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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과 그 대책

새벽지기1 2016. 1. 19. 06:01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과 그 대책 (창세기강해 #40 - 창3:4-7)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과 그 대책

창세기 강해 (40)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고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과실을 따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막은 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창3:4-7)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은?

 

작금 기독교가 쇠퇴하고 신규교인이 특별히 청년층이 늘지 않고 있다. 거기다 기존 교인 중에도 교회 ‘안 나가’를 거꾸로 말한 속칭 ‘가나안’ 성도도 늘어나고 있다. 심지어 천주교로 개종하는 교인도 심심찮게 나온다.

 

정말로 기독교의 위기라고 할만하다. 그 첫째 원인으로 교인, 교회, 특별히 목사가 세속보다 더 추한 모습을 보인 까닭으로 본다. 그러나 이는 조금 잘못된 분석인 것 같다. 같은 목사라 두둔하려는 뜻이 아니다.

 

우선 인간의 성정은 모든 세대가 동일하다. 이런 문제가 최근에 새로 생긴 일이 아니다. 거기다 예수 믿은 후에도 죄의 본성은 살아 있기에 교인이나 목회자의 스캔들은 항상 있어왔다. 물론 지금은 매스컴이나 SNS가 발달되어 불신자들도 교회 비리를 꿰뚫고 있어 전도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다. 교인들도 그 동안에는 쉬쉬하며 은혜로 넘겨왔지만 최근 그 정도가 노골적으로 심해져 교회 출석을 중지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분명하다.

 

그런데 초대 교회인 고린도 교회의 사정은 어떠했는가? 성도 간에 파당을 나눠 주도권 다툼으로 지샜고, 성적으로 극도로 타락했고, 성령의 은사를 무분별하게 사용하여 성도 간에 위화감이 생겼고, 식사 교제에서 빈부 차별을 했으며, 교회 문제를 법정에 송사했다. 현대 교회가 골치 섞는 문제들이 한 교회가 다 갖고 있었다. 또 요한계시록에서 일곱 교회에 보낸 예수님의 편지에서 다섯 교회가 회개하라는 꾸중을 듣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당시에 기독교가 쇠퇴하기는커녕 크게 부흥했다. 그럼 현재 기독교 쇠퇴의 원인을 단순히 교회 추문에 돌리면 뭔가 부족한 것 아닌가? 교회에 사람을 보러가지 말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가는 것이므로 어떤 스캔들도 참으라는 판에 박힌 이야기를 하려는 뜻이 아니다. 만약에 교회의 추문이 이전에도 지금과 동일하게 있었다면 현대교회의 변질된 점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 하지 않는가? 이 문제에 대한 접근하는 패러다임을 바꿀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종교의 세 구성 요소

 

모든 종교는 크게 보아 세 가지로 구성된다. 종교가 깨우쳐 주려는 진리(성경)와 그 진리를 풀어서 가르치는 성직자(목사)와 가르침을 받아 그대로 따르는 종교인(신자)이 그것이다. 성경의 진리는 시대가 바뀐다고 변경되는 것은 아니고 교인의 성정도 동일하다. 자연히 그 진리를 풀어 가르치는 목사에게 잘못이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럼 목회자의 잘못이 가장 크다는 현재의 분석이 옳다는 뜻인가? 아니다. 목사는 조금 특이한 위치이기에 두 가지 요소를 다 감안해야 한다. 우선 목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개인적으로는 그 성정이 동일해서 스캔들은 항상 있다. 그와 동시에 목사는 진리를 풀어 가르치는 직분을 맡았다. 따라서 목사가 가르치는 내용이 변질 된 것이다. 목사의 부정을 바로 잡는 것이 근본대책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초대교회와 같게 해야 한다. 아무리 따져도 초대교회와 현대교회가 달라진 점은 오직 그것 하나뿐이지 않는가?

 

작금 기독교에 파생하는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초대교회와 다르게 혹은 부족하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초대교회처럼 순전한 복음이 전해지고 예수님이 정확하게 소개된다면 반드시 성령이 역사한다. 성령은 예수님 대신에 오신 그 분과 동일한 보혜사이다. 그 첫째가는 역할은 죄인으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깨닫게 만드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아이고 성령이 그분 대신 오신 보혜사인데 어찌 인간의 심령에 온전히 역사하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요컨대 기독교가 가장 기독교다워질 때에 비록 교회 안에 문제가 있어도 불신자들은 목사와 교인에게 설득당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한 기독교의 진리 앞에 무릎 꿇게 된다는 것이다. 지금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인간을 대하는 원리, 뜻, 계획이 교회 안에서 온전하게 가르쳐지지 않으면 어떤 기독교의 부흥대책도 소용이 없다.

 

가나안 성도라고 다 옳은 것은 아니다. 그들의 충정어린 동기는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리가 실종되었음을 안타까이 여기고 교회 출석을 중지한다면 괜찮다. 반면에 순전히 외적 추문에 실망하여 그랬다면 인간의 성정이 모두 죄로 타락되었다는 기독교의 가장 기본적인 진리도 모르는 꼴이다. 나아가 자신은 의롭다고 여기는 지독한 교만일 수 있다. 천주교로 개종하며 선행과 포용을 강조하는 자들이 그 대표적 예다. 교회가 도덕적으로 타락할수록 더욱 성경으로 돌아가 하나님의 진리를 견고히 세워야 한다. 그들은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정도 밖에 못한다.

 

그럼 기독교가 가장 기독교다운 점은 무엇인가? 오직 하나다. 예수 십자가다. 절대적이고 완전하며 영원하고 유일한 십자가 구원을 빼면 기독교는 다른 종교와 똑같아진다. 타종교도 구원의 길은 제시하지만 사실상 구원이 없다.

 

모두가 인간의 선행과 공로 구원관을 가르친다. 지난주에 말씀드린 대로 그 종교인들은 도덕적 교만에 빠진 것이며 그들의 신은 도덕 점수를 채점하는 컴퓨터에 불과하다. 인간을 구원하는데 신의 긍휼이 전혀 개입되지 않는다. 나아가 죽은 후에야 판단하므로 이 땅의 삶에서 인간이 그 신의 사랑을 받아 누릴 길이 없다.

 

이런 차이가 왜 생기는가? 구원은 죄에서 건져주는 것인데 죄에 대한 정의가 기독교와 타종교가 전혀 다르니 구원의 길도 달라진 것이다. 결국 지금 기독교가 이 점을 제대로 강조하지 않는 것 즉, 성경이 말하는 죄의 본질에 대해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이 기독교 쇠퇴의 첫째 원인인 셈이다.

 

종교가 가르치는 죄의 종류

 

간과해선 안 될 사항은 타종교에서도 죄를 상당히 심오하게 가르치고 행동으로 범하는 윤리적 잘못으로만 국한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형제를 바보라고 말로 비난하면 살인이며, 예쁜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으면 간음이라고 가르쳤다. 타종교에서도 말을 절제하고 악한 생각을 다스리라고 한다.

 

또 오늘 본문에서 이브에게 생긴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것과 지혜로운 것에 대한 욕심을 추구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죄의 원인이라고 간주한다. 그래서 욕심을 줄이라고 가르치고 욕심이 생기는 대상 자체를 제거하여 무소유의 삶까지 실행한다. 나아가 선악과를 다른 과일과 비교함으로써 그런 욕심이 생겼다는 일부 기독교인들의 해석처럼 모슨 사물과 사안을 그 우열로 비교하지 말고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올바른 가르침이자 아주 잘하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기독교 목사들도 본문을 거기까지만 가르치고 치운다는 것이다. 그럼 죄의 본질이 타종교와 전혀 다를 바 없지 않는가? 그런 가르침을 받은 교인들도 죄에 대한 인식이 타종교와 같기 때문에 추문이 많은 교회보다 추문도 없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며 사회정의를 강조하는 천주교가 더 좋아 보일 수밖에 없다.

 

물론 기독교의 목사가 타종교와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딱하나 있다. 타종교에선 그 죄들을 인간이 절제, 수정, 개선이 가능하다고 한다. 반면에 기독교 목사들은 인간의 노력으로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기에 예수 십자가 대속의 공로를 믿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타종교는 자기들 신 앞에 도덕적 자랑을 앞세우지만 기독교는 하나님 앞에 인간의 부패와 무능을 겸손히 인정하고 그분의 긍휼을 소망하기에 확연히 다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여전히 죄의 본질은 동일하고 죄를 이기는 방법만 다를 뿐이다. 거기다 기독교 신자의 인간적 의로움, 최소한 공로까지 내포될 수 있다. 타종교인들이 악한 생각을 절제하고 욕심을 부정하고 다름을 인정하려 노력하는 것이나, 기독교 신자가 하나님 앞에 자신의 무력함을 인정하고 열심히 믿으려 노력하는 것이나, 그 행동의 주체는 인간이지 않는가?

 

오해는 마셔야 한다. 죄에 대해 인간은 무력하고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함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의 구원은 한 걸음 더 나가야 한다. 창세기 1-3장을 종합하면서 본문을 다시 보는 이유가 있다. 바로 죄의 본질을 정확하고도 확실하게 정리하기 위해서다. 그래야 구원의 길이 정리된다.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추구하려 했고 또 그래서 선악과 열매와 다른 열매를 비교한 것이 죄의 본질도 출발도 아니다. 본문은 “나무를 본즉”(6절)이라고 했지 다른 과일과 비교했다는 언급이 없고 그렇게 해석될 여지도 없다.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나무 앞에서 그 과일만 계속 응시하는 중이었다.

 

사탄의 꾐에 넘어가기 전과 후에 선악과에 대한 생각이 달라진 것이다. 다른 과일에 비교해보니 선악과만 유독 맛있어 보인 것이 아니다. 사탄의 말을 듣기 전에는 선악과는 그저 평범해서 따먹어도 안 따먹어도 그만이다가 이젠 죽어도 따먹어야겠다고 생각이 바뀐 것이다. 사탄의 말을 듣고 자기 생각을 바꾼 것이 죄의 본질이요 시발이다.

 

그 바뀐 생각은 사탄의 말을 들은 그대로다(5절). 하나님 같이 되는 것을 하나님이 싫어해서 못 먹게 했다고 했으니 하나님과 같이 되어야지라는 생각이다. 지금껏 창세기를 40번 강해하면서 계속 강조한 진리인데 바로 기독교를 가장 기독교답게 만드는 핵심이다.

 

십자가에서 정작 용서 받은 것은?

 

유대 장로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식사를 한다고 시비를 걸어왔을 때 주님은 먼저 “너희가 아직 깨달음이 없느냐?”라고 일갈했다. 인간의 본성과 죄의 본질에 대해 전혀 무지하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럽게 한다고 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란, 도적질, 거짓증거, 훼방이라는 것이다.(마15:16-20)

 

무슨 뜻인가? 사람의 속 즉, 사람 자체가 더럽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온다고 마음과 생각 그 둘을 구분했다. 행동과 말은 당연히 생각에서 나오지만 그 생각(지정의)을 주관하는 영역 마음(영)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또 모든 인간은 그 영이 타락했기에 죄인이며 또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러 왔다고 했다. 만약 인간이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된다면 해결책은 죄를 없애는 것이다. 다른 모든 종교의 구원관이다. 반면에 죄인이기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다면 그 죄인 자체를 바꾸어 구원하는 길뿐이다.

 

이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한 죽음이 엄격히 말해 모든 인간의 죄, 그것도 윤리적 죄 때문이 아니라는 뜻이다. 지금껏 그 대속으로 인해 과거에 지은 모든 죄는 물론 미래에 지을 모든 죄까지 용서 받을 수 있다고 배웠다. 예수를 믿음으로써 모든 죄가 용서 받는 구원을 공짜 선물로 받았다고 했다. 그야말로 “Thank You!”이자 기독교 신자가 안 되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이다.

 

그렇게만 자꾸 강조하다보니 교인이나 교회가 죄를 짓고 예사로 여긴다. 대형교회 유명목사들이 세속보다 더한 죄를 짓고는 하나님 앞에 개인적으로 회개했고 십자가 복음 안에서 이미 다 용서 받았다면서 다시 떳떳하게 아니 뻔뻔하게 목회를 더 열심히 하고 있고 교인들도 아멘으로 화답한다. 세상에서 뭐라 하든 죄는 사람이 아니라 예수 십자가만이 해결하고 이미 죽을 때까지 죄는 다 용서 받았다는 것이다.

 

죄인이기에 죄를 짓는다는 근본원리를 제대로 알지 못한 탓이다. 십자가의 예수님의 죽음으로 구원받은 것은 죄가 아니라 죄인이다. 한 죄인 전부를, 마음에서 악한 생각이 나오니까 영혼육이 합일된 인격체 전체를 그 있는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은 영접하여 당신의 자녀로 삼아준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인 우리 대신에 예수님이 실제로 사형의 형벌을 받은 것이다. 지옥에 떨어질 우리를 건져서 천국으로 옮겨주신 것이다. 하늘의 생명책에 그 이름을 올려주었다.

 

행동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윤리적 죄를 용서 받기 이전에 나라는 개인을 용서한 것이다. 예수님이 정말로 사형수였던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대신해서 죽으셨고” 그래서 나도 실제로 살아났다. 그분의 생명과 나의 생명을 일대일로 맞바꾸었다. 그분은 죽고 나는 살아났다. 그 전에는 흑암에 갇혀 사탄에 속했던 신분 위치였는데 나의 본성은 그대로 둔 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이 영원히 통치하는 영역 안으로 신분과 위치를 소속시켰다.

 

천하의 죄인과 천하의 의인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 같이 되려는 것이다. 하나님과 맞짱 뜨는 정도를 넘어 아예 필요 없다고 덤비는 것이다. 내 혼자서 얼마든지 할 수 있다고 자신하며 거룩하고 완전하신 그분의 통치 밖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그럼으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고 도무지 건널 수 없는 담이 생겼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당신의 몸이 찢김으로써 그 중간의 담을 허물고 죄인인 나와 하나님을 일대일로 화해시켰다.

 

윤리적으로 세상에서 아무리 칭송 받는 의인이라도 예수 구원을 모르면 천하의 죄인이다. 지옥의 형벌이 기다린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스스로 끊었기에 오직 추악한 흑암에 영원히 묶인다. 하나님의 형벌이이기 이전에 본인이 자초한 당연한 결말이다. 반면에 날마다 수시로 넘어져 죄를 짓지만 하나님 안에 남아서 성전에서 기도하는 세리처럼 하늘을 우러러볼 자격도 없다고 고백하는 자가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는 의인이다.

 

다시 강조하지만 인간이 행동의 주체가 되어서 행하는 추한 생각, 본문에서 말하는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할 탐스러운 것을 추구하는 욕망은 죄의 본질이 아니라 죄의 결과다. 하나님 밖에 있으면 천하의 죄인이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천하의 의인이다.

 

자신의 지난 윤리적 죄를 회개해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밖에 있던 죄인을 성령의 초자연적 역사로 그분 안으로 옮겨짐으로써 의인이 된 것이다. 그전에는 하나님이 이유 없이 싫다가 그 후로 이유 없이 좋아지는 것이 기독교의 구원이다.

 

아담과 이브도 범죄 한 후에 자기 잘못을 회개하지 않았고 나무 사이에 숨기 바빴다. 하나님의 꾸중을 받으면서도 핑계만 대었다. 하나님이 양을 죽여서 가죽옷을 지어 입힘으로 당신 쪽에서 일방적으로 구원의 은혜를 베풀었다. 그 일방적 사랑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순종하고자 하는 믿음이 비로소 다시 회복된 것이다.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은 이유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란 결국 죄인으로 태어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인간의 책임이 면제된다는 뜻은 아니다. 스스로 끝까지 하나님 밖에 있겠다는 고집을 죽을 때까지 피우기 때문이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얻었다는 의미도 그 고집이 얼마나 허망하고 비참한 실패였는지 철저히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이젠 하나님 안에 끝까지 남아 있겠다고 그 생각이 바뀐 것이다.

 

기독교 구원은 윤리적으로 선해지려 노력하고 결단하는 차원이 결코 아니다. 정말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체험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 밖에 있었던 지난 삶이 절망과 죽음이었음을 뼈저리게 느꼈기에 이제 하나님 안으로 옮겨져 그분의 생명을 받아 누리며 사는 것이다.

 

예수 믿은 후에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은 이유가 이왕에 과거의 모든 죄까지 용서한 판에 크게 인심 더 쓰자는 뜻이 아니다. 인간 스스로는 죄를 이길 수 없기에 어차피 용서할 수밖에 없다는 신학적 교리적 분석에 그쳐서도 안 된다.

 

하나님은 죄인이었던 우리라는 존재 전부를 의인으로 이미 받아들였다. 사람 전부를 받아 들였으니까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는 것이다. 미래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그를 다시 당신 통치 영역 밖으로 쫓아내는 자가당착이다. 또 그래서 예수를 믿어 정말로 거듭나서 그분의 자녀가 되었다면 구원이 취소되는 법은 절대로 없다.

 

아버지가 자기 자식이 아무리 잘못해도 때로는 징계는 해도, 그것도 자식 잘되라고, 그 부자 관계는 절대 끊지 않는다. 부모는 자식이 앞으로도 수시로 불효하고 그래서 자기 마음이 상할 것까지 알고 있지만 여전히 사랑스런 자녀다. 아들은 미래의 죄까지 용서 받은 셈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 십자가의 구원이다.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가장 기독교다운 점이다.

 

기독교가 다시 부흥하려면?

 

작금 교회와 목사의 추문이 끊이지 않는 이유가 개혁하려는 노력이 약한 탓만 아니다. 근본적으로 자신의 바뀐 신분과 소속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체험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의 안과 밖이 완전히 뒤집어진 적이 없다. 예수 없던 이전의 죽음의 상태와 예수 있는 지금의 생명의 상태에 대한 극과 극으로 분명한 대조가 안 된다. 예수 믿는 것이 얼마나 엄청나며 기쁜지 실감하지 못한다.

 

유감스럽게 아주 많은 교회와 목사와 교인들이 단지 기독교가 가장 그럴싸해 보여서 선택하고 있다. 교회에서 가르치는 교리를 수긍하고 이전보다 조금 더 선하게 살기를 노력하는 정도로 그친다. 죄를 지어도 이미 용서 받았으니 안심하고 예사로 여기고 있다.

 

신자는 실제로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살고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살고 있는 모습, 냄새, 흔적이 드러나야 한다. 십자가를 몰랐던 지난 삶은 지옥이었고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와 있는 지금은 천국임을 온전히 인식하고 걸맞게 반응하고 있어야 한다. 육신이 병원에서 포기한 죽을 병에서 하나님 은혜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면 그 삶은 완전히 이전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그와 똑같은 일을 주님이 십자가에서 나에게 베푸셨음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럼 그 이후의 삶이 어떠해야 할지는 너무 분명하지 않는가?

 

신자는 성령의 은혜로 그 속, 즉 마음이 완전히 뒤집어진 자다. 예수님의 보혈로 씻겨서 깨끗해졌다. 이전의 자신과는 완전히 달라졌음을 본인만은 알고 있다. 인생만사를 보는 관점이 달라진다. 거룩하고 의롭고 완전하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영광스런 계획을 마련해서 세상은 도무지 줄 수 없는 사랑과 권능으로 나를 이끌고 계심을 알고 있다. 그분이 나를 눈동자 같이 지켜보고 있음을 알기에 생활방식 자체가 완전히 달라진다.

 

정말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정말로 하나님이 나에게 임재해서 내 면전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음을 아는 신자와 목사라면 지금처럼 행할 수는 없다. 사람들이 세상보다 더하다고 손가락질 하는 짓을 한두 번은 몰라도 계속해서 뻔뻔하게 자행할 수는 없다. 아무리 하나님의 일이라는 거창한 명분을 내세워도 예수는 없다.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두려움과 경외감이 없어졌거나 아주 약해진 것이 현대교회의 가장 큰 문제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가 내 대신에 죽고 부활했기에 나도 천국 갈 수 있다는 진리 하나만 확신했다. 그 간단하고 순전한 복음만으로 세상의 핍박과 손해는 전혀 두렵지 않게 되었고 그 인생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으며 주변 사람까지도 그렇게 만들었다. 지금은 세상의 핍박과 손해가 두려워 교회에서 열심히 예수 믿으면 모든 것을 해결해준다고 한다. 예수 십자가가 변질 된 것을 넘어서 완전히 실종되었다.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다. 그럼 세상 핍박 손해가 해결되지도 않고 지금처럼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손가락질 받으며 그 무엇보다 하나님으로부터 외면 받는다는 사실을 모른다. 하나님은 오직 예수 십자가로만 사람, 죄인, 특별히 신자를 통치하기 때문이다. 십자가 회복하는 것만이 기독교는 물론 신자 개인이 부흥할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길이다.

 

1/17/2016 박 신 목사

 


출처 : 은혜동산 JESUS - KOREA
글쓴이 : 임마.누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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