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말씀/김영봉목사

“내가 사는 이유”(빌립보서 1:20-25)

새벽지기1 2015. 12. 16. 08:27

 

1.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렇게 건강한 모습으로 여러분 앞에 서서 다시 말씀을 전하게 되어 감개가 무량합니다. 저의 수술과 회복을 위해 기도해 주신 모든 교우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여러분의 사랑과 기도 덕택에 수술이 잘 되었고 회복 또한 순조롭고 빨랐습니다. 뿐만 아니라, 모처럼 저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휴식의 시간까지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저의 빈자리를 채워주신 목사님들께 그리고 사랑으로 저를 기다려 주신 모든 교우님들에게 마음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오늘, 암과 함께 지낸 지난 8개월 동안에 느끼고 깨달은 것들 중 일부를 말씀에 비추어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이런 설교를 하는 것에 대해 많이 망설였습니다. 암 중에서도 전립선암은 가장 쉬운 것인데, 그것으로 인해 수술 한 번 받고는 거기에 대해 무슨 말씀을 드린다는 것이 3년 혹은 5년 동안 항암치료를 하면서 지루한 싸움을 하시는 분들에게 죄송한 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지나갈까도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용기를 낸 이유는 제가 겪은 것이 다른 분들이 겪은 것과 비교해서 너무도 작은 것이지만, 모든 질병에는 그 나름의 무게가 있는 법이며, 또한 저의 이야기가 앞으로 어려움을 당할 때 도움이 될 수도 있겠다고 믿어졌기 때문입니다.

작년 12월 10일, 제 전립선에서 암이 발견되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한 동안 당황스러웠습니다. 나는 암과 상관없으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닙니다. 암이 감기처럼 흔해진 이 시대에 살면서 그렇게 기대하면 큰 코 다치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얼마 전 뉴스에 보니, 한 사람이 일생 동안 살면서 암을 한 번이라도 겪을 확률이 세 사람 중 하나라고 합니다. 또한 암은 이제 불치병(fatal disease)가 아니라 ‘만성질환’(chronic disease)로 분류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흔해졌고, 또 그만큼 치료도 잘 된다는 것입니다. 암 진단에 대해 제가 당황스러웠던 이유는 따로 있었습니다. 교우들에게 끼칠 걱정 때문이었습니다. 목사가 교우들의 걱정을 덜어주어야지, 교우들의 걱정의 원인이 되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그 이후로, 이 사실을 받아들이고 소화하는 데 여러 날을 보냈습니다. 그것을 소화하는 과정에서 가장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기도와 말씀 묵상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기도하면서 가장 먼저 한 것은 ‘회개의 기도’였습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이 거하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 성전을 제가 학대하고 오용하여 암에 대한 면역력에 구멍이 생겼으니, 마땅히 회개할 일이었습니다. 저는 설교 중에 자주 “거룩한 성전인 우리의 몸을 잘 섬기십시다.”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하나님께도 송구스럽고, 교우들에게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오랜 기간 동안 회개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어느 정도 회개의 기도를 올리고 난 다음에는 감사의 기도가 나왔습니다. 두 가지 점에서 감사했습니다.

첫째, 제가 몸을 학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지 않게 깨달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감사했습니다. 사실, 약 2년 전부터 가끔 “아, 이러다가 무슨 일 나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 때마다 다음과 같은 생각이 저를 설득했습니다. “내 나이에 누군들 이렇게 살지 않으랴! 교인들도 이렇게 숨차게 살고 있을 텐데, 그분들을 섬긴다는 내가 어찌 몸을 사릴 수 있으랴!” 이런 생각으로 달렸기 때문에 아마 제게 좀 더 심각한 경고가 필요 했던가 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암의 발견은 제게 축복이었습니다.

이 문제를 두고 감사의 기도를 드린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나서 제 아내가 한 번은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이 그동안 책 쓰느라 그리고 주일마다 설교 준비하느라 책상에 앉아서 지치도록 진을 빼곤 했으니 그런 게 생기지 않고 배기겠어요?” 저는 아내의 진단이 100% 옳다고 믿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만일 제가 말씀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서 매 주 해산의 수고를 한 것이 이 질병을 가져왔다면, 한 편으로 그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해 제 몸에 얻은 ‘거룩한 흔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축구선수 박지성 선수의 발은 흉하게 일그러져 있다고 합니다. 유도 선수나 레슬링 선수들은 귀가 흉하게 일그러져 있습니다. 수 없는 연습으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발이 뒤틀리고 귀가 일그러지는 것을 염려한다면 좋은 선수가 될 수 없습니다. 만일 제가 진리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힘쓰고 애쓰는 것이 제 몸에 어떤 흔적을 남긴다면, 저는 그 흔적을 마다하지 않겠습니다. 제 일에 적당히 하면서 몸 성히 살기보다는 몸에 흔적이 남더라도 전력투구를 해야 옳다고 믿습니다. 적어도, 육신이 전부가 아니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고 믿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그렇게 믿고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2.


오늘 저는 두 가지의 주제에 대한 저의 묵상을 나누려고 합니다. 첫째 주제는 ‘삶의 목적’에 관한 것입니다.

암 진단을 받고 잠시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전립선암을 선고받고 죽음의 가능성 앞에서 두려워 떠는 것은 마치 감기에 걸렸을 때 그것 때문에 죽을까 두려워 떠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미국의 통계에 의하면, 매 년 감기로 죽는 사람이 약 3만 명에서 5만 명인데, 전립선암으로 사망하는 사람이 매 년 3만 명 정도입니다. 전립선암은 전이되거나 말기가 아니면 거의 완치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립선암으로 인해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허깨비를 보고 놀라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암’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가 있습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잠시나마 죽음을 ‘나의 문제’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감정을 피할 것이 아니라 진지하게 씨름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죽음에 대해 제대로 준비되었을 때, 삶에 대해서도 바른 자세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전도서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더 낫다. 살아 있는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7:2)

“내가 죽는다.”고 생각하니, 두 가지의 감정이 제 마음에 들어찼습니다. 첫째는 ‘두려움’은 없었으나 ‘아쉬움’이 느껴졌습니다. 아마도 저는 지금까지의 저의 삶에 대해 꽤 만족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제까지 경험하고 살아온 모든 것을 더 이상 보고 느끼고 만지고 누릴 수 없다고 생각하니, 아쉬웠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보고 싶고, 지금 하고 있는 일을 좀 더 하고 싶었습니다. 때로는, 그동안 제 기억에 저장되었던 수 만장의 슬라이드가 돌아가면서 제 마음에 야릇한 향수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것이 아쉬웠습니다. 그 아쉬움이 커가는 만큼, 이 땅에서 제게 주어진 모든 것이 참으로 소중해졌습니다. 나의 삶이 얼마나 귀한 선물인지를 새삼 느끼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가 제 마음에 들어찼습니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어려울까, 싶었습니다. 연로하신 부모님에 대한 걱정, 저를 많이 의지하고 사는 아내에 대한 걱정, 아직도 저의 자리가 필요한 아이들에 대한 걱정, 그리고 저를 의지하고 사랑하는 교우들에 대한 걱정이 마음에 들어찼습니다. 내가 없어지면 많은 이들의 마음에 큰 구멍이 생길 것 같았습니다.

길지는 않았지만, 저는 이 두 가지 감정을 붙들고 씨름했습니다. 이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곰곰이 따져 보았습니다. 아뿔싸, 그것은 제 믿음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증거였습니다. 놓고 가야 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은 죽음 이후에 볼 세상에 대한 기대감이 그만큼 약하다는 증거였고,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는 그들이 ‘내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믿지 못하는 데서 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땅히 닿아야 할 지점까지 가지 못한 저의 믿음의 뿌리를 보고 반성하고 참회하고 간구했습니다.

3.

이 시기에 제 기도 중에 가장 자주 암송하고 묵상한 말씀이 빌립보서 1장 21절입니다.</DIV> <DIV>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
</DIV> <DIV>이 말씀은 바울 사도가 로마의 감옥에서 처형을 기다리면서 쓴 신앙 고백입니다. 오늘 당장이라도 끌려 나가 참수를 당할 상황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워낙 함축적인 말씀이므로 의역을 해 보면 이렇게 됩니다.

나의 삶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분의 뜻을 행하며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으로써 저는 예수 그리스도와 완전히 하나가 될 것이며, 그분과 함께 더 왕성하게 일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수 없이 암송하며 묵상하고 기도하면서 저의 삶의 목적이 바울 사도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것에 있기를, 그분의 뜻을 이루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기를 기도했습니다. 그 같은 열망이 강하다면, 죽음으로 인해 놓고 가야 할 것들을 아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삶의 목적이 건강하게 오래 오래 사는 데 있다면, 죽음은 재앙이 될 것입니다. 삶의 목적이 출세하고 성공하는 데 있다면, 죽음은 완전한 실패가 될 것입니다. 자식 잘 되는 것을 보는 것이 삶의 목적이라면, 죽음은 불행이 될 것입니다. 죽음으로 인해 그 모든 것을 놓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삶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그분이 드러내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는 것에 있다면, 죽음은 결코 재앙도, 실패도, 불행도 아닐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집니다. 어떤 사람은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칩니다. 예수께서 우리를 불러 살라 하신 대상은 영원한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찾고 그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살라는 것입니다. 그 나라가 삶의 목적이 된다면, 사는 것에 진정한 의미가 깃듭니다. 그 나라가 삶의 목적이 된다면, 죽는 것이 두렵지 않습니다. 죽음은 그 영원한 나라에 이르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산다는 말은 얼른 들으면 아주 모호한 말입니다. 직장에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들은 대개 자신의 직업을 가족 부양의 목적으로만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치부하는 수단으로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출세의 도구로 삼습니다. 사회에 공헌하기 위한 통로로 생각하는, 수준 높은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을 하나님 나라의 시각으로 봅니다. 자신의 직업을 통해 치부하거나 명예를 탐하거나 가족을 부양하는 것에 목적을 두지 않습니다. 자신의 직업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드러나고 그 나라의 정의가 이루어지는 것에 목적을 둡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그 나라에 미칠 영향을 생각하면서 행하려고 노력합니다.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면서 보이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만이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눈이 두 개인 것은, 한쪽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고 한쪽 눈으로 이 세상을 보라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의 눈이 떴다 감았다 하도록 만들어진 것은 끊임없이 보이는 세상에 눈을 감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 나라를 보라는 뜻이 아닌가 싶습니다. 감은 눈으로 하나님 나라를 보고, 뜬 눈으로 이 세상을 살라는 뜻일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죽음이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죽음은 이 땅에서 사는 동안에 마음 다해 사모하고 헌신했던 그 하나님 나라에 이르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하나님 나라를 보고 그 나라를 위해 산다면, 죽음을 대면하여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염려와 걱정에 붙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속한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속한 사람들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실로 행복할 때는 내가 그들의 기둥이 되어 줄 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를 발견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나라를 위해 살아갈 때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께서 뭔가 뜻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이르면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보지 못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보게 될 것임을 믿기 때문입니다. 

4.

두 번째로 말씀 드리려는 주제는 ‘인간의 존엄성’ 관한 것입니다.

저에게 암 진단을 전해 준 의사가 제게 첫 번째로 던진 말이 있습니다. “This is not life-threatening issue. It is quality of life issue.”(이것은 죽고 사는 문제가 아닙니다. 삶의 질의 문제일 뿐입니다.) 수술로 전립선을 제거하거나 방사선으로 치료하는 과정에서 주변에 있는 신경을 손상시키는 일이 발생할 수 있고, 그럴 경우, 몇 가지 심각한 후유증을 겪을 수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후유증이 소변을 완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요실금’(incontinence)입니다. 저의 의사는 어떤 치료를 선택하든 이 같은 후유증은 일어날 수 있으며, 그로 인한 불편을 평생 겪어야 할 수도 있다고, 만날 때마다 경고했습니다.

적지 않은 기간 동안 저는 이 문제로 인해 고민했습니다. 아직도 한 참 활동해야 할 나이에 매일같이 이 같은 불편을 참으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제 의사의 말대로 삶의 질이 현저하게 떨어질 것 같았고, 또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에 큰 손상이 생기는 것 같았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깨끗하게 수술을 하고 싶었는데, 수술의사인 저의 주치의는 저의 이 고민을 전혀 덜어주지 않았습니다. “수술을 한다면, 나의 경우 후유증이 일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방어적인 태도로 “그건 언제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결국, 저는 그 같은 후유증이 상대적으로 적은 방사선 치료를 할 생각을 하고, 아직 초기 상태이므로 기도와 운동과 식이요법으로 몇 달 동안 통제해 보기로 했습니다.

6개월 정도가 지나서 다시 검사를 해 보니,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였습니다. 제 상태를 아신 교우들께서는 왜 치료를 하지 않느냐고 불안해 하셨습니다. 저는 더 미뤄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중, 어느 교우께서 로봇 수술에 뛰어난 의사가 있으니 만나 보라고 권고해 주셨습니다. 원래의 의사가 지나치게 방어적인 태도로 임했기 때문에 다른 의사를 만나볼까 생각하던 참이었습니다. 새로 만난 의사는, 후유증의 가능성은 언제나 있지만 저의 상태에서는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안심 시켜 주었습니다. 특별한 변수가 일어나지만 않으면 수술 후 몇 주일 안에 정상으로 회복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 만남 후에 저는 최종 결정을 두고 며칠 동안 기도의 힘을 모았습니다. 그 동안 생각했던 방사선 치료를 받을지, 아니면 새로운 의사에게 수술을 받을지를 두고 기도하며 마음을 정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기도하던 중, 저는 그 동안 제 마음을 칭칭 동여매고 있던 끈들이 한꺼번에 잘려 없어지는 것 같은 경험을 했습니다. 두 가지의 생각이 제 마음에 들어차면서 그 같은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첫째, 기도하는 중에 문득 이런 저런 장애와 질병과 아픔을 끌어안고 살아가시는 분들이 생각났습니다. 어떤 분은 교통사고로 인해 척추를 다쳐 한 순간에 전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셨습니다. 어떤 분은 오래 전에 당한 뇌졸중(stroke)으로 인해 몸 한쪽에 대한 통제력을 잃으셨습니다. 실명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빠지는 시력을 붙들기 위해 노력하는 분도 계시고, 늘 산소 호흡기를 들고 다녀야만 하는 분도 계십니다. 육신적인 장애 혹은 정신적인 장애를 가진 배우자 혹은 자녀로 인해 마음이 시커멓게 썩은 분들도 한 둘이 아닙니다. 기도 중에 그런 상태에 있는 분들이 한꺼번에 클로즈업이 되었고, 저는 그 순간에 제가 그 동안 얼마나 사치스러운 고민에 붙들려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에게 부끄러웠습니다. 하나님께도 부끄러웠습니다. 그분들을 섬기는 목사가 그분들의 장애에 비하면 너무도 작은 장애의 가능성을 두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부끄러웠습니다.

둘째, 거의 같은 시간에 저의 마음에 들어찬 또 다른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에게 장애가 온다 해도 그것을 믿음으로 잘 받으면 그 장애는 나를 더 깊어지게 할 것이며, 지금껏 내가 보지 못한 것을 보게 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그것은 장애와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 될 것이라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저는 이렇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또한 그렇게 설교하기도 했습니다. 믿음으로 받으면, 모든 고난에는 축복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만, 저 자신에게 일어날지도 모를 아주 작은 장애의 가능성 앞에서 이 진리를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몰로카이 섬의 성자’ 다미안 신부는 한센씨 병자들을 섬기면서 그 자신도 한센씨 병에 걸리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면, 나는 이 작은 장애 정도는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은 얍복 나루에서 하나님의 천사와 씨름을 하다가 환도 뼈가 어긋나서 그 이후로 죽을 때까지 다리를 절게 되었습니다. 다리를 저는 상태가 얼마나 심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야곱에게 아주 큰 불편을 주었을 것입니다. 위풍도 당당하게 살던 야곱이 그 밤 이후로는 초라한 노인으로 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성경은 절룩거리며 얍복 강을 건너는 야곱에게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창 32:31)고 합니다. “해가 솟아올라서 그를 비추었다.”는 말은 야곱에게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뜻입니다. 육신에는 장애가 생겼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에는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입니다. 아마도 야곱은 때로 아픈 다리와 허리를 주무르면서 얍복 나루에서 있었던 일을 생각하곤 했을 것입니다. 비록 그로 인해 얻은 장애가 자신에게 큰 불편이었지만, 그로 인해 얻은 영적 축복을 생각하면 절로 감사가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5.

이 두 가지의 생각은 저의 마음에 무한한 자유를 주었습니다. 만일 생길지도 모를 후유증에 대한 걱정에서 한 순간에 해방되었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기쁘게, 감사하게 받을 마음이 생겼습니다. 그 장애가 주어진다면, 그 장애로 인해 얻게 될 영적 축복이 어떤 것일지, 기대가 되기도 했습니다. 제가 지금 온전하게 회복되고 있어서 이렇게 말씀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수술하기로 결정한 날, 저는 아내에게 저의 이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아내는 저의 고백을 듣고는, 이제야 자신도 마음 놓고 수술을 기다릴 수 있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장애만이 아니라 죽음이 온다 해도 감사할 터이니, 하나님께서 알아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고 수술에 임했습니다. 수술 전에 조영진 감리사님께서 오셔서 여호수아 1장을 읽어 주시고 기도해 주셨습니다. 수술이 끝난 후, 의사는 아내에게 찾아와 수술이 아주 잘 되었다고 축하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회복실에서 정신을 차릴 즈음, 100년만의 지진이 와싱톤을 흔들었습니다. 저는 침대 위에 누워서 흔들리는 천장을 보며, ‘저 천장이 무너지면 나는 이 침대 밑으로 피해야 하는데, 배가 아파서 피하지도 못하겠네. 그러면 여기서 이렇게 죽겠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죽어도 좋다고 말씀 드렸더니, 수술 잘 받게 해 놓으시고 이렇게 죽게 하시려나? 뭐, 이런 경우가 있나?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주님 품에 안기는 것인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지진은 멈추었습니다.

수술 이후, 회복하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은 것을 겪었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특별히 신체적인 장애를 잠시 겪으면서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수술 후 약 일 주일 동안 소변 주머니를 착용했고, 2주일 정도 요실금으로 인해 패드를 차고 살아야 했습니다. 잠깐이지만 그 같은 불편을 겪으면서, 장애를 짊어지고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주 조금이지만 그 맛을 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신체의 일부가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가 되지 않는 것이 얼마나 좌절하게 만드는지, 당연히 그렇게 되게 되어 있다고 생각했던 몸이 그렇게 되지 않을 때 그 심리적인 파괴력이 얼마나 큰지를 경험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저는 장애를 짊어지고 사는 분들에 대한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저는 잠시 동안 겪으면 곧 정상으로 회복되는 상태이지만, 회복될 수 없는 장애를 짊어지고 사시면서도 그 장애에 짓눌리지 않고 살아가시는 분들을 깊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휠체어에 몸을 의지하고 예배를 다녀가시면서 던지는 그 미소가 얼마나 많은 눈물과 한숨과 기도로 만들어진 것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소변 주머니를 달고 살아야 하는 상태에서도 깔끔하게 자신을 관리하고 밝은 미소로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얼마나 깊은 영적 내공을 필요로 하는지를 알았습니다. 치료되지 않는 질환으로 인해 때로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할 만큼 지독한 통증을 겪으면서도 수줍게 웃으면서 “견딜 만 합니다.”라고 대답하셨던 것을 생각하니 콧날이 시큰해졌습니다. 살고 싶은 이유가 하나도 없어 보이는데도, 아침이 되면 또다시 일어나 말끔히 옷을 차려 입고 하루의 일상을 시작하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를 마음 깊이 깨닫게 되었습니다.

인간의 존엄성은 정신과 신체가 온전해야만 지켜지는 것이라고, 얼마나 많은 분들이 오해하고 사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체에 혹은 정신에 작은 손상이라도 생기면 마치 생이 끝난 것처럼 절망하거나 숨어 버립니다. 하지만 인간의 존엄성은 신체와 정신이 온전히 보전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장애가 생기고 문제가 생겼더라도 그것에 짓눌리지 않는 인간의 정신에 있습니다. 웬만한 사람이라면 그 장애와 고난에 짓이겨져 버렸을 상황에서 수정같이 빛나는 미소를 지을 수 있는 내적 힘을 보고 우리는 인간이 존엄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을 때 주신 그분의 형상입니다.

한국이나 미국 같이 잘 사는 나라에 사는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잘만 하면 질병이나 장애 없이 오래도록 살아갈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는 것입니다. 의학기술과 과학 문명이 고도로 발전하다 보니, 아무런 질병도, 아무런 재앙도 없는 삶을 꿈꿉니다. 때로는 늙지 않는 삶까지 꿈을 꿉니다. 그러다 보니, 질병은 무조건 안 좋은 것이며, 장애는 언제나 재앙이며, 늙는 것은 불행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병에 걸리는 것과 늙는 것 그리고 때로 장애를 입는 것은 육신을 입고 사는 사람에게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때론 당연한 인생의 질서입니다. 우리는 할 수 있는대로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인 우리의 몸을 잘 지켜 건강하게 살도록 힘써야 하지만, 피할 수 없는 질병과 장애 혹은 노화가 올 때, 그리고 마침내 죽음 앞에 설 때,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순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 좋은 믿음이 아니라, 그런 것들을 받아들이는 것이 좋은 믿음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테이야르 드 샤르댕(Teilhard de Chardin)의 기도를 읽어 드립니다.

몸에 하나둘 나이 먹은 흔적이 생길 때,
그리고 이 흔적들이 내 마음을 흔들어 놓을 때,
나를 조금씩 움츠러들게 하고 쇠약하게 하는 질병이 몸 안팎에서 생겨날 때,
나도 병들고 늙어 간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으며 두려움 속에 빠져들 때,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를 만들어 왔던, 알지 못하는 위대한 힘들의 손길 안에서
자신을 잃어 가고 있으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마침내 느낄 때!
오 이 모든 암울한 순간에,
오 하나님, 저로 하여금 알게 하소서.
그 모든 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제 존재의 중심으로 들어와
저를 하나님께로 데려가기 위해 저를 조금씩 분해시키는 과정임을!
그 과정에서 하나님께서도 저만큼이나 아파하고 계시다는 것을!


6.

암 진단을 받고 한 동안 하나님의 기적적인 치유를 위해 기도한 적이 있습니다. 의술을 통한 치료도 하나님께서 주시는 치료인 것을 믿지만, 하나님께 진지하게 기도하지 않고 곧바로 의학 치료로 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취할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자신의 지병을 위해 세 번 간절히 기도하고 나서 그 질병과 함께 살았다고 말한 것처럼, 저도 몇 번은 마음 다해 하나님의 치유를 구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했는데, 하나님께서는 허락하시지 않았습니다. 얼마 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기적적인 치유를 허락하셨다면, 이 많은 경험과 깨달음은 없었겠지? 하나님이 내 기도에 응답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었나?’
오래 전, 한 히브리 시인은 이렇게 노래한 적이 있습니다.

고난을 당한 것이,
내게는 오히려
유익하게 되었습니다.
그 고난 때문에,
나는 주님의 율례를 배웠습니다. (시 119:71)

저는 그 시인이 왜 이렇게 고백했는지, 그 말씀의 깊이를 조금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고난을 끓어 안고 살아갈 때, 그 고난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닙니다. 그 고난은 상상할 수 없는 보화를 담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것을 경험하고 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제가 겪은 것은 고난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도 부끄러운 것이지만, 이 귀한 진리의 한 조각이라도 볼 수 있었기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제, 정상적인 생활로 복귀하면서 저는 모든 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교우님들의 사랑 어린 기도에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이 주신 많은 축복에 감사드립니다. 잠시 동안이지만 저를 무력하게 만드시어 교우들의 아픔을 알게 하시고, 좀 더 깊이 교우들의 아픔을 이해하도록 해 주신 것에 감사드립니다. 어떤 의사께서 그렇게 말씀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심하게 앓아 수술을 받은 이후로 나는 더 이상 같은 의사가 아니었다.” 저도 더 이상 같은 목사가 아니기를 기도합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의 삶의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에게 열어 주신 하나님 나라를 향해 곧게 서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로 인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참된 신앙에 이르기를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를 보고 사는 사람답게 이 땅에서 그 어떤 고난과 질병과 장애와 아픔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주신 거룩한 하나님의 형상을 지키며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살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 어떤 경우에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 나라를 보고 이 땅을 살 때, 죽음은 이 땅을 보고 하나님 나라를 사는 삶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입니다.

고난의 왕이신 주님,
주님이 저희가 사는 이유가 되십니다.
주님 안에 있다면
고난이나 형통이 다르지 않습니다.
주님 안에 있다면
삶이나 죽음이 다르지 않습니다.
오직 주님 안에 있는 것,
오직 주님과 함께 사는 것,
오직 주님을 위해 사는 것,
그것만이 저희에게 필요합니다.
오, 주님,
저희에게 이 삶을 주소서.
아멘.