수 있겠느냐? 그러므로 교회 운영을 위하여도 십일조는 꼭 필요한 것이다.' 자 여기서 생각해보자.


과연 이 말이 성경에 합당한 말일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돈으로 된다고 성경 어디에 기록되어 있는가? 언제 하나님께서 그렇게 커다랗게 건물을 짓고 많은 사람들을 고용하고 목사들에게 많은 금액의 봉급 및 여러 가지 제반 비용을 대라고 하셨는가?


있다면 성경 어디에 있는지 보여주기 바란다. 만약 그것이 주님의 뜻이라면, 왜 사도들은 굶주리고 헐벗었을까? 그들이 입이 없고 바보라서 그런 것을 요구하지 않았을까? 


고린도전서 4:11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6)  십일조와 목사봉급

 

어떤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레위인들에게 십일조 주는 것을 이유로, 오늘날에도 영적인 레위인들이요 제사장에 해당되는 목사들에게 십일조를 드려야 한다고 가르치는 이들도 있다. 과연 그럴까? 그것이 정말 하나님의 뜻일까? 우리 함께 성경을 살펴보기로 하자.


성경을 살펴보면, 구원받은 사람은 모두 다 왕 같은 제사장이며, 하나님께 속한 친 백성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어디에도 전도사, 강도사, 목사 등등 계급의 차를 둔 적이 없다. 이런 것은 단지 사람들이 만들어낸 계급에 불과하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베드로전서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또한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들 중 어느 누구도 목사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내라고 가르친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물론 주님께서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으시다. 그들은 자기 손으로 일을 하여 동행들의 쓸 것을 마련하였다.


물론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에 빌립보 교회에서 한 번 두 번 쓸 것을 보내주었다. 이때 이들이 바울에게 목사로서 봉급을 준 것이 아닌 것임을 성경을 읽어본 사람은 누구나 알 수가 있다. 주님의 일꾼들은 나가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방인들에게 아무 것도 받지 않았다. 또한 십일조를 강요하지도, 받으려고 애를 쓰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을 세우신 살아 계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예비하실 것을 믿었다. 이러한 참된 주님의 일꾼들을 교회에서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다. 


요한삼서 1:7-8 “이는 저희가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아니함이라 이러므로 우리가 이 같은 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우리로 진리를 위하여 함께 수고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

 

요즘 부흥사를 부르고 난 후, 그 주간에 헌금된 돈을 초청한 교회와 부흥사가 비율에 따라 나누어 갖는다고 한다. 과연 예수님의 제자들 중 이렇게 했던 사람들이 있었나 생각해보자. 아무리 성경을 살펴보아도 그렇게 헌금한 돈을 자기들 것처럼 서로 나누어 가진 이들은 아무도 없었던 것을 발견할 수 있다. 혹시 이런 사람들은 유다와 같은 사람이 아닐까?


성경을 보면 가룟 유다는 돈 주머니를 맡았던 사람이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자, 그의 누이인 마리아가 은혜에 감사하여, 매우 값진 감송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붓고 머리카락으로 그의 발을 닦았다. 이 모습을 본 유다는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라고 하며 마리아를 꾸짖었다. 겉으로 보면 유다는 가난한 사람에게 온 마음을 쓰는 사람처럼 보인다.

  

요한복음 12:1-5 “유월절 엿새 전에 예수께서 베다니에 이르시니 이곳은 예수께서 죽은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의 있는 곳이라 거기서 예수를 위하여 잔치할쌔 마르다는 일을 보고 나사로는 예수와 함께 앉은 자 중에 있더라 마리아는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을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붓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씻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그런데 성경에는 유다가 가난한 자들을 염려해서가 아니라, 돈 주머니를 맡았기 때문에 도적질하려고 그랬던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12: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저는 도적이라 돈 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이러라”

 

또한 '목사들에게 봉급을 줘야 하므로 십일조를 내야 한다.'고 하며 성경과는 다르게 말하고 가르치면서, 그저 큰 건물과 많은 사람만을 자랑하고자 하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 과연 어떤 사람들인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그런 것이나 원하는 사람들은 품삯에만 마음이 가득한 것을 보면, 주님의 일꾼이 아니라 혹시 삯꾼은 아닐까?

 

요한복음 10:12-13 “삯군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7)  결론

 

지금까지 십일조에 대하여 상고 해보았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 중에는 '십일조를 내라는 말인가, 아니면 내지 말라는 말인가?'하며 아직도 고개를 갸우뚱하기도 할 것이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여러분이 아직 거듭나지 못했다면 율법대로 행하라.


그러나 참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면 당연히 '구원받은 사람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과연 주님의 뜻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마음속에서 나오게 될 것이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다음과 같이 자세히 기록해 놓았다. 


로마서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단순히 십일조를 드리는 것으로 신앙생활을 다한 게 아닌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만일 십일조를 내는 것에 만족하고 거기에 머무르고 있다면, 성경에 기록된 대로 주님으로부터 크게 책망을 받은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과 다를 것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여러분 자신을 저주와 사망과 심판에서 건지시어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옮겨놓으신 것이 믿어진다면, 단순히 십일조를 드릴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주신 것을 깨닫고 십일조를 드린 것같이,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로 모든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이라면,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하다. 주님의 사람인 사도 바울이 교회 운영에 필요하다면서 '십일조를 내라'라고 기록하지 않고,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고 기록한 것을 상고해 보면 더욱 확실해 질 것이다.


끝으로 헌금이나 연보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상고해 보자. 마게도냐 교회의 성도들은 자기들도 심한 궁핍 속에 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어려운 성도들을 위하여 풍부한 연보를 하였다. (물론 거창한 건물을 짓도록 연보를 한 적은 없었다.) 과연 어떻게 심한 궁핍에 풍부한 연보를 할 수 있었을까?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고린도후서 8장을 통해서 그 비결을 자세히 살펴보자.

 

고린도후서 8:1-5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의 바라던 것 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

 

나중 할 일과 먼저 할 일을 구별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마게도냐 성도들은 로마서 12장 1절 ~ 2절에 기록된 바와 같이, 먼저 자신을 하나님께 드린 것이다.


그 후, 예루살렘에서 어려움에 처해있는 성도들을 돕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아곱의 하나님께서 역사하여 주시는 대로, 심한 궁핍 가운데서도 능력 이상으로 풍부한 연보를 할 수 있었다.

 

이제 십일조에 관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배운 사람이라면, 그 헌금들이 잘못되게 거두어지고 있고 또한 잘못 쓰이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계속해서 거짓말에 속고 살 것인가, 아니면 진리의 말씀을 따라 행할 것인가? 

 

 

 

 

 

출처 : 우림과둠밈
글쓴이 : 우림과둠밈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